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216화
21장 꼬리가 길면 밟히지 말입니다(4)
그동안 대대 행보관으로 부임한 민용기 상사는 중대 행보관들을 불러서 잔소리를 자주 했다.
-쓸데없는 곳에 돈 쓰게 하지 마라. 보급품은 아껴서라. 웬만한 것은 알아서 수리하고. 알았지?
대대의 살림을 책임지는 행보관으로서 쓸데없이 새어 나가는 돈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당연했다. 다만 그렇게 아낀 돈을 단 한 번도 후배들을 위해 쓴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는 건 결국 혼자 다 해 먹는다는 이야기고.
그때부터 김도진 중사는 뭔가 의심이 들었다.
“하긴 자기 해 먹는 놈이 남 해 먹는 꼴은 못 보지. 어디 한번 쑤셔볼까?”
김도진 중사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길로 군수과로 향했다.
“충성.”
“어? 김 중사 무슨 일이야?”
군수과에 있던 민용기 상사가 김도진 중사를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냥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식사하셨습니까?”
“흥, 언제부터 나 챙겼다고 그래.”
그러면서 민용기 상사가 힐끔 김도진 중사의 손을 살폈다.
“뭐야? 빈손으로 온 거야?”
“정말 지나가다 들른 겁니다. 그래서 따로 못 챙겼습니다.”
김도진 중사가 능구렁이처럼 웃어넘겼다. 그러자 민용기 상사가 콧방귀를 끼고는 자신의 업무를 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도진 중사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어이구, 저렇게 공짜를 밝혀요. 그러니 머리가 벗겨지지.’
본인은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민용기 상사는 탈모가 상당히 진행 중에 있었다. 아무리 유전적으로 이미가 넓다고 해도 정수리 근처까지 머리가 빠지는 건 누가 봐도 탈모라고 봐야 했다.
정말 지나가다 들른 줄 알았던 김도진 중사가 나가지 않고 밍기적거리자 민용기 상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군수과에는 무슨 일이야? 혹시 필요한 물품 있어? 참고로 말하지만 없다.”
“에이, 무슨 만날 물품 때문에 옵니까. 그냥 겸사겸사 오는 거죠.”
“흥, 김 중사.”
“네?”
“자네가 퍽이나 겸사겸사 오겠다. 솔직히 말해봐. 뭐야?”
“사실 행보관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전에 체육대회 때 TV 있지 않습니까.”
“으응? 무슨 TV?”
민용기 상사가 순간 움찔하며 다시 물었다. 김도진 중사가 다시 설명했다.
“거 있잖아요. 체육대회 때 부상으로 주어진 TV 말입니다.”
“아아, TV, 그게 왜?”
“TV가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 뭘 얼마나 험하게 썼기에 벌써 고장이 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서 서비스센터에 맡겼다고 하던데…….”
“뭐? 센터?”
순간 민용기 상사의 눈이 커졌다. 그걸 빤히 보면서 김도진 중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 그런데 센터에서 이상한 말을 하더랍니다. TV가 4년이나 지나서 서비스가 적용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게 맞습니까? 체육대회 끝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4년입니까? 센터 직원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대리점에 가서 직접 산 건데.”
“그렇죠. 저도 그럴 리가 없다고 해서, 제가 잘 아는 중고 업자에게 가서 검사받으라고 했습니다.”
“뭐?”
민용기 상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놀랐다.
“이미 검사를 받고 있다고? 거기가 어디인데?”
“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한테 먼저 보고를 했어야지!”
“저희 중대 TV가 고장 난 것도 보고를 해야 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에이. 괜찮습니다. 1소대장님께서 나가셨으니까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순간 민용기 상사는 말문이 막혔다. 하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오상진이 들고 나갔다니. 이러다 해 먹은 걸 몽땅 토해내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났다.
“김 중사. 지금 오 소위한테 전화해서 그냥 들어오라고 해.”
“예?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1소대장님이 부하도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괜히 업자가 잘못 건드려서 문제 생기면 A/S 못 받고 그러는 거 아닌가 해서 그러지. 그거 내가 처리할 테니까. 다시 부대 가지고 오라고 해.”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사람 제가 계속 거래하던 사람이라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김도진 중사가 일부러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딴소리를 하자 민용기 상사가 버럭 소리쳤다.
“김 중사! 내가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지금 내 말이 우스워?”
순간 김도진 중사는 터지는 웃음을 되삼켜야 했다. 경험상 저렇게 발끈하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혼자 해 먹다가 들통날 것 같으니 되레 화를 내는 게 확실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놈아.’
마음 같아선 민용기 상사의 부정을 탈탈 털고 싶었지만 군대라는 조직이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도진 중사는 민용기 상사의 속을 끓이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저한테 그렇게 말을 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1소대장님께서 가지고 나가신 거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잘 이야기 하면…….”
“1중대장님 허락받고 나갔다는데 그럼 1중대장님한테도 제가 전화해야 합니까?”
“그건…….”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민용기 상사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는 김도진 중사의 입가로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5.
한편, 오상진은 문제의 TV를 들고 김도진 중사가 말한 중고 가게를 찾았다.
딸랑, 딸랑!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상진은 중고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걸어 나왔다.
“예,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예에. 김도진 중사 소개로 왔습니다.”
“충성대대 김 중사님 말씀이시죠? 아까 전화는 받았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바쁘긴요. 그냥 안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이 녀석 때문에 왔습니다. 사실 이 TV가 한 달 전 체육대회 때 부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화면이 보라색으로 바뀌며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비스센터 가서 확인해 보니 4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체육대회 부상으로 새 TV를 받은 건데 어떻게 그게 4년이나 되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4년? 무슨 TV가 쌀입니까? 4년을 묵혀서 나오게.”
“저도 그걸 몰라서 여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으흠, 그럼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네.”
오상진이 TV를 업자에게 건넸다. 업자는 제일 먼저 시리얼넘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거 4년이 아니라 5년은 넘은 것 같은데요.”
“네? 5년이나요? 그렇게 오래되었습니까?”
“이건 중고로 팔아도 얼마 하지 않습니다. 요즘 워낙에 저렴한 TV들이 쏟아지니까요. 게다가 5년 된 제품이 새것으로 남아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아시겠지만 요즘은 철이 지난 건 전부 인터넷으로 싸게 팔아 치우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죠.”
“아무튼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너무 해 드셨네.”
업자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에 오상진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일단 어떤 상태인지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럽시다, A/S 기간도 지난 거 같으니까 제가 편하게 봐 드리겠습니다.”
“네.”
업자는 몇 가지 공구를 가지고 와 TV 뒷면을 뜯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TV의 내부를 확인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새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보드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지 않습니까.”
“네.”
“이 먼지는 한 달 만에 이렇게 쌓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쌓인 먼지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어디 보자, 화면이 보라색으로 뜬다고 했죠?”
“네.”
“역시 화면 보정기, 픽셀 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패널을 전면 교체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으음…….”
오상진이 심각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업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겉은 새것처럼 멀쩡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겉만 새것으로 교체한 것 같아요. 한마디로 새것을 가장한 중고입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나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은 안 할텐데…… 뭐 남겨 먹으려면 뭐든 못 하겠습니까.”
“네에…….”
오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오상진의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네, 오상진 소위입니다.”
모르는 번호지만 일단 전화를 받으니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1소대장님 접니다. 대대 행보관.
“아, 네. 행보관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지금 어디입니까?
“저 TV 고치러 왔습니다.”
-혹시 TV 열어봤습니까?
“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아무래도 TV가 중고 같다는데, 이거 어디서 사셨습니까?”
-아, 중고라고 그럽니까?
“예. 이거 아무래도 사기당한 거 같습니다.”
순간 잠시 말이 없던 민용기 상사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쁜 사람들! 내가 TV 볼 줄 모른다고 사기 친 것 같습니다.
“어? 행보관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거 어떻게 하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죠.
“그럼 이렇게 하시죠. 행보관님께서 이 TV 구입한 곳을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환불받도록 하겠습니다.”
오상진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기왕 TV를 고치기 위해 부대 밖으로 나왔으니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민용기 상사가 그럴 필요 없다며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가서 담판 짓고 새 제품으로 받아 오겠습니다.
“뭐하러 번거롭게 그러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거래를 했으니 제가 가는 게 맞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1소대장 같으면 구매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TV 들고 와서 사기당했다고 하면 들어주겠습니까?
다소 억지가 섞여 있긴 했지만 민용기 상사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일단 TV 가지고 들어오세요.
“행보관님께서 교환하실 생긱 이십니까?”
-네, 제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상진이 전화를 끊고 업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뚜껑 다시 닫아 주시겠습니까?”
“네? 수리 안 하고요?”
“네. 그냥 닫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업자가 빠르게 TV 뒷면을 닫았다. 오상진이 업자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말입니다. 이 TV가 어디가 고장 났는지 따로 적어 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원래 그런 건 잘 안 해주는데……. 김 중사님 소개로 오신 분이기도 하니까 해 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제가 나중에 자주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네.”
업자는 곧바로 TV의 상태와 몇 년식인지 시리얼넘버까지 적어서 오상진에게 줬다. 오상진은 그것을 확인한 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