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284화
27장 이 밤의 끝을 잡고(15)
중대 행정반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오상진을 김우진 상병이 불러 세웠다.
“소대장님. 잠깐 와보십시오.”
“왜?”
“TV에 소대장님께서 나오십니다.”
“뭐?”
오상진의 시선이 TV 화면으로 향했다. 뉴스에서는 실시간으로 이번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강원도 경포 지역 인근 산에서 암매장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살인자 임춘재는 자신의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 내연녀를 암매장했습니다. 하지만 근처 군부대의 도움으로 시체를 찾게 되었고, 영원히 미제로 남을 뻔한 될 사건을…….
-여기는 강원도 경포대해수욕장입니다. 저쪽에 보이는 산이 바로 임춘재가 내연녀를 암매장한 장소입니다. 저곳은…….
이렇듯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연일 뜨겁게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지상파 뉴스에 자막으로 오상진이 올라왔다.
-암매장된 시체 발견! 최초발견자는 파견 나온 충성 대대 오 모 소대장으로 밝혀져!
김우진 상병이 TV 앞에 있는 노현래 이병에게 말했다.
“현래야, 소리 좀 키워봐.”
“이병 노현래. 네, 알겠습니다.”
소리를 키우자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오상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보였던 자막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충성 대대 오 모 소대장…….’
이것 하나만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그때 박중근 하사가 미소 띤 얼굴로 오상진 곁으로 다가왔다.
“소대장님, 기분 어떻습니까?”
“예?”
“기분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지금 좀 얼떨떨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상진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박중근 하사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넵!”
“소대장님 식사하러 가시죠.”
“네? 아, 네에…….”
오상진과 소대원들이 식당으로 향했다. 오상진은 오늘따라 식사가 꿀처럼 맛이 있었다. 그냥 흔한 콩나물국에 어묵 볶음인데도 말이다.
28장 별빛이 내린다(1)
1.
오상진은 점심을 먹고 내무실로 걸어갔다. 그때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어? 소희 씨네.”
오상진은 곧바로 밖으로 도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네. 소희 씨.”
-상진 씨, 저 도착했어요.
“네? 벌써요?”
오상진이 다소 놀란 눈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거든요.
“그래요? 지금 뭐 하세요?”
-지금 경포해수욕장을 걷고 있어요.
“아, 그래요? 거기 괜찮아요?”
-네. 뭐, 남자들이 자꾸 전화번호를 물어봐서 귀찮긴 한데 전 괜찮아요.
한소희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오상진은 남자들이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치근덕대는 상상만 해도 피가 끓어올랐다.
“저, 소희 씨. 제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안 괜찮으면 어떻게 해요?
“소희 씨,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어? 바로 올 수 있어요? 저녁때쯤이나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 오늘 하루 휴식일을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 외출해도 됩니다.”
-알았어요. 그럼 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상진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몸을 돌려 4소대장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때마침 4소대장도 점심을 다 먹고 내무실로 걸어오던 중이었다.
“4소대장.”
“네. 식사하셨습니까?”
“좀 전에 먹었죠. 그보다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제게 말입니까?”
“네.”
오상진은 주위를 잠시 둘러보고는 4소대장에게 나직이 말했다.
“4소대장 지금 내가 잠깐 외출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1소대원들 좀 봐 줄 수 있겠습니까?”
“외출 말입니까?”
“네. 사실 서울에서 여자 친구가 왔습니다.”
오상진은 살짝 부끄러운 듯 조용히 말했다. 4소대장의 눈이 커졌다.
“네? 여자 친구요?”
4소대장의 목소리가 다소 올라갔다. 순간 오상진이 눈을 크게 뜨며 검지로 입술을 막았다.
“쉬, 쉿!”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좀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여자 친구분께서 오신 겁니까?”
“네, 지금 경포해수욕장에 있다고 합니다.”
“이야, 진짜 부럽습니다.”
4소대장이 감탄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남자 친구를 보기 위해 파견 근무 나온 강원도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인데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상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혼자 있다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하긴. 해수욕장이면 집적대는 사람들 많아서 좀 위험하긴 하겠습니다.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고맙습니다.”
오상진은 여러 말 하지 않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4소대장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4소대장이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이 정도 답례는 사단장 앞에서 자신을 챙겨주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상진은 내무실로 와서 깔끔한 전투복 차림으로 갈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우진 상병이 물었다.
“어? 소대장님 어디 나가십니까?”
“아, 잠깐 외출 좀 하고 올게.”
“외출 말입니까? 누구 만나러 갑니까?”
“아니, 잠깐 볼일 좀 보러…….”
“볼일 보러 가십니까? 전 또 여자 친구가 와서 나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순간 오상진이 뜨끔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그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파견 중에 여자 친구라니.”
“그렇죠? 하긴 우리 소대장님이 우릴 버리고 그러실 분이 아니지.”
얼마 전 김소희 중위가 전 군의관이었던 한대만과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부대에 짜하게 퍼졌다.
한대만이 충성 대대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눈에 띄게 된 건데 그러면서 오상진이 김소희 중위에게 차였다는 말들도 함께 나돌았다.
한소희와 열애 중인 오상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김우진 상병을 비롯해 여자 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병사들은 오상진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4소대장에게 미리 말해뒀으니까. 일이 생기면 4소대장에게 말해놓고!”
“네.”
“사고 치지 말고.”
“사고 칠 게 있습니까. 이렇듯 TV만 시청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잘 있어.”
“네. 그런데 언제 오십니까?”
“오늘 저녁때쯤에 올 거야.”
“들어오실 때 맛있는 것 좀 사다 주시죠.”
“알았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상진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오상진이 속으로나마 사과를 한 후 내무실을 나갔다.
“다녀오십시오.”
“그래, 다녀오마.”
오상진은 서둘러 위병소로 향했다. 위병근무자들이 곧바로 경례를 했다.
“충성.”
“그래, 수고 많다. 나 잠깐 외출하고 올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
“네.”
오상진은 괜스레 발걸음을 빨리했다. 위병소 근무자들은 멀어지는 오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소대장님은 누구죠?”
“야, 저 양반이 그 양반이잖아. 시체 찾은 사람.”
“아, 그분이십니까? 와!”
박 일병은 눈을 반짝였다. 김 상병이 피식 웃었다.
“왜 놀라고 그래? 사인이라도 받고 싶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기는 개뿔! 그냥 운이 좋은 것뿐이지.”
“김 상병님. 누가 그랬습니다, 운도 실력이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근무나 잘 서.”
박 일병은 오상진이 그저 멋져 보일지 모르겠지만 강원 소초에서 근무하며 제대를 바라보고 있는 김 상병의 생각은 달랐다.
그 시체를 오상진이 아니라 강원 소초의 누군가가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하니까 솔직히 부럽고 배가 아팠다.
그랬다면 적어도 자신들 역시 휴가증 한두 개 정도는 챙길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일병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은 박 일병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김 상병님은 부럽지 않습니까.”
“몰라. 병사랑 간부랑 같냐?”
“그래도 일 계급 특진! 뭐 그런 것 없겠습니까?”
“일 계급 특진이 어디 그리 쉽게 주는 거래?”
“혹시 모르지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이번 사건에 참여한 형사들 말입니다. 전부다 일 계급 특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 에이, 그쪽이랑 여기랑 같냐.”
“어쨌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말입니까?”
“인마, 특진하라고 해. 저분이 특진하는 거랑 너랑 뭔 상관이 있다고 그래? 넌 그냥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근무나 잘 서라고!”
“너무하십니다.”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네. 열심히 근무나 서겠습니다.”
“야, 박 일병.”
“네.”
“어쭈, 너 일병 좀 달았다고 막 나가자 이거지?”
“제가 언제 말입니까.”
“이 자식이…….”
그렇게 위병소에 근무하는 두 사람은 한참을 티격태격했다.
한편 오상진은 미리 콜택시를 불러놓은 참이었다. 길가로 뛰어가자 이미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콜택시죠?”
“네.”
“시내로 가주세요. 아니, 경포해수욕장으로요.”
“알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약 20여 분을 나가자, 차창을 통해 경포대 백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와, 10월 중순인데도 피서를 오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중 몇몇 남자들은 춥지도 않은지 웃통을 벗고 해변가를 활보하고 있었다. 순간 오상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저것들은 날씨도 쌀쌀한데 왜 웃통을 벗고 난리야?”
오상진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런 남자들이 우리 소희 씨한테 치근덕거리면 안 되는데…….”
오상진은 마음이 괜히 더 초조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오상진이 타고 있는 택시가 해변도로를 따라 호텔에 도착했다.
오상진은 서둘러 택시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있지?”
오상진이 호텔 로비를 돌아다니며 한소희를 찾았다. 그러나 한소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벌써 자나?”
오상진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한소희가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 어디에요? 저 지금 호텔 로비에요.”
-어? 벌써 도착했어요?
“네. 지금 어디 계세요?”
-저 모래사장을 지금 걷고 있어요.
“경포대해수욕장이에요?”
-네.
“알겠어요. 지금 그리로 갈게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혼자 모래사장을 걷는 것도 나름 괜찮네요.
“제가 안 괜찮아요.”
오상진이 곧바로 전화를 끊고는 호텔을 나와 해변가로 뛰어갔다.
2.
한소희는 휴대폰을 끊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환한 미소로 해변가를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신고 나왔던 신발이 들려 있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것도 나름 괜찮네.”
한소희는 혼잣말을 하며 홀로 여유롭게 해변가를 거닐었다. 하지만 한소희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한소희는 짧은 핫팬츠에 몸에 착 달라붙는 하얀 티를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긴 생머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볍게 찰랑거렸는데 연예인 뺨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때 몇몇 남성이 한소희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