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542화
44장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36)
민용기 상사가 대대장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안에서 한종태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민용기 상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대장실에 들어가 보니 한종태 대대장이 창가에 둔 난의 이파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충성, 저 부르셨습니까?”
“어, 왔어?”
한종태 대대장은 민용기 상사가 들어온 것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민용기 상사는 그런 한종태 대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말이야. 이 녀석들만 보면 배가 불러. 어찌나 예쁘게도 잘 자라는지 말이야. 이게 다 정성 아니겠어?”
“네, 맞습니다.”
민용기 상사가 같이 어울려 줬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다르게 중얼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관리를 하니 잘 안 자라겠어?’
“어험!”
한종태 대대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몸을 돌렸다.
“행보관.”
“네.”
“내가 다름이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요즘 등산화는 얼마씩 하나?”
순간 민용기 상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씨, 또 사달라고 그러네.’
하지만 이내 애써 표정을 풀며 물었다.
“갑자기 등산화는 왜 물어보십니까?”
“어? 자네 몰랐어? 우리 사단장님 취미가 등산이잖아.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해.”
“그렇습니까?”
“그래. 안 그래도 내 입지가 별로 좋지 않은데. 같이 등산이라도 하면서 눈에 들어야 할 것 아니야.”
“또,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뭐? 여기서 나 찍혀서 그냥 옷 벗으라고? 아님, 자네가 나 책임질 건가?”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자네 알고 있는 곳이 있을 것 아니야. 있어, 없어?”
민용기 상사는 순간 갈등했다.
‘있다고 할까? 없다고 할까?’
그 생각은 잠깐이었다. 민용기 상사는 바로 알고 있는 것을 말했다.
“네, 한 곳 알고 있습니다.”
“그래?”
“거긴 가격대가 어떻게 되나? 자네 알고 있지?”
“상품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월상품도 있고, 세일하는 것도 있고 말이죠.”
“이월상품? 아, 내가 명색이 대대장인데, 이월상품은 좀 그렇지 않나?”
한종태 대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용기 상사는 속으로 또 중얼거렸다.
‘아, 미친……. 진짜 웃긴다.’
민용기 상사는 차라리 이월상품이라도 한다고 했으면 좋은 마음으로 활짝 미소 지으며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한종태 대대장은 만날 저런 식이었다. 한마디로 ‘해줘도 지랄, 안 해주면 더 지랄’. 암튼 지랄 맞은 성격이었다. 민용기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등산 장비는 있습니까?”
“하아, 등산 장비가 있었으면 내가 자네 앞에서 한숨 쉬겠어? 그건 그렇고 말이야. 일단 등산화 어디서 괜찮게 구입할 데가 있을까?”
민용기 상사는 곧바로 앓는 소리를 했다.
“대대장님 요새 저도 힘들어 죽겠습니다.”
“이봐, 행보관.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네. 내가 요새 자네에게 뭘 뜯어먹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 내가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했지. 누가 뭐 해달래?”
민용기 상사는 방금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자기가 아는 등산업자를 소개시켜 주면 그 이후로 갈굼을 달달 당하게 될 것이다. 그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민용기 상사였다. 일단 한종태 대대장이 저리 말을 했다면 작심하고 뜯어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하아, 이번에 공사해서 겨우 구멍이나 때우나 했더니. 이 빌어먹을 양반 돈 냄새 하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맡네.’
민용기 상사는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제가 아는 업체 말해서 할인 좀 받아서 싸게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민용기 상사가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런데 한종태 대대장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 업체 나에게 알려줘 봐.”
“네?”
“그 업체 말이야.”
“그건 왜……?”
민용기 상사의 눈동자는 잔뜩 불안감이 쌓였다. 한종태 대대장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사람아, 그래도 내가 직접 가서 확인을 해봐야지. 디자인은 어떻고, 또 신고 다니기에 편안한지 직접 신어보고 사야 할 것 아니야. 게다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자네가 어찌 아나. 안 그런가? 그냥 내가 가면 그 업체에게 싸게 해달라고 미리 말을 해놓게. 알았어?”
민용기 상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또 가서 완전 최신상품을 고를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대대장님 적당히 좀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민용기 상사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대대장실을 나갔다. 문을 닫은 후 고개를 홱 돌려 대대장실을 바라봤다.
“아이고, 시발, 진짜……. 고생해서 돈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다더니. 바로 내가 딱 그 짝이네. 내가 진짜 대대를 옮기든가 해야지.”
민용기 상사가 군수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보수공사가 끝났다는 기념으로 1중대는 목욕탕에서 샤워할 시간을 보장받았다. 특히 욕탕에 있는 따뜻한 물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쏴아아!
강태산 이병은 욕탕에 물을 받아 놓고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따뜻한 물을 몸에 끼얹으니 그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졌다.
“하아, 좋다.”
강태산 이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까지 감고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김우진 병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고, 우리 강태산 이병님 따뜻한 물을 느껴보시니 좋습니까? 탄성까지 내뱉고 말이죠.”
강태산 이병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기, 김 병장님.”
“세상에 뭐만 하면 냄새가 난다는 둥, 먼지가 코를 자극해 제대로 숨을 못 쉬겠다는 둥. 이리 뺑이 치고, 저리 뺑이를 치더니…….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이등병은 처음 봤다.”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태산 이병이 살짝 주눅이 든 얼굴로 말했다. 김우진 병장이 조용히 말했다.
“너 강태산이.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말이야. 소대 잘 들어온 줄 알아. 너 옆 소대였으면 죽었어.”
“왜 저에게만 그러십니까.”
“왜 너에게만 그럴까? 우리 은호를 봐, 은호! 같은 이등병인데도 아주 그냥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일 더 없냐며 나서고 그러잖아. 저 모습이 바로 이등병의 참모습이야. 너처럼 뺀질뺀질, 어떻게 하면 일을 안 할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 인식표에 제대로 인식도 되지 않은 놈아. 아무튼 너 같은 이등병은 처음이다. 쯧쯧쯧.”
김우진 병장이 혀를 찼다. 그 말을 들은 강태산 이병이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괜히 최강철 일병에게 다가가서 꼰질렀다.
“최강철 일병님.”
“왜?”
“김우진 병장님이 절 너무 괴롭힙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김우진 병장님에게 가서 따질까?”
“그건 아니지만…….”
최강철 일병이 슬쩍 김우진 병장의 위치를 확인한 후 낮게 말했다.
“야, 곧 있음 김우진 병장 제대야. 원래 말년 병장이 꼬장이 좀 심한 거야. 그리고 제발 너 좀 잘해라.”
“저 진짜 열심히 합니다.”
“……됐다. 내가 널 아니까 이 정도지…….”
최강철 일병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최강철 일병은 강태산 이병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다. 페인트칠이며, 이런 단체생활까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 너나 나나 편하게만 살았으니까. 군 생활을 이만큼 하는 것은 다 이해를 해. 그런데 이건 우리들만의 기준이고, 다른 사람 눈에는 안 차! 그리고 태산아, 넌 나보다 4개월을 더 있어야 해. 그런데 이러면 너 어쩔래?”
최강철 일병이 진심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그러자 강태산 이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최강철 일병님 전역하실 때쯤이면 저도 병장이지 않습니까. 누가 병장을 괴롭히겠습니까.”
“어이구, 벌써 그쪽으로는 머리가 빠삭하게 굴러가?”
“제가 좀…….”
강태산 이병이 히히 웃었다. 그러다가 최강철 일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보다 너,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
“너 진짜 냄새 못 참고 그래서 그런 거야? 아니면 쉬고 싶어서 잔머리 굴린 거야?”
강태산 이병이 진짜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힘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호흡기 천식도 좀 있고, 그래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그래? 진짜였어?”
“너무하십니다.”
강태산 이병이 억울한 듯 바라봤다. 최강철 일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널 못 믿어서 미안하다. 그보다 이등병이 진짜 그러면 안 돼. 이등병은 무조건 뛰어다녀야 해. 너처럼 벌써부터 열외나 할 생각부터 하면 고참들이 널 좋게 안 봐.”
“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제발 노력 좀 하자!”
최강철 일병이 마지막으로 한 소리는 진심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강태산 이병이 사고를 더 이상 안 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저, 최강철 일병님.”
“왜?”
“저……, 집에 전화 한 통 해도 됩니까?”
“알았어. 나랑 같이 가자.”
“네, 알겠습니다.”
강태산 이병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환해졌다. 20여 분의 샤워시간이 끝난 1소대는 2소대와 바통터치를 했다. 그리고 최강철 일병은 약속대로 강태산 이병의 전화를 시켜주기로 했다.
“저기 이해진 상병님.”
“왜?”
“강태산 이병, 집에 전화 좀 시켜주고 와도 되겠습니까?”
이해진 상병이 힐끔 강태산 이병을 봤다. 강태산 이병 역시 눈이 반짝이며 제발 허락을 해달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 다녀와.”
“네.”
최강철 일병이 강태산 이병을 데리고 공중전화부스로 향했다. 마침 빈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강태산 이병이 갔다.
“너 전화카드 없지?”
“아, 네에…….”
“자, 이거 써.”
최강철 일병이 3만 원짜리 전화카드를 망설임 없이 건넸다.
“감사합니다.”
“전화번호는 기억하냐?”
“네. 기억합니다.”
강태산 이병이 환한 얼굴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아버지. 저예요. 태산이.”
강태산 이병은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울먹였다.
-그래, 태산아. 잘 지내지?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아빠, 나 진짜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최강철 일병이 뒤에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으로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말하는 것 보니 아직 죽지는 않겠네.
“아빠!”
-알았어. 알았어. 이 애비도 네가 고생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 몰라. 나 언제 제대해? 아니, 나 이대로 제대나 할 수 있을까?”
-이놈아, 너 군대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제대 타령이야. 그리고 애비가 말했지. 최강철 옆에만 딱 붙어 있으라고.
“아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