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434화
39장 착하게 살아요(2)
“허! 여기 신 씨하고 아는 사이인가 본데. 거짓말도 적당히 하셔야지. 내가 온종일 가게를 지키면서 단골손님들 얼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는데. 내가 영감님 얼굴 본 적이 없거든요.”
어르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쯧, 아이고 장사 헛했네. 헛했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서 영감님이 누군데요? 누구예요, 누구!”
박정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르신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자네 말이야. 왕국밥집 차린 지 몇 년이나 되었지?”
“몇 년이라니요. 벌써 10년이나 되었어요.”
“그래, 10년이나 되었지. 그전에 무슨 가게가 있었던 것은 기억하나?”
“무슨 가게라니요. 국밥 하다가 말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잘 아네. 그전에도 국밥집 했었고. 자네 들어오면서 그 국밥집 레시피 싹 받아서 장사한 거 아니야? 그런데 무슨 자네 레시피라고 떠들고 다니나!”
순간 박정자는 움찔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 할아버지 큰일 나실 분이네. 그때 권리금 주고서 다 산 거거든요. 그거 아니었으면 가게 운영도 못 했어요. 무엇보다 저 프랜차이즈까지 했거든요. 알지도 못하시면서…….”
“모르긴 뭘 몰라! 그 프랜차이즈 잠깐 했다가 손님들 맛이 없다고 하니까, 바로 접었잖아. 저기 신 사장 솜씨 가지고 먹고 살았던 주제에 내가 그걸 모를 줄 알고.”
“하아, 이 영감님이 말이면 단 줄 아나. 아니,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지? 영감님 정신이 오락가락하세요? 뭘 모르시면 집에나 계시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얘길 하세요.”
박정자는 이번에는 신순애를 보며 물었다.
“신 씨, 이 영감님 누구야?”
신순애가 당황하며 말했다.
“사장님, 저 어르신 정말 누군지 모르세요?”
“누구데? 뭐, 내가 아는 사람이야?”
“정말 모르시는구나. 어쩌면 좋지.”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봐.”
그러자 최말숙이 나섰다.
“아줌마, 왜 자꾸 우리 언니에게 언성을 높여요. 그리고 진짜 저 어르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누구야!”
최말숙은 솔직히 저 어르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왕국밥 가게에서 일할 때 몇 번 배달을 갔었기 때문이다. 최말숙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후후, 아줌마 진짜 큰일 났네요.”
신순애도 잔뜩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박정자를 바라봤다.
“내가 큰일 나? 최 씨, 지금 뭔 소리야. 다들 왜 이래? 뭐야?”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곧바로 시선이 그 중년 남성에게 향했다. 중년 남성은 곧장 어르신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아버지.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이놈아, 보면 몰라. 국밥 먹으러 왔지.”
“아니, 국밥 드시러 가신다면 말씀을 하시지. 저도 먹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박정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왕국밥 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러자 박정자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어머나, 함 사장님. 함 사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설마 우리 국밥집 두고, 여기 국밥집 드시러 오신 거예요?”
“아니, 아버지가 여기 계시다고 해서 겸사겸사 왔죠.”
함 사장이 뻘쭘하게 웃었다. 사실 함 사장은 왕국밥 집 건물의 건물주였다. 자신의 건물에 있는 국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와서 살짝 민망했던 것이다.
“아버지요?”
박정자가 고개를 돌려 아버지란 불린 사람을 봤다. 바로 그 어르신이었다.
“서, 설마 이 영감님이 함 사장님 아버님이세요?”
“어? 몰랐어요? 저희 아버지 만날 사무실에서 국밥 시켜 드셨는데.”
“아, 만날 점심때 배달로 시켜 드셨던 그분…….”
박정자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며 어르신을 바라봤다.
“그럼 영감님이…….”
박정자도 뒤늦게 생각이 났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씩은 꼭 사무실로 국밥을 배달했었다. 물론 지금은 끊어졌지만……. 박정자가 고개를 홱 돌려 최말숙을 바라봤다.
‘어쩐지 실실 웃더니 알고 있었던 거야?’
신순애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박정자가 입을 뗐다.
“뭐야? 그럼 신 씨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함 사장도 신 씨가 불렀던 거야?”
“아니요, 사장님. 그럴 리가요.”
“와, 해도 너무하네. 이런 식으로 날 골탕 먹이려고 그랬던 거지? 신 씨도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독하네. 너무하다, 너무해.”
박정자는 막무가내로 신순애를 비난했다. 이를 참다못한 어르신이 나섰다.
“어휴, 야, 이놈아! 내가 아무에게나 세 두지 말라고 그랬지!”
함 사장은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정신 나간 국밥집 아줌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아냐?”
“뭐라고 했는데요?”
“나보고 정신 나간 영감이라고 한다.”
“네? 에이, 설마요.”
“내가 이 나이 먹고 헛소리할 사람이냐! 여기 있는 손님들도 다 들었는데.”
함 사장이 고개를 돌려 훅 둘러봤다. 그러다가 20대 아가씨들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 아줌마가 그랬어요.”
“더 심한 말도 하지 않았니?
“맞아! 했어. 뭐라고 했더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꺼지라고 했지?”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20대 아가씨는 약간 부풀려서 말했다. 그러자 박정자가 버럭 했다.
“내, 내가 언제 꺼지라고 했어요. 이 아가씨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봐봐, 저렇게 어르신께 화를 냈어요.”
“어머나, 무서워라.”
20대 아가씨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정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함 사장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박 사장. 정말 그랬어요?”
“그게 아니라…… 어르신이 뭘 모르고 말씀을 하셔서…….”
박정자는 함 사장에게 벌벌 기었다. 어쨌든 건물주이지 않은가. 가만히 듣던 어르신이 버럭 했다.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이 동네 국밥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데. 이 동네 국밥의 산증인이야. 내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안 그러냐?”
어르신이 곧바로 함 사장을 봤다. 함 사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버지는 하루 세끼 국밥을 드시는 분이신데.”
“그런데 저 박 사장이 여기 신 사장을 찾아와서는 남의 레시피로 장사한다고 난리를 피우잖아.”
“남의 레시피요?”
함 사장이 피식 웃었다.
“아니, 박 사장님 말은 바로 합시다. 이게 어떻게 왕국밥 레시피입니까? 딱 봐도 전혀 다른 국밥인데.”
박정자는 상황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언성을 낮추며 함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그게 아니라, 여기 신 씨가 저희 집에서 국밥 만들었잖아요.”
“그렇죠. 주방장이니 당연한 거죠. 그리고 얘기를 들어보니, 신 사장님께서 레시피랑 모두 다 주고 갔다면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박정자는 당황하며 자꾸 말을 더듬었다. 함 사장은 측은한 눈빛으로 박정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박 사장. 그러지 말고 어서 가세요. 괜히 억지 부리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가서 장사나 더 하세요. 안 그래도 요즘 장사도 잘 안되던데. 이번 달 임대료는 제대로 낼 수 있죠?”
“함 사장님 여태껏 임대료 밀린 적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도 너무 답답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함 사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박 사장. 내가 더 답답합니다. 왜 자꾸 그러십니까? 그리고 내가 박 사장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여기 국밥이랑 예전 왕국밥의 국밥이랑 전혀 달라요. 이 집 국밥이 훨씬 맛있어요. 정 못 믿겠으면 드셔보시던가요. 막말로 여기 계신 우리 아버지가 몇 일째 이 가게로 오시는지 아세요? 매일 저녁마다 여기 계세요. 저녁마다! 아무리 맛있는 국밥이라고 해도 일주일에 두 번 연속 드시지 않는 양반이에요. 그런데 저녁마다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는 않죠? 왕국밥도 이렇게 좀 만들어 보세요. 그럼 지금보다 훨씬 많은 손님들이 오겠죠. 게다가 내가 아버지를 모시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고.”
함 사장의 말에 박정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주위에 있던 손님들까지 박정자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무들 하십니다.”
박정자는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가게를 뛰쳐나가 버렸다. 어르신은 박정자를 보며 혀를 찼다.
“저저, 못난 사람하고는…….”
그리고 함 사장을 보며 말했다.
“함 사장.”
“네. 아버지.”
“저 국밥집 계약 얼마 남았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사도 안되는데 빨리 정리하라고 그래.”
“에이, 그래도 여태까지 한 정이 있는데요.”
“정? 그럼 뭐, 나도 네 건물 동생에게 넘겨줄까?”
“에이, 아버지 또 왜 이러실까. 알았어요, 제가 잘 정리할게요.”
함 사장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잘하지 말고! 똑바로 해. 지금 장사도 안되는데 파리만 날리고 있잖아. 저런 것을 계속 두면 건물 이미지만 안 좋아져.”
“네네, 아버지. 잘 알겠습니다.”
함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순애에게 갔다.
“아이고, 신 사장. 내가 말년에 주책 있었네.”
신순애가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어르신. 어르신 때문에 일이 잘 풀렸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소란을 일으켜서…….”
“무슨 내 덕분이긴……. 담에 또 오겠네.”
“네, 어르신 들어가세요.”
함 사장이 어르신을 데리고 나갔다. 그렇게 박정자의 습격사건은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 아마 저렇게 망신을 당했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가게 계약 연장도 안 한다고 하니 아마 이 동네에서 장사도 못 할 것이었다.
아무튼, 그 소란에도 가게에 있던 손님들은 국밥을 마저 맛있게 먹고 나갔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한소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 저도 도울게요.”
“아니야, 됐어. 그냥 앉아 있어.”
“아니에요. 저도 돕게 해주세요.”
한소희가 제법 싹싹하게 신순애 옆에 붙어서 말했다. 신순애는 피식 웃으며 그런 한소희를 봤다. 최말숙이 쟁반을 가지고 나타났다.
“소희 양은 그러지 말고 여기 스프레이로 테이블에 뿌려서 행주로 닦아줘.”
“네, 알겠어요.”
한소희는 서투르지만 나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오상진의 눈에는 참 귀엽게 느껴졌다. 오상진이 신순애에게 다가갔다.
“엄마, 그 할아버지는 누구였어요?”
“아, 그냥 예전에 알던 분이야.”
“그래요? 듣고 보니 왕국밥 집 건물의 건물주라고 하던데. 거기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어쩌다 한 번 오신 거야.”
“으음, 그렇구나. 만약에 어르신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나서려고 했죠.”
“됐어! 아무튼 일이 잘 풀렸으니까 됐지.”
“아무튼 엄마. 다음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요. 알았죠!”
오상진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았어.”
모처럼 잔소리를 하는 아들에게 신순애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