< 01. 대대로 가겠습니다(15) >
인생 리셋 오 소위! 2부 015화
01. 대대로 가겠습니다(15)
한만식이 고민하듯 길게 신음했다. 이선주가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왜요? 빌딩이 있다니까, 생각이 달라져?”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식놈들 중에서 우리 소희가 가장 똘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와서요?”
“봐봐, 내가 예정부터 대만이하고 중만이에게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서 우리 소희가 좋은 배우자를 만난 것이 아니야.”
“어이구······.”
이선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는 정략결혼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이제 와서 오상진을 인정하는 한만식이 우습긴 했지만 어쨌거나 오상진이 한만식의 기준점은 통과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후로 이선주는 오상진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때마다 한만식도 조금씩 호응을 했다. 그러다 어제는 대뜸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데 말이야. 그 녀석은 왜 집에 안 오나?”
“당신이 오라고 해야 오죠.”
“아니, 우리 때는 대뜸 찾아가서는 교제 허락받으려고 무릎부터 꿇고 그랬는데······. 이 녀석은 아주 그냥 몇 년을 사귀었는데 코빼기도 안 보여.”
“그러면 지난번에 소희가 집에 데리고 온다고 했을 때 못 이기는 척하고 승낙을 하지 그랬어요.”
“그때는 내가 술 마셨잖아.”
“당신이 술 안 마시고 들어온 날이 있고?”
“어허, 이 사람······.”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서 뭐요? 나보고 날 잡으라고?”
“크흠, 바쁘지 않으면 집에 들르라고 그래. 얼굴 좀 한번 보게.”
“알았어요. 그렇게 말해볼게요.”
이선주가 그 생각을 끝으로 회상에서 깨어났다.
“참! 소희 아버지가 오 서방을 좀 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한번 볼래요?”
“아버님께서요?”
이선주는 찬찬히 오상진의 표정을 살폈다. 만약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오상진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본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겠지.’
이선주는 설사 오상진이 기대에 못미치는 반응을 보이더라도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상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그런 게 아니야?’
이선주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오상진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시간이 언제 괜찮으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소희 씨하고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전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상진의 당당한 말투에 이선주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소희가 오 서방을 왜 좋아하는지 알겠네요.”
이선주의 말에 오상진이 미소를 지었다.
“참, 그리고 소희가 조금 더 공부하기로 한 것은 소희 뜻이기도 하지만 소희 아빠 병원 사정이 좀 그리되었어요.”
“네? 병원 사정요?”
“이번에 병원을 확장하면서 외부 투자를 받기로 했는데 아직 큰 성과는 없지만 병원 규모가 제법 커졌거든요. 그래서 소희 아빠가 조금 힘에 부치는 것 같아요. 대만이는 운영 쪽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고 중만이가 들어와 도와주면 좋겠는데 누구 때문에 일이 너무 잘되어서 부를 수가 없게 되었고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솔직히 우리 둘째 아들 사람 만들어줘서 오히려 내가 참 고마워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 이선주에게 둘째인 한중만은 참 아픈 손가락이었다.
학창 시절 누구보다 공부도 잘했고 똑똑해서 뭘 해도 잘할 거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영화판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한만식은 크게 반대를 했지만 이선주는 뭔가를 보여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연일 실패를 하고 미리 받았던 재산까지 홀라당 말아먹고 나니 한중만을 만류하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됐다.
거의 한량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한중만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고 어디 가서 한중만이 뭘 하는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상진을 만나면서 한중만도 팔자가 폈다. 오상진 덕분에 투자가 잘되고 큰돈을 벌게 되자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한중만이 영화 제작을 한다고 떳떳하게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오상진의 도움을 받은 것은 한중만뿐만이 아니었다. 큰아들인 한대만의 아내인 김소희도 오상진과 함께 군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렴하게 임대를 받아 커피숍을 운영 중인데 장사가 아주 잘되고 있었다. 덕분에 한대만도 아버지 앞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커피숍 수입을 통해 처가 식구를 챙길 수 있게 되자 김소희도 출산 후에 맏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만식도 복덩이가 들어왔다며 김소희와 손자인 한석민을 그리도 좋아했다.
‘이게 다 우리 오 서방 덕분이야.’
오상진을 바라보는 이선주의 눈빛이 좀 더 따뜻하게 바뀌었다. 그때 전화통화를 마친 한소희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나 몰래 무슨 얘기 했어?”
“뭔 얘기를 해. 아무 말도 안 했어.”
이선주의 말에 한소희의 시선이 오상진에게 향했다.
“뭐예요. 나 흉봤죠?”
만약 눈앞에 앉아 있는 게 한 대만이나 한중만이었다면 오상진은 장난스럽게 말을 받아줬을 터였다. 하지만 이선주 앞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어머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요.”
그러자 한소희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응? 뭐지? 상진 씨가 이렇게 말 하니까 더 불안한데. 그리고 상진 씨가 몰라서 하는 소리인데 우리 엄마 남 흉보는 거 잘 해요.”
그러자 이선주가 당황했다.
“얘는 지금 오 서방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사실인데 뭘? 엄마 원래 그런 거 좋아하잖아.”
“또또또또. 오 서방. 쟤가 저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어머님.”
“아뇨. 내가 미안하죠. 저런 우리 딸을 만나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어머님.”
오상진과 이선주가 서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그 모습에 한소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두 사람······. 아 진짜!”
한소희는 입을 쭉 내밀며 삐진 척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오상진이 피식 웃고 말았다.
10.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도 한소희의 입술이 잔뜩 나와 있었다.
오상진이 운전을 하며 힐끔 쳐다봤다.
“소희 씨 아직도 삐졌어요?”
“흥.”
“그러지 마요.”
“뭘 그러지 마요?”
“우리 소희 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왜요? 이런 내가 싫고 창피해요? 그럼 우리 엄마랑 가서 놀아요. 이런 철딱서니 없는 여자랑 왜 만나는지 모르겠네.”
아까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서운하다는 티를 내는 한소희에게 오상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뻐서?”
한소희는 그 소리가 싫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예쁜 건 금방 질린다고 하던데요.”
“우리 소희 씨의 외모는 쉽게 질릴 외모가 아니죠.”
“그건 인정! 하긴 제가 또 한 외모 하죠.”
“그럼요. 지난번에 소희 씨 영화시사회 참석했을 때 기획사 사장과 실장들이 서로 명함 주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그때 주연 여배우 표정 못봤죠?”
“주연 여배우요? 와, 그사이에 여배우를 봤어요?”
한소희의 눈이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오상진은 순간 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보였어요. 소희 씨 어깨너머로 여배우가 서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여배우가 엄청 불안해하던걸요.”
“왜요?”
“당연히 소희 씨 얼굴이 예쁘니까요. 만약 소희 씨가 연예계 진출하면 지금 예쁘기만 한 배우들 전부 굶어야 할걸요?”
“칫, 뭐예요.”
과거 오상진은 연애를 글로 배웠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여자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한소희와 연애를 하면서 말주변이 많이 늘었다.
“자! 우리 이제 어디로 가요?”
“엄마 만났더니 피곤하네요. 우리 그냥 집에 가서 쉬는 건 어때요?”
“그럴까요?”
오상진과 한소희는 둘이 얻어놓았던 서울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갔더니 찬 기운이 한소희의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추워. 상진 씨 보일러 꺼놨어요?”
“미안해요. 내가 켜놓고 간다는 것이 깜빡했네요.”
“진짜······. 내가 이러다 수도관 동파된다고 그랬죠? 외출이라도 해놓고 가지.”
“제가 얼른 틀게요.”
오상진이 서둘러 보일러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한소희는 화장실이든 주방이든 수도를 틀어봤다.
다행히 수도가 동파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신축이라 그런지 이런 건 참 좋네요.”
한소희가 말을 하고는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집안이 데워지기 전까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한소희가 슬며시 오상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오상진도 자연스럽게 한소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때 오상진의 콧속으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전날에 비가 와서 그런지 바깥 냄새가 살짝 역한 느낌이 들었다.
오상진은 한소희가 눈치채지 않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걸 모를 한소희가 아니었다.
“왜요? 내 머리에서 냄새가 나요?”
“조금요?”
“진짜 나요?”
“바깥 냄새요. 금방 없어질 거예요.”
“칫. 그래도 좋은 냄새 난다고 해주지······.”
“우리 소희 씨야 항상 좋은 냄새가 나죠.”
“됐어요.”
한소희가 오상진을 툭 밀치고는 주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괜히 냉장고를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시켜 먹지 말고 집에서 해 먹을까요?”
“집에 먹을 것이 있나?”
“내가 지난주에 장 봐 왔거든요. 그런데 상진 씨 하나도 손 안 댔네.”
한소희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냉장고 안은 저번 주에 자신이 정리했던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반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후 이거 다 버리게 생겼네.”
“그러게 뭐하러 매번 장을 봐요. 힘들게.”
“상진 씨 집에서 밥 먹으라고 한 거죠. 나도 종종 집 밥 해 먹잖아요.”
“요즘은 통 안 해 먹던 거 같은데요?”
“암튼 안 되겠다. 오늘 이거 다 처리해야겠다.”
한소희는 말을 하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다 꺼냈다. 재료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말했다.
“으음, 국적불명이긴 한데 우리 해물 라면 먹어요.”
“네? 해물 라면요?”
“해산물이 조금 있는데 이걸로 탕을 끓이기는 좀 그렇고, 그냥 라면 넣고 먹어요.”
한소희가 해산물을 싱크대에서 헹궜다. 그리곤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부었다.
한소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치마를 둘렀다. 그런 한소희의 모습이 오상진은 참 예뻐 보였다.
‘와. 처음에는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는지 저렇게 요리도 하고 말이야. 내가 참 여자를 잘 만났어.’
오상진이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을 했다. 그때 한소희가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그래요.”
순간 오상진은 신혼처럼 설렜다. 그래서일까. 자신도 모르게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갔다.
“소희 씨.”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그게 아니라······.”
“어휴. 알았어요.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