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597화
45장 까라면 까야죠(66)
“네.”
리모콘으로 TV를 켰다. 넓은 화면에 생생한 화질이 고스란히 눈으로 전해졌다.
“이야, 장난 아니다.”
“사람이 엄청 크게 보입니다.”
“나도 그래.”
김우진 병장의 머릿속으로 음악 방송이 떠올랐다.
“야, 음악방송 언제 한다고 그랬냐? 오늘이냐?”
“아닙니다, 내일입니다.”
“내일? 아이씨, 내일까지 언제 기다리냐.”
김우진 병장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내일 확실히 핑크 컴백 하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야이, 자식아! 빨리 알아봐. 우리 천사 핑크 컴백을 알아야지.”
“네네, 알겠습니다.”
그때 강태산 이병 내무실로 들어왔다. 김우진 병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우, 나의 귀염둥이 태산이 왔어?”
“이, 이병 강태산…….”
강태산 이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관등성명을 댔다. 갑자기 웃으며 다가오는 김우진 병장을 살짝 경계했다. 그런데 김우진 병장은 그런 것도 없이 강태산 이병을 와락 끌어안았다.
“자식!”
“기, 김 병장님…….”
강태산 이병은 당혹스러웠다. 김우진 병장은 강태산 이병을 꼭 끌어안은 채 입을 뗐다.
“태산아. 앞으로 나를 형이라고 불러.”
“이, 이병 강태산. 그래도…….”
“자식이! 괜찮아. 형이라고 불러. 아니지, 지금 형이라고 불러봐.”
“네?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가 있습니까?”
“괜찮다니까. 내가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자, 혀어엉! 해봐.”
“…….”
강태산 이병은 너무 당혹스러웠다.
“인마, 나 제대 얼마 안 남았잖아. 형이라고 해보라니까. 자, 혀어엉.”
김우진 병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강태산 이병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김우진 병장이 미소 한가득 강태산 이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해봐. 혀어엉.”
“아, 네에. 혀어엉.”
강태산 이병이 마지못해, 굉장히 어색한 목소리로 형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 김우진 병장이 곧바로 주위에 있는 소대원에게 말했다.
“봤지? 너희들! 이제부터 태산이 건드리기만 해.”
김우진 병장이 으름장을 놨다. 그러자 차우식 병장이 나섰다.
“아, 진짜! 김 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지금 너무 티 나지 않습니까.”
“인마, 아까 못 들었어? 박 중사님이 태산이에게 잘해주라고 하잖아.”
“그건…….”
차우식 병장이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김 뱀 말이 맞습니다. 태산이에게 잘해줘야죠.”
“그래 인마.”
김우진 병장이 실실 웃었다. 그 외에도 다른 고참들도 강태산 이병에게 말했다.
“고맙다.”
“그래,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지.”
“잘 보마.”
“아버님께도 감사하다고 얘기해 주고.”
1소대원들이 다들 밝은 얼굴로 강태산 이병에게 말했다. 그제야 강태산 이병도 TV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셨구나. 역시…….’
강태산 이병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누군가 1소대 내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 저거 뭐야?”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2소대 하영운 상병이었다. 하영운 상병은 이번 달에 상병을 달았다.
“헉! 뭡니까?”
하영운 상병이 놀란 눈으로 내무실에 들어왔다. 김우진 병장이 힐끔 하영운 상병을 봤다.
“뭐야, 너! 하영운 너 우리 소대에 왜 들어와?”
“저거 뭡니까, 저거!”
김우진 병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TV 바꿨다.”
“이거 다 바꿔줍니까?”
하영운 상병의 물음에 김우진 병장이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야야, 이걸 다 바꿔주겠니?”
“아, 그런데 왜 1소대만 바꿉니까.”
“억울하면 능력 좋은 후임 하나 받던지.”
“네?”
“후후후, 저기……. 우리 예쁜 태산이네 집에서 TV를 보내주시네.”
“와, 집이 얼마나 잘살면 고급 TV까지 보내줍니까.”
“야, 태산이네 집이 좀 잘사는 게 아니라. 많이 잘살아.”
“그렇습니까?”
김우진 병장이 의기양양하게 강태산 이병을 불렀다.
“태산아.”
“이병 강태산.”
“너희 집에 준재벌쯤 되지?”
“아, 저희 집이 재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비슷합니다.”
강태산 이병이 살짝 부끄러운 듯 말했다. 김우진 병장이 어깨에 잔뜩 힘을 줬다.
“봤지!”
“와이씨! 부럽다. 무슨 1소대는 다 갖췄습니까?”
하영운 상병은 TV로 다가가 손을 가져갔다. 바로 김우진 병장이 툭 건드렸다.
“야, 손때 타!”
“좀 만져보지 말입니다.”
“됐어, 인마! 너네 내무실로 가.”
“와, 너무하십니다.”
“너무하긴 인마.”
하영운 상병이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어느덧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저녁 시간이 되었다. 김우진 병장은 여전히 베개에 머리를 베고 누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야, 역시 TV는 크고 봐야 해. 안 그러냐?”
“네. 그렇습니다.”
“와, 저 생생한 피부 좀 봐. 무슨 TV 화질이 이리도 좋냐. 저 모공까지 다 보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김우진 병장과 구진모 상병은 쿵짝이 맞으며 TV를 봤다. 그러다가 김우진 병장이 물었다.
“음악방송 할 때 안 됐냐?”
“아직입니다.”
구진모 상병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 빨리 좀 했으면 좋겠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우진 병장이 힐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태산 이병이 구석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강태산!”
“이병 강태산.”
“이리 와, 인마.”
“네, 알겠습니다.”
강태산 이병이 곧바로 김우진 병장 앞으로 갔다. 김우진 병장이 흐뭇한 얼굴로 강태산 이병을 바라봤다.
“화장실 청소 어때? 힘들지?”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괜찮긴, 힘들지. 그러지 말고 오늘은 쉬어.”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새끼, 잘 못 듣긴……. 쉬라고.”
“하, 하지만 소대장님께서 한 달 동안 청소하라고 했습니다.”
“괜찮아. 소대장님께서 뭐라고 하면 내가 책임질게.”
김우진 병장이 당당하게 나갔다. 구진모 상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소대장님입니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앞으로 계속 하지 말래? 오늘만 하지 말라고, 오늘만~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겠냔 말이야.”
“그건…….”
구진모 상병도 확실하게 답을 주지 못했다. 다만 걱정은 되었다.
“그냥 너희들이 좀 해. 하루 정도는 안 해도 되잖아. 안 그래? 좀 해주라.”
김우진 병장이 말했다. 구진모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하루 정도야 괜찮겠지 말입니다.”
“그렇지.”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다른 애들 보고 청소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김우진 병장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강태산 이병을 봤다.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 하루만 쉬어.”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병장님.”
“자식, 감사는…….”
강태산 이병은 오늘 하루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때 구진모 상병이 외쳤다.
“김 뱀! 합니다. 해!”
“어어어. 야, 한다! 볼륨 업! 불륨 업!”
“네. 볼륨 업 하겠습니다.”
큰 화면에서 TV가 나오고, 음량도 키웠다. 큰 TV인 만큼 음량도 빵빵했다.
“오예~~~ 아예~~~!”
1소대원들은 떼창까지 부르며 흥겨워했다. 그런데 음악방송 종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기다리는 핑크는 나오지 않았다.
“야, 오늘 핑크 컴백한다고 하지 않았냐?”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나오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씨, 오늘 나와야 하는데…….”
김우진 병장이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화면이 바뀌며 음악방송 MC가 나타났다.
-여러분 오늘 하루 많이 기다리셨죠. 네 요정이 돌아왔다. 상큼한 핑크의 무대! 핑크 컴백 무대가 이제 막 시작됩니다.
“우오오오오!”
“와아아아아!”
1소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소대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핑크! 핑크! 핑크! 사랑해요. 핑크! 우윳빛깔, 핑크!”
핑크의 컴백 무대가 시작되었고, 노래를 시작하자 모두들 TV 속에 빠져들었다. 소대원들, 아니, 전 중대원들이 핑크의 컴백 무대를 보며 좋아했다.
“와, 젠장! 너무 귀엽지 않냐?”
“완전 귀엽습니다. 제 여자 친구 삼고 싶습니다.”
“야야, 여자 친구는 무슨……. 핑크가 널 좋아한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야, 어쨌든 핑크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마. 알았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핑크는 위문 공연 같은 거 안 하겠지 말입니다.”
누군가 던진 그 한마디가 소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맞아. 왜 공연을 안 와? 올 수도 있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핑크가 어떻게 위문 공연을 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페이만 맞으면 오겠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페이를 낼 군부대가 있냐 말입니다.”
“으음…… 군대 디스카운트는 안 해주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자식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진짜 위문 공연 안 옵니까? 저는 막 TV에서 봤을 때 일 년에 몇 번 위문 공연 오고 그러는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미친놈! 야, 너 군 생활 중에 위문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줄 알아.”
“아, 그런 겁니까?”
그러다가 김우진 병장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하아, 괜히 봤다. 괜히 봤어.”
김우진 병장이 시무룩해지자, 구진모 상병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핑크 너무 예뻐! 실제로 한 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김우진 병장이 고개를 돌려 강태산 이병을 불렀다.
“태산아.”
“이병 강태산.”
“너 핑크 봤냐?”
“저는 물론…….”
강태산 이병이 ‘네, 봤습니다. 사인까지 받았습니다’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삼켰다.
“……못 봤습니다.”
“그래, 에이씨. 아쉽네. 그런데 넌 인마 준재벌쯤 되면 연예인들도 보고 그런다는데 넌 뭐 했어, 인마.”
“…….”
강태산 이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절대 연예인을 만났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 나중에 혹시라도 핑크 볼 기회가 생기면 제대하고 나서 꼭 나에게 연락해, 알았어? 이 형 소원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구진모 상병이 툭 끼어들었다.
“김 뱀! 핑크를 보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의 소원입니다.”
“야, 진모야.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냐?”
그 순간 내무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구진모 상병이 뜨악한 얼굴로 김우진 병장을 봤다.
“와, 대박! 김 뱀. 진짜 어떻게 그런 90년대 개그를 하십니까?”
“닥쳐! 나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나의 소원은 핑크야!”
김우진 병장이 버럭 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강태산 이병이 심각한 얼굴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핑크, 핑크……. 핑크가 위문 공연을 오면 좋아하려나?’
이번 TV 하나로 내무실에 있는 소대원들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그런 것 때문일까? 강태산 이병이 슬쩍 욕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