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613화
45장 까라면 까야죠(82)
안희영 선생이 오상진을 빤히 바라봤다. 솔직히 안희영 선생의 입장에서는 오상진이나 한소희나 원장, 그리고 자기를 밀친 최미선이나 다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기를 밀친 최미선이 더 나쁜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 자기는 해고를 당했고, 그 누구도 자기를 책임져 주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버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한소희가 갑작스레 전화해서 자신의 안부를 물으며 꼭 돕겠다고 하는 말에 뭘 어떻게 도울 것인지 해서 한번 나와 본 것이었다.
그런데 오상진에게서 이렇듯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나이도 어린데 생각하는 것은 어른이야.’
안희영 선생이 오상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때 한소희가 음료수를 가지고 돌아오다가 오상진을 빤히 바라보는 안희영 선생을 봤다.
‘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는데…….’
한소희가 눈을 반짝이며 발소리를 괜히 크게 내며 후다닥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안 선생님. 여기요.”
안희영 선생이 깜짝 놀라며 커피를 받았다.
“네에, 감사합니다.”
안희영 선생이 인사를 했다. 한소희는 오상진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자기도 여기.”
“고마워요.”
오상진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한소희도 커피를 마신 후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 그게…….”
안희영 선생이 살짝 머뭇거렸다. 오상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일을 그만두셨습니까?”
“네.”
“아니에요, 솔직히 제가 유치원 선생으로서 자질이 없는 것 같아서, 예전부터 그만둘 고민을 하던 참 이었어요. 그런데 그 일도 있고 하니까,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만뒀어요.”
안희영 선생은 앞에 앉은 이들이 아무리 사람 좋게 보여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오상진과 한소희에 대한 100%의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희영 선생은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얘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입을 닫고 있어야 할지 말이다. 그러면서 지난 일을 잠시 돌이켜 봤다.
‘만약 내가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 앞에 있는 한소희 이분이 그냥 그 여자에게 맞는 것을 내버려 뒀다면…….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까? 평소처럼 한발 물러서 있었다면 내가 잘리지 않아도 되었겠지?’
안희영 선생이 혼자 생각을 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는 오상진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안희영 선생은 사과를 받고도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애둘러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쪽은 한소희였다.
‘어, 뭐지? 진짜 자의로 그만둔 건가?’
한소희는 다시금 물어봤다.
“안 선생님, 정말로 자의로 그만두신 거예요?”
“네.”
“원장선생이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한소희는 재차 확인을 받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소희가 넌지시 오상진을 바라봤다. 오상진도 똑같은 24살, 25살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상진은 대대장까지 하면서 수많은 병사들을 상담해왔고, 눈빛이나 말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 선생님. 사실 안 선생님 돕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절대로 안 선생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실은 이 문제로 지인 기자가 기사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안희영 선생의 표정이 달라졌다.
“기사요?”
“네. 이 기사가 나가면 아마도 최기혁 장군이나, 그 따님인 최미선 씨도 아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선생님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신 거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저희가 다시 복직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고 편안하게 얘기를 해주십시오.”
“…….”
안희영 선생은 담담히 오상진을 바라봤다. 솔직히 한소희에 대해서는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일단 예쁘고,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오상진은 젊은 나이인 것 같으면서도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매우 믿음직스러웠다.
‘말을 해야 하나? 정말 이 사람들이 날 도와줄 수 있을까? 또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안희영 선생의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바로 앞에 굳건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오상진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네, 알겠어요. 말씀을 드릴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상진의 표정이 환해졌다. 안희영 선생은 물로 가볍게 입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실은…….”
최미선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았다.
“진짜 짜증 나! 아빠는 알아서 해결한다고 하더니. 이게 뭐야, 창피하게.”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 박민철이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당신이 뭐 어떻게 하게.”
“이 양반아, 이런 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니까. 내가 누구야. 서울시 시의원이야.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까. 당신은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순간 최미선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짜? 정말이지?”
“그럼!”
“그러면 자기…….”
최미선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박민철 시의원에게 안겼다.
“이 사람이 왜 이래!”
“아니, 자기 고생도 했고 하니까. 간만에 뜨거운 밤 좀 보내려고 하는 거지.”
“뭐?”
박민철 시의원이 당황했다. 최미선이 나릇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오랜만에 사랑 좀 하자는데.”
“사, 사랑?”
“으응, 기다려. 나 금방 씻고 올게.”
“여, 여보! 왜 그래? 아아아, 맞다. 나 오늘 할 일이 있다. 지금 서재로 가서 일해야 해. 내가 아침까지 의회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
박민철 시의원이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났다. 최미선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또 무슨 일! 일 다 끝났다며!”
“이 사람아. 시의원 일이 어디 한번 하고 끝나나. 그리고 쉬운 일이 어디 있어. 국민의 안정을 책임지는 사람인데. 내가 바삐 움직일수록 국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윤택해지는 거야.”
박민철 시의원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최미선은 곧바로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만날 일이야. 만날!”
“어허, 이 사람이 또. 아무튼 일 하러 간다.”
박민철 시의원이 서재로 들어갔다. 최미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시의원이 밤낮없이 일해. 이씨!”
그때 갑자기 서재 문이 열리며 박민철 시의원이 나왔다. 그는 서둘러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여보! 나 지금 사무실 나가봐야 해.”
“사무실! 아 왜!”
“급한 보고서가 있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네. 오늘 밤 새워서 작업할지도 모르니까. 일찍 자!”
“또?”
“이 사람아, 다음 선거 때 나도 여의도 입성해야 할 것 아니야. 계속 시의원으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도…….”
최미선은 많이 아쉬워하고 있었다. 박민철 시의원은 그런 최미선을 살포시 안아줬다.
“조금만 참자. 이제 거의 다 왔어. 자기도 이제 사모님 소리 들어야지. 안 그래?”
“알았어.”
최미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박민철 시의원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오지 말고.”
박민철 시의원이 서둘러 구두를 신었다. 최미선이 그런 그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요.”
박민철 시의원이 최미선의 뺨에 뽀뽀를 ‘쪽’ 해주고 현관을 나섰다. 최미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이만하면 예쁜 얼굴 아니야? 막 안고 싶고 그러지 않나?”
최미선이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하다가, 문득 한소희가 떠올랐다.
“갑자기 그년 얼굴이 떠오르네.”
한소희가 자신에게 빠득빠득 대드는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자신보다 예쁘다는 것이었다.
“싸가지 없이 예뻐 가지고. 진짜 맘에 안 들어! 무조건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나?”
최미선이 고민을 하는데 뭔가 생각이 났는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검색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원장선생님, 저예요.”
-네?
“저라고요. 최미선!
-아, 네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
“그때 그 사람들 다시 안 왔죠?”
-네, 아직 안왔어요.
“전화도 안 왔어요?”
-안 왔는데요.
“아니……. 답답하네. 이런 일이 생겼으면 원장선생님께서 나서서 일을 딱딱 처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저쪽에서 직접 찾아와 사과하게 만들어야죠! 지금 뭐 하고 계세요?”
-그것이…… 죄송합니다. 제가 안 선생에게 얘기를 해볼게요.
“됐고. 우리 딸 지수 담임 선생님 일 그만두게 하세요.”
-네?
수화기 너머 원장선생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그리 말씀을 하시면……. 아, 지난번에는 일 잘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지난번은 지난번이고. 어디 내가 말하는데 중간에 끼어서는 쓸데없어 얻어맞기나 하고 말이죠.”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안 선생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 나오지 않게 주의를 줬어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원장선생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지금 기분이 무척 상했다는 겁니다.”
-아, 그런……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안 선생보고 사과하라고 할까요?
“안 선생 사과를 내가 왜 받아요. 그 사람들 사과를 받아야지. 아무튼 저 안 선생 싫으니까. 그만두라고 하세요.”
최미선은 막무가내로 나갔다.
“아무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셔죠?”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원장선생은 사무실에 앉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매번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부원장이 들어오며 그 소리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원장님.”
“최장군 따님 있잖아요.”
“아, 미선 씨요?”
“안 선생 자르라고 하네.”
“왜요? 그 일 때문에요? 이거 어떻게 하죠. 하필 그때 쉬는 날이라서……. 그때 내가 있었으면 막는 건데.”
“그러게요. 왜 하필 그날 쉬어서는…….”
“원장님 저도 쉴 때는 쉬어야죠.”
“알아요. 미안해요. 너무 답답해서. 그보다 안 선생에게는 뭐라고 하죠?”
원장선생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부원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안 선생 자르시게요?”
“그럼 어떻게 해요. 안 자르면 난리 치는 거 아시잖아요. 지난번에도 김 선생 그렇게 그만뒀는데…….”
“원장님, 진짜 지수 어머니 때문에 우리 선생님 몇 명이나 그만두는지 모르겠어요. 안 선생은 새로 오신 선생님치고는 일 참 잘했는데. 아이들에게도 좋은 선생님이고요.”
“알죠. 왜 모르겠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수 어머니인데. 그리고 최 장군님께서 유치원 잘되게 얼마나 신경을 써주셨어요.”
원장선생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부원장님 안 선생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원장은 착잡한 얼굴로 원장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