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217화
21장 꼬리가 길면 밟히지 말입니다(5)
“정말 감사합니다.”
오상진은 다시 TV를 차에 싣고 부대로 향했다. 부대로 향하던 중 오상진은 박은지를 떠올렸다.
“가만……. 혹시 이걸로도 도움이 될까?”
오상진은 차를 세워놓고 업자가 방금 적어 준 것을 휴대폰으로 찍어서 보냈다. 만약을 위해 보험용으로 받아 놓은 거지만 아무래도 박은지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자 곧바로 박은지에게 전화가 왔다.
“네, 은지 씨!”
-이게 뭐예요?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요.”
-정확하게 어떤 건데요?
“이게 체육대회 때 부상으로 나온 TV인데요…….”
오상진은 문제의 TV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박은지는 듣고 나서 깜짝 놀랐다.
-대박! 중고 TV를 사서 새것으로 탈바꿈한 거네요. 그럼 중간에 해 먹었다는 건데요.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상진 씨도 의심은 하고 있는 거잖아요.
“네, 뭐 그렇지만…….”
-위에서 아무 말 없어요? 이거 알려지면 난리가 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대대 행보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무조건 가지고 들어오라면서요.”
-그 양반이네. 그 양반! 제가 지난번에 말했던 민용기 상사 맞죠?
“네. 그렇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 사람 전에 있던 부대에서도 엄청 해 먹었어요. 그거 걸려서 옷을 벗느니 마느니 했는데 그쪽 대대장 있죠. 그 사람이 데리고 간 거예요.
“아, 그런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알아볼 걸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이제 와 괜히 알아봤자 긁어 부스럼 만들어요.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이 좋아요. 솔직히 충성대대 가고 나서 좀 조용해서 사람이 달라졌나 싶었는데 상진 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역시 인간은 변하질 않는 거 같아요.
“그런가요?”
-어쨌거나 상진 씨.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오히려 상진 씨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참, 여기 업체가 어디인지만 좀 알려주세요. 그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오상진은 박은지의 부탁대로 업체 주소를 찍어서 문자로 보내주고 곧바로 부대에 복귀했다.
6.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설마 중간에 딴 길로 샌 건 아니겠지?”
민용기 상사는 주차장에 와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오상진이 나타나자 곧바로 그곳으로 갔다.
“행보관님.”
“아, 오 소위님. TV! TV는 어디 있습니까?”
“트렁크에 있습니다.”
오상진의 말을 들은 대대 행보관은 후다닥 트렁크로 가서 문을 열었다. TV를 확인한 후 말했다.
“어이쿠, 이런 나쁜 사람들…….”
TV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민용기 상사가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오상진도 슬그머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오 소위님. 걱정 마십시오. 내가 새것으로 바꿔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민용기 상사가 큰소리를 떵떵 쳤다. 그러나 오상진은 박은지에게 대대 행보관이 뒷돈을 챙긴다는 소리를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민용기 상사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행보관님. 이 TV 사 온 업체가 어디입니까? 이렇게 된 거 저하고 같이 가서 바로 바꿔 오죠? 지금 애들 TV 없어서 난리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고, 무슨 TV 하루 없다고 난리입니까.”
“그러니까 저랑 같이 가시죠. 혼자보다는 저랑 같이 가서 담판 짓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어디 못된 인간들이 말이야. 우리 행보관님 뒤통수를 치고 말이죠.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상진이 잔뜩 화가 난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민용기 상사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이 사람 진짜 왜 이래. 곤란하게.’
아까 자신이 TV에 관해서 아는 게 없어 사기를 당한 거 같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설마하니 오상진이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부릴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든 걸 이실직고할 수도 없으니 오상진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주말이 시작되는데, 4소대원들이 주말에 TV를 시청하지 못한다면 그 불만이 김철환 1중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대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갑시다.”
민용기 상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신 겁니다? 내일 가실 때 꼭 저를 부르셔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민용기 상사가 TV를 가지고 군수과를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 뒤쪽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하아, 미치겠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잠깐 생각을 하던 대대 행보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대대장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혼자 처리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7.
한종태 대대장은 책상에 앉아 차량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이야, 역시 멋져! 좋네.”
새로 출시된 세단들을 보니 절로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민용기 상사가 들어왔다.
“대대장님 바쁘십니까?”
“아니. 괜찮아. 들어와.”
“그런데 뭐 하고 계셨습니까?”
“아, 차 좀 보고 있었어.”
“차…… 말입니까?”
“그래. 아무튼 잘 왔네. 내가 말이야. 이 차가 끌리는데 어떤가?”
“어떤 거 말입니까?”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횬대 차 말이야. 아 지금 보니까, 무척 맘에 들어.”
“그거 뽑으시게 말입니까?”
“그래.”
한종태 대대장이 씩 웃으며 자신이 점찍어 둔 차량이 나온 부분을 내보였다. 그 철없는 모습을 보며 민용기 상사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저기 대대장님.”
“응?”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약간의 문제? 뭐?”
한종태 대대장의 시선은 차량 카탈로그에서 떼지 않고 말했다.
“지난번에 TV 말입니다.”
“TV? 그게 왜?”
“고장이 나서 말이죠.”
“고장 나면 고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그런데 그게, 중고인 것이 들통났습니다.”
“뭐?”
한종태 대대장의 고개를 홱 하고 들려졌다. 그리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그게 중고였어?”
한종태 대대장은 마치 모르는 척 대답했다. 순간 민용기 상사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이런 개XX를 봤나. 지가 허락까지 해놓고선 이제 와 발뺌을 하네?’
처음에는 농담으로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한종태 대대장은 정말로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순간 민용기 상사는 뒤통수를 맞은 듯 골이 띵 했다. 그렇다고 한종태 대대장과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는지라 애써 분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대대장님, 제가 지난번에 말씀을…….”
“아니, 이 사람아. 지난번에 몇 년 묵은 걸 산다고 했지. 중고를 산다고는 안 했지 않나. 아니었어?”
“물론 그런 식으로 말씀들 드리긴 했습니다만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뭐가 그게 그거야? 묵은 상품하고 중고하고 같아? 만약 중고를 산다고 그랬으면 승낙 안 했지.”
“네?”
뻔뻔스러운 한종태 대대장의 태도에 민용기 상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와 미친…….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세상에 몇 년 묵은 새것이 어디 있어?’
민용기 상사는 속으로 빠득 이를 갈았다. 지금 한종태 대대장이 하는 짓은 꼬리 자르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자 한종태 대대장이 차량 카탈로그를 덮고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행보관! 요새 왜 그러나? 돈독이 올랐어?”
“대대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막말로 지금 대대장님께서 보시는 그 차. 제가 많이 보태드리지 않습니까.”
“와, 지금 이것 가지고 생색내는 거야? 언제는 자네의 성의고 마음이라며. 그리고 자네 옷 벗을 걸 힘써서 막아주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야? 그거 나 아니야? 그런데 나한테 이것 하나 못 해줘?”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운하네.”
한종태 대대장은 민용기 상사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괜히 진흙탕 싸움으로 가 봐야 자신만 피곤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용기 상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한종태 대대장의 성격을 모른 건 아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막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지. 이제 와서 나한테 돈 좀 보태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
“네. 제가 어떻게 대대장님께 그러겠습니까.”
“알았어. 보고는 잘 들었고 이만 가 봐. 그리고 잘 좀 처리해 이 양반아. 또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말고. 아무튼 행보관, 예전만 못해. 영 실망스러워.”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말만 그러지 말고. 잘 하자.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충성.”
민용기 상사는 대대장실을 나오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누가 더 많이 챙겼는데 이제 와서, 뭐? 에이, 썩을 영감탱이!”
민용기 상사는 한종태 대대장을 향해 욕을 한 사발 하고는 군수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옆에 놓인 TV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생돈 나가게 생겼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새 TV를 사는 것이 현명했다. 오상진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대대 행보관은 휴대폰을 들어 자기가 잘 아는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TV 말이야. 제일 싼 것이 얼마야? 어, 새것으로 말이야. 뭐? 얼마? 무슨 TV가 그렇게나 비싸? 그런거 말고 좀 더 싼 걸로. 답답하네. 누가 신상 찾나? 신상 같은 재고 있잖아!”
8.
다음 날.
충성대대는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상진이 행정반으로 들어서자 다들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자리에 앉는 오상진에게 4소대장이 말을 걸어왔다.
“TV 고장 나서 1소대장님이 신경 써주셨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제가 했어야 했는데…….”
“4소대장 다른 일로 바빴지 않습니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런데 TV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민 상사님 하고 같이 바꾸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애들이 난리입니다.”
“자식들, 그걸 못 참아서…….”
“그나마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유일한 매개체 아닙니까. 그래서 더 난리를 부리는 것이고.”
“하긴 그렇죠.”
오상진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4소대장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왜 고장이 났답니까?”
“아무래도 불량품이 온 것 같습니다.”
“이야, 아무리 우리가 군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것을 팔아먹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4소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상진은 차마 대대 행보관인 민용기 상사가 그랬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때 행정반으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