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407화
37장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13)
박대기 상병이 눈을 부라렸다. 강인한 상병 역시 박대기 상병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그러다가 박대기 상병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와, 시발! 알았다. 알았어. 딴 데로 피해주면 되잖아.”
그러면서 몸을 홱 돌렸다. 손에 들고 있던 싸리비는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내가 진짜, 서러워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딴 부대 전출 가는 건데.”
그렇게 투덜투덜 거리면서 갔다. 그 모습을 보는 강인한 병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박수를 쳤다.
“자자, 우리 조금만 힘내자. 빨리 끝내고 내무실에서 쉬자.”
그렇게 좋은 분대장으로 변한 강인한 상병이 2소대원들을 격려했다.
“네, 알겠습니다.”
최강철 이병과 이은호 이병이 창고 주위의 눈을 치우고 있었다.
“최 이병님.”
“왜?”
“저쪽도 치워야 합니까?”
이은호 이병이 가리킨 방향은 창고로 오는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원래는 1소대 담당이 아니었다.
‘우리 담당 구역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도 치우지 않으면…….’
최강철 이병이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우리 구역 아니긴 한데, 그냥 치우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네, 알겠습니다.”
이은호 이병이 가서 싸리비로 눈을 쓸었다.
룰루랄라~!
이은호 이병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눈을 쓸었다. 이은호 이병도 군대에서 맞이한 첫눈이라 기분이 좋았다. 물론 눈을 치우는 것에 힘이 들지만 말이다. 요즘 같은 군 생활이라면 진짜 버틸 만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 이은호.”
순간 이은호 이병은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 설마…….’
끔찍했던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 아무리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몸이 반응하는 그 이름.
절대 보지도, 듣기도 싫은 박대기 상병이었다. 이은호 이병이 굳어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어라, 이 새끼 봐라. 야, 이은호!”
이은호 이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악마의 미소를 띠며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대기 상병이 보였다.
이은호 이병은 바짝 언 상태로 박대기 상병과 눈이 마주쳤다.
“헛! 이 새끼 봐라. 야, 고참이 불렀으면 관등성명 대야 하지 않냐? 입술이 얼어붙었냐고!”
“아, 아닙니다.”
“시발, 안 붙었네. 야, 새끼야. 관등성명! 관등성명은 어따 팔아먹었어!”
“이, 이병 이은호…….”
“경례는?”
“추, 충성…….”
“핫, 새끼 봐라. 경례하는 꼬라지 하고는…….”
이은호 이병은 잔뜩 몸을 부르르 떨며 가만히 서 있었다. 박대기 상병이 담배를 힘껏 빨아당긴 후 입으로 불었다.
“후우…….”
그러곤 손가락으로 담뱃불을 탁 끈 후 이은호 이병에게 다가갔다.
“야, 이은호.”
“이, 이병 이은호…….”
“새끼 목소리 봐라. 아주 시발, 1소대 가더니 군기 다 빠지고 개XX 그냥……. 왜 나 이렇게 엿 먹여놓고, 1소대 가니까, 좋냐? 좋아?”
이은호 이병이 움찔움찔 떨며 뒤로 물러났다.
“헛, 이 새끼. 쪼는 거 봐라. XX 새끼, 네가 이러니까, 나만 욕먹는 거 아냐!”
그때 최강철 이병이 후다닥 달려오면서 이은호 이병 앞에 섰다.
“충성.”
“넌 뭐냐?”
“이병 최강철.”
“이병? 야, 새끼야. 네가 왜 나타나고 지랄이야.”
“그, 그게 아니라 이은호 이병을 데리고 눈을 쓸러 가야 해서 말입니다.”
최강철 이병이 얘기를 했다. 박대기 상병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데 데리고 간다 이거냐?”
“김일도 병장님의 지시사항입니다.”
“그래서 데려가겠다?”
“네.”
“그런데 나는 왜 네가 그냥 이은호를 감싸는 분위기인 거 같지?”
“네?”
“아니, 왜 뒤로 숨기냐 말이야. 내가 은호에게 뭔 짓 했냐? 야, 이은호 말해봐! 내가 너에게 뭔 짓 했냐?”
“…….”
박대기 상병의 다그침에 이은호 이병은 벌벌 떨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했다.
“핫! 이 새끼 봐라. 또 내가 잘못한 걸로 만드네. 대답해 보라고, 내가 뭔 짓 했냐고! 대답 안 해!”
“아, 아닙니다.”
“시발, 네가 그따위로 말하니까. 내가 욕을 먹는 거잖아. 내가 너에게 뭘 했냐고. 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지랄이야! 내가 뭔 짓 했냐고!”
“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은호 이병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박대기 상병이 최강철 이병을 봤다.
“봤지? 나 저 새끼랑 인사만 했다. 그런데 왜 너까지 오고 지랄이야.”
최강철 이병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은호 이병은 하나뿐인 후임이었다.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하지만 박대기 상병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죽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어……. 그러니까…….”
최강철 이병은 박대기 상병의 카리스마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 두 사람을 구원해 주는 음성이 들려왔다.
“야, 너 뭐야!”
최강철 이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기, 김일도 병장님.”
“야, 최강철. 빨리 쓸고 내무실 오라고 했지. 왜 이렇게 늦어! 내가 널 데리러 와야겠냐.”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다 끝내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 와?”
“그, 그게…….”
최강철 이병이 박대기 상병을 봤다. 김일도 병장이 힐끔 박대기 상병을 봤다. 순간 김일도 병장의 얼굴이 차갑게 바뀌었다.
“야, 박대기…….”
그러자 박대기 상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놔, 시발…….’
그러곤 최강철 이병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야,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입 다물고 있어라. 알았냐?”
그러는 사이 김일도 병장이 다가왔다. 박대기 상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충성, 김 병장님 오셨습니까?”
“야, 박대기 네가 왜 여기 있냐? 여기 우리 청소 구역인데.”
“어, 그게…….”
“새끼, 또 짱 박혔냐?”
“네, 뭐…….”
박대기 상병이 멋쩍은 듯이 말했다. 김일도 병장이 최강철 이병과 이은호 이병을 봤다.
“청소 다 했으면 빨리 내려와야지. 왜 이러고 있어?”
“지, 지금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은호 이병이 잔뜩 쫄아 있는 것이 보였다. 김일도 병장이 바로 박대기 상병에게 향했다.
“뭐야, 너 우리 애들에게 뭔 짓 했냐?”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합니까. 그냥 여기서 담배 피우고 있는데 와서 뭐 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래? 확실해?”
“네.”
김일도 병장이 고개를 돌려 이은호 이병을 봤다.
“이은호 확실해?”
“이병 이은호. 그, 그렇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김일도 병장이 최강철 이병을 봤다.
“강철아, 네가 제대로 답해봐.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최강철 이병의 시선이 슬쩍 박대기 상병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박대기 상병이 살벌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말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비겁자가 될 것만 같았다.
최강철 이병이 고개를 돌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박대기 상병이 이은호 이병에게 뭐라고 한 것 같습니다.”
“뭐?”
김일도 병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눈을 쓸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박대기 상병이 이은호 이병에게 겁을 줘서 제가 부랴부랴 달려와서 말린 겁니다.”
박대기 상병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야, 시발! 내가 언제 그랬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모함입니다. 김 병장님. 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인사만 했을 뿐입니다.”
김일도 병장의 얼굴이 확 바뀌며 말했다.
“야, 박대기. 너 같으면 인사하고 싶겠냐? 그동안 잔뜩 애를 괴롭혀 놓고. 웃긴 새끼다, 너?”
“아, 왜 그러십니까. 애들 앞에서…….”
“애들 앞에서 창피한 줄은 아냐? 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 애들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개 X 같냐?”
“아닙니다.”
“아니지. 개 X으로 들렸으니까, 우리 애들 건드렸지. 안 그러냐?”
“아닙니다.”
박대기 상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목소리를 낮게 대답했다.
“시발, 뭐가 아니야. 다 보이는데…….”
김일도 병장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가만히 참고 있던 박대기 상병이 고개를 들었다.
“아, 진짜…… 적당히 하시지 말입니다.”
“왜? 밖에서 껌 좀 씹었냐? 너 어디서 씹었냐?”
“…….”
“시발, 눈빛 봐라, 살벌하네. 그러다가 한 대 치겠다. 그래, 어디 한번 쳐봐라! 쳐봐, 새끼야!”
김일도 병장의 머리를 박대기 상병의 가슴에 툭툭 밀었다.
“쳐보라고! 네 덕분에 나도 좀 편히 쉬어보게.”
“아, 진짜……. 그만하십시오.”
“그만해? 인마, 그러게 왜 우리 애를 건드려! 왜 건드리냐고.”
“……미안합니다.”
박대기 상병이 어렵게 대답했다. 김일도 병장이 멈추며 박대기 상병을 노려봤다.
“너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다시 한번 우리 애 건드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알겠습니다.”
“꺼져, 새끼야!”
박대기 상병이 창고에서 멀어졌다. 저 멀리 가면서 침을 ‘퉤!’ 하고 내뱉었다.
“저저,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김일도 병장이 최강철 이병을 보며 말했다.
“야, 잘했다. 잘했어. 우리 강철이 이제 후임도 챙길 줄 알고 말이야.”
“아, 아닙니다.”
최강철 이병이 살짝 부끄러워했다. 김일도 병장이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저 새끼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큰 소리로 날 불러!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이제 내려가자!”
최강철 이병과 이은호 이병의 표정이 바뀌었다.
“네, 김 병장님!”
최강철 이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뒤따르던 이은호 이병은 해맑게 웃었다.
한종태 대대장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아, 눈 오네……. 어제 세차했는데. 젠장할!”
한종태 대대장은 관사 아파트에 있는 새로 장만한 차를 떠올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차량 위로 수북하게 쌓인 눈을 보며 얼마나 절망했던가.
“눈 올 줄 알았으면 세차 안 하는 건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한종태 대대장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대대장실 문이 열리려 곽부용 작전과장이 들어왔다.
“충성.”
한종태 대대장이 몸을 돌렸다.
“아, 작전과장 왔나.”
“네.”
“여기 보고서 검토 부탁드립니다.”
곽부용 작전과장이 책상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한종태 대대장이 자리로 와서 앉았다.
“작전과장, 눈 언제까지 온대?”
“바로 일기예보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됐어! 내가 그 일기예보를 믿고 세차했는데……. 아무튼 우리나라 일기예보는 믿을 게 못 돼!”
한종태 대대장은 괜히 화살을 일기예보로 돌렸다. 한종태 대대장이 보고서를 확인하며 물었다.
“그보다 눈은 제대로 치우고 있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부대 주변 안 미끄럽게 확실하게 치우라고 해.”
“네. 아, 그리고 사단장님께서 시찰 중이라고 하던데 안 나가보십니까?”
한종태 대대장이 고개를 팍 들었다.
“뭐? 사단장님께서 시찰하신다고? 이 날씨에? 진짜 그 양반은 해도 해도 너무하네. 밑에 사람은 생각도 안 하나. 무슨 시찰은 시찰이야. 답답하네.”
한종태 대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곽부용 작전과장이 피식 웃었다.
한종태 대대장이 보고서에 사인을 다 하고는 그것을 곽부용 작전과장에게 건넸다.
“안 나가면 안 되겠지?”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알았다.”
한종태 대대장이 장갑과 전투모를 챙겨서 대대장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