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526화
44장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20)
한중만이 오상진을 바라봤다. 오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형님.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를 좋아해야죠.”
“봐! 이게 정상이잖아. 아무튼 난 진짜, 감독 때문에 미치겠다.”
“그런데 배우 캐스팅은 잘 됐어? 누가 되었는데?”
한소희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또 한 번 한중만이 인상을 썼다.
“아니, 배우 캐스팅도 답답해. 무슨 임준기가 뭔가 하는 애를 주연으로 쓰겠다는 거야.”
“임준기? 그 사람이 누구야?”
“나도 몰라. 그러니 너도 당연히 모르겠지. 물론 오디션을 통해 1,000:1로 통과한 녀석이긴 해. 문제는 프로필 사진을 봤어. 그런데…….”
“왜?”
“보여줄까?”
“응!”
한소희는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한중만이 휴대폰을 꺼내 프로필 사진을 보여줬다.
“이 녀석이야.”
한소희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오, 이 사람 정말 예쁘게 생겼다.”
“그렇지? 이러니 내가 걱정이 안 되겠냐?”
“이 남자랑 연산군이랑…….”
한소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중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내가 여기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거의 전 재산을 박았단 말이야. 그런데 정말 저걸 믿고 가도 되는지 미치겠다.”
오상진은 그런 한중만의 얘기를 듣고 피식피식 웃었다. 왜냐하면 오상진은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중만은 결과를 모르기에 미치는 것 같았다. 오상진이 한중만을 달랬다.
“형님. 진짜 걱정하지 말고 저만 믿으세요. 그리고 감독이 배우 뽑고 싶은 대로 뽑게 그냥 두십시오.”
“그러다가 진짜 동성애물 찍으면 어떻게 해?”
“그럴 리는 없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감독님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못 찍으면 완전히 파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쳤다고 이상한 것을 찍겠습니까?”
“그, 그렇지? 그럴 거야.”
한중만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오상진이 입을 열었다.
“형님, 만약에 형님이 손해를 보시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한소희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그걸 왜 상진 씨가 책임을 져요?”
“저 때문에 형님이 투자하신 건데. 당연히 제가 책임을 져야죠.”
한중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래! 처남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믿고 가야지. 그리고 말이야. 온 김에 대본 좀 몇 개 봐주고 가.”
한소희가 불쑥 나왔다.
“오빠는 상진 씨가 무슨 대본 봐주는 사람이야?”
“처남이 촉이 좋잖아. 온 김에 몇 개만 봐주고 가. 그렇지 않아도 몇 개 들어온 것이 있어. 내가 지금 연산의 남자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뭐라도 신경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잖아. 그래서 대본을 몇 개 얻어 놓은 거야.”
한중만은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대본 세 개를 들고 나왔다.
“처남 이것 좀 봐봐.”
오상진이 대본을 들어 제목을 확인했다. 세 개 중 2개는 못 들어본 제목이었다. 그중 하나의 제목이 익숙했다.
-흡혈경찰 나도열.
“어? 이거…….”
오상진이 이 제목을 알고 있었다.
‘이거 B급 영화였는데. 그래도 손익분기점은 넘겼고, 나름 괜찮다는 영화였지.’
오상진이 흡혈경찰 나도열 대본을 들고 한 참을 바라봤다. 그것을 본 한중만이 바로 말했다.
“어! 그거 재미있어? 괜찮을 것 같아?”
“네.”
“으음…….”
한중만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 영화 내가 아는 동생 놈이 감독인데. B급 영화야. 본인은 투자 대비 엄청 잘될 것 같다고 말을 하는데……. 그리고 나도 읽어보긴 했어. 솔직히 말해서 긴가민가해. 사실 그걸 물어보고 싶었어. 처남이 그걸 딱 고르니까, 나는 확신이 섰네. 처남은 확실히 촉이 좋아. 재능이 있어. 어떻게…… 나랑 동업할 생각 없나?”
한소희가 바로 나섰다.
“오빠,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상진 씨는 지금 군인인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중만은 한소희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오상진에게 말했다.
“무슨 군인이야. 그 재능을 내 회사에서 널리 퍼뜨려. 당장 군인 그만두고 이리 오라니까.”
“오빠랑 동업하면 쪽박 차거든.”
“얘는 지금 무슨 소리야. 무슨 쪽박이야!”
“맞잖아. 지난번에도…….”
한소희는 지지 않고 말했다. 한중만 역시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둘이 싸우는 사이 오상진은 흡혈경찰 나도열의 대본을 쭉 훑었다.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맞네.’
오상진이 한중만을 바라봤다.
“형님. 이거 제작비가 얼마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까?”
“얼마 안 된다고 들었어.”
“그렇습니까? 그럼 이거 하시죠.”
“이거? 괜찮겠어?”
“네. 주연 배우는 누가 한다고 합니까?”
“주연 배우는 혹시 감수로라고 알아?”
“네. 물론 알죠.”
“그 친구를 얘기 하던데……. 난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감수로 씨로 하시죠.”
“감수로 하면 잘할 것 같아?”
“네. 왠지 감수로 씨를 이미지 대입해 보니 뭔가 확 오는 것 같아요.”
“그래?”
한중만은 약간 떨떠름했다. 하지만 오상진은 과거의 기억이 고스란히 있었다. 그래서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니까, 한중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기랄! 까짓거 인생 뭐 있어. 게다가 제작비도 얼마 안 드는데.”
그러면서 슬쩍 오상진을 바라봤다.
“그럼 처남도 여기 투자할 거지?”
“네, 물론입니다.”
“그래? 처남이 간다면 나도 가야지.”
한소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상진 씨 괜찮아요? 정말 될 것 같아요?”
“네. 저는 잘될 것 같아요. 물론 저걸로 큰돈은 못 벌지만 예산이 많이 든 영화는 아니니까요. 괜찮을 것 같아요.”
한중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 친구를 잘 아니까. 조만간에 술 한잔하지. 내가 연락할게.”
“네, 알겠습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큰형인 한대만 부부가 들어왔다. 김일도가 눈을 크게 하면 소리쳤다.
“어? 군의관님! 어라? 김 중위님은 또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오상진과 한소희가 바로 일어났다. 오상진은 환한 얼굴로 한대만에게 인사를 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오, 그래. 자네 왔나.”
김소희는 남산 만하게 나온 배를 받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도 왔어요.”
한소희가 바로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언니. 어이구, 배가 많이 부르셨네요.”
그런 네 사람을 보며 김일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오상진이 그런 김일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일도야. 여기가 소희 씨 큰 오빠! 너희 사장님이 바로 작은 오빠! 그리고 김 중위님은 큰 며느님! 큰 형님이랑 결혼을 했지.”
“와, 저는……. 아니지. 어떻게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오상진이 나서서 말했다.
“당연하지. 아무도 너에게 말을 안 해줬으니까.”
“왜요? 왜 저만 모르고 있었습니까?”
김일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당혹스러운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일을 김일도가 어떻게 다 알고 있겠는가.
소대장님은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고, 게다가 그 여자 친구의 오빠가 자기의 사장님이다. 더군다나 아프다는 핑계로 꾀병을 부리며 찾아가 농땡이를 부렸던 군의관은 큰 형님이란다. 우리 부대의 최고 미녀였던 김 중위님은 큰 형님의 부인이고.
한대만, 한중만, 한소희 이렇게 셋이서 형제지간인 것도 모자라 김소희 중위님은 군의관과 결혼해 벌써 배가 남산만 하게 나와 있는 모습이었으니, 김일도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영화 시나리오를 써도 이렇게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김일도. 까불지 말고, 커피나 부탁해.”
“네.”
김일도는 얼빠진 얼굴로 사무실을 나갔다. 한소희가 바로 말했다.
“언니 힘들겠다. 어서 이리 와서 앉으세요.”
“네. 아가씨.”
김소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심조심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김소희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대만은 김소희를 부축해 줬다.
“후우……. 고마워요.”
한중만이 바로 말했다.
“아이고, 형수님. 출산일이 언제라고 하셨죠?”
“5월요.”
“우리 조카 얼굴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네.”
그러자 한 대만이 한소리 했다.
“넌 자식아. 너희 형수 보약이라도 한 채 지어주고 말해라.”
“아, 형! 나야 마음은 굴뚝같지. 그런데 돈이 없네.”
한중만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한중만을 보며 한대만은 혀를 찼다.
“쯧쯧쯧. 그러게 무슨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날 존중해 준다며.”
“그래. 그래! 존중해, 그런데……. 아니다.”
한대만이 답답한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분위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 분위기를 때마침 깨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일도였다.
“자, 가져왔습니다.”
커피 하나에 녹차 하나였다.
오상진이 그걸 보고 말했다.
“오오, 김일도. 센스 있는 거 보소.”
“에이, 설마하니 제가 임산부님께 커피 드리겠습니까.”
김일도는 공손하게 김소희에게 녹차를 건넸다.
“녹차 드십시오.”
“고마워, 김일도 상병.”
“아, 저 상병 아닙니다. 제대한 지가 얼마인데요.”
“어? 그래도 내 눈에는 상병처럼 보이는데.”
“너무 하십니다. 저 지금 군인 물 다 뺐지 말입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쿡쿡’ 하고 웃었다. 김일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다들 왜 웃으십니까?”
오상진이 나섰다.
“일도야. 너 말투…… 군인 물 다 뺐다며.”
“네?”
“네 말투 말이야. 말투! 아직도 ‘다 나 까’를 쓰냐?
“네? 제가 언제 ‘다 나 까’를 썼다고 그러십니까……. 아이씨!”
김일도는 말을 하다가 자기가 쓰는 말투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상진이 웃으며 말했다.
“일도야. 잘 안 고쳐지지?”
“말시키지 마십시오.”
“일도야, 하루 이틀 만에 빠지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 느긋하게 갖고 해.”
“됐습니다.”
김일도가 휙 하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한대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재미있는 친구가 들어왔네.”
“그렇죠?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한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 이렇게 모였는데 밥 먹으러 갈까?”
“좋죠!”
“가자.”
전부 사무실을 나서서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메뉴는 오리 백숙이었다.
“안 그래도 형님 오신다고 해서 내가 예약한 곳이야. 여기 예약 안 하면 오기 힘든 곳이야.”
“그래, 그래. 잘했다. 당신도 괜찮지?”
한대만이 따뜻한 눈길로 김소희에게 물었다. 김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안 그래도 오리 백숙 먹고 싶었는데.”
김소희가 환하게 웃으며 한중만을 봤다.
“고마워요. 도련님.”
“아닙니다.”
그렇게 식구들은 한중만이 예약한 오리 백숙집으로 향했다. 도착을 하자 곧바로 준비된 오리 백숙이 나왔다.
“자, 다들 식사하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