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92화
19장 유격!(10)
16.
밤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긴 도로를 따라 걷던 길은 어느새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 능선을 넘어갈 때는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산에 울려 퍼졌다. 그것도 잠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어…….”
좌르르르륵!
누군가 전투화가 미끄러져 넘어진 모양이었다. 곧바로 병사들이 위험 상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이 말은 처음에 시작해서 끝에 따라오는 사람까지 이어졌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6시간만 걸으면 부대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자, 30분간 휴식!”
“30분간 휴식!”
“각 분대장은 인원 파악해서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일도야.”
“상병 김일도.”
“네가 나가봐라.”
“네. 알겠습니다.”
김일도 상병은 군장을 벗어 놓고 앞에 나갔다. 그사이 다른 소대원들은 전투화를 벗었다.
“으으윽…….”
최강철 이병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전투화를 벗었다. 그리고 양말까지 벗자 물에 불린 것처럼 퉁퉁 부은 하얀 발이 나타났다.
“아아아…….”
최강철 이병이 슬쩍 자신의 발바닥을 확인했다. 500원짜리 동전만 한 물집 하나와 100원짜리 동전만 한 두 개의 물집이 잡혀 있었다.
“괜찮아?”
이해진 일병이 옆에서 물었다. 최강철 이병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디 보자.”
이해진 일병이 최강철 이병의 발바닥을 확인했다.
“이야, 물집이 세 개나 잡혔네.”
“네. 그렇습니다.”
“이대로 두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 일단 물을 빼내야 하는데…….”
이해진 일병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드는데 어느새 다가온 오상진이 품에서 바늘과 실을 빼냈다.
“이대로 손으로 터뜨리면 균이 들어가서 악화돼. 임시방편으로 물을 빼내는 방법은 실로 하는 거야.”
오상진이 아주 얇은 바늘에 실을 넣고 조심스럽게 물집에 찔렀다. 그리고 실을 통과시킨 후 잘라냈다.
“자, 이러면 실을 통해 물이 빠져나올 거야.”
“네, 감사합니다.”
오상진은 나머지 물집도 물을 빼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발을 좀 말려.”
“네.”
“그리고 다음부터 행군할 때 양말을 두 켤레 신어라. 그럼 마찰력을 좀 줄일 수 있어서 물집이 잘 안 잡힐 거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민감한 사람은 잡히더라.”
오상진이 웃으며 다른 곳으로 갔다. 다른 소대원들의 물집도 바늘과 실로 해결해 주었다.
잠시 후 김일도 상병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봉지가 들려 있었다.
“자, 모두 이거 하나씩 받는다.”
이해진 일병이 재빨리 일어나 김일도 상병에게서 봉지를 건네받았다. 그 안의 내용물은 군것질거리였다.
사탕, 초코파이, 초코바, 요구르트, 그 외 캐러멜.
모두 달달한 것이었다.
“우와, 이번에는 안 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지 말입니다. 행군에 이런 군것질이 빠지면 섭섭하죠.”
“후후, 그러게 말이다.”
각자 한 봉지씩 받아서 건빵 주머니에 넣었다. 그곳에는 이미 출발 전에 배급받은 건빵이 들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든든한데 말입니다.”
“그렇지? 군것질할 것이 많아서 그래.”
“후훗, 그렇구나.”
그리고 짧았던 30분간의 휴식이 끝이 났다.
“출발하기 10분 전!”
“10분 전!”
1소대원들이 하나둘 전투화를 신고 준비를 했다. 군장은 맨 마지막에 어깨에 멜 생각이었다.
“으으, 쓰라려.”
물집 잡힌 곳이 아파왔다. 그렇다고 전투화를 안 신을 수는 없었다.
“아, 젠장! 이 느낌 정말 싫다.”
그렇게 하나둘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군장을 들려는데 노현래 이병이 강대철 이병의 군장을 들어 주려고 했다.
“대철아, 이거 네 거지?”
순간 강대철 이병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자신의 군장을 잡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왜? 내가 도와줄게.”
“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강대철 이병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군장을 들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한 손으로 들더니 휙 돌려 어깨에 멨다. 그 모습을 본 김우진 상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노현래.”
“이병 노현래.”
“강대철 저 새끼, 군장 확인해 봐.”
“군장 말입니까?”
“그래, 새끼야!”
김우진 상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강대철 이병 역시 순간 당황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빨리 확인해 봐!”
“네, 알겠습니다.”
노현래 이병이 강대철 이병에게 다가갔다.
“대철이 군장 줘봐.”
하지만 강대철 이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현래 이병이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강대철 이병의 군장을 들었다.
“어?”
노현래 이병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당황하며 강대철 이병을 바라봤다.
“대철아…….”
노현래 이병은 너무 당혹스러웠다. 강대철 이병의 성격상 군장을 대충 쌌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할 만큼 가벼웠다.
그때 김우진 상병이 소리쳤다.
“노현래! 뭐 해! 군장 가져오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노현래 이병이 군장을 김우진 상병에게 가져갔다.
강대철 이병의 군장을 받아 든 김우진 상병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놔, 이 새끼 봐라.”
김우진 상병이 곧바로 강대철 이병의 군장 안을 살폈다. 박스로 각을 잡은 군장 안에는 신문지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너 돌았냐? 아니지, 너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등병이 이런 짓을 할 수 없지. 새끼가, 아예 개념을 상실했구나.”
“…….”
강대철 이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노현래 이병도 인상을 굳혔다. 그때 오상진이 다가왔다.
“뭔 일이야? 줄 안 서?”
“아닙니다. 지금 바로 서겠습니다.”
“빨리 서둘러!”
“네.”
김우진 상병은 일단 오상진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대신 강대철 이병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아무튼 너 가지가지 한다. 진짜! 노현래.”
“이병 노현래.”
“너 저 새끼랑 군장 바꿔.”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새끼야!”
“네, 알겠습니다.”
노현래 이병이 강대철 이병의 군장을 등에 멨다. 강대철 이병은 노현래 이병의 군장을 착용했다.
‘아, 시발! 하필 거기서 걸리냐.’
강대철 이병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다만 군장이 걸렸다는 것에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렇게 작은 소동이 지나고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졸음과의 사투였다. 걸어가면서도 졸음은 쏟아졌다. 그러다가 사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야! 정신 차려!”
“죄송합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가면 돼!”
벌써 그 말만 수십 번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를 같이 해 서울 지역에 들어왔다.
“자, 한 시간 남았다. 한 시간만 가면 부대다.”
“네, 알겠습니다.”
“자자! 1중대, 파이팅!”
“파이팅!”
다시 한번 독려하며 길을 걸어갔다. 오상진도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다시 1시간을 걸어갔을 때였다. 선두에서 누군가 말했다.
“보인다. 위병소가 보여!”
그 순간 다들 정신이 번쩍 뜨였다. 이미 졸음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최강철 이병이 슬쩍 전방을 바라보았다. 진짜 저 앞에 위병소가 있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도 발바닥에 잡힌 쓰라린 물집도 이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본인 스스로가 이겨냈고, 해냈다는 성취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자, 드디어 도착했다. 당당히 위병소를 통과하자!”
오상진의 한마디에 소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위병소를 통과할 때 갑자기 군악대가 나와 연주를 했다. 부대에 남아 있던 부대원들도 도로 양 옆으로 나와 박수를 치며 행군을 한 병사들을 반겼다.
최강철 이병은 신기하면서도 가슴에 뿌듯함이 넘쳤다. 그때 오상진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을 펴라. 당당해져라. 너희들은 저들의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짝짝짝짝짝짝!
그 순간 최강철 이병의 뺨으로 두 줄기 물이 흘러내렸다.
“어?”
최강철 이병은 뭐지 하면서 손으로 뺨을 훔쳐보았다. 눈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보며 최강철 이병은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부끄럽진 않았다. 잘하진 못했지만 끝내 모진 고생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최강철 이병은 그렇게 강하게 외치고 싶었다. 가슴속에 남겨진 성취감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20장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어!(1)
1.
간단히 퇴소식을 끝낸 뒤 소대원들은 모두 내무실로 들어왔다.
소대원들은 일단 군장을 모두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오상진 역시 정리를 마친 후 내무실을 찾았다.
“자, 다들 유격과 받느라 고생 많았다. 일단 샤워장이 열렸으니까, 씻고 한숨 잘 수 있도록 한다.”
“네, 알겠습니다.”
“대식아.”
“병장 김대식.”
“믿고 소대장 가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수고해라.”
오상진은 그렇게 말하곤 내무실을 나갔다. 김대식 병장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 빨리 세면 가방 챙겨서 샤워장으로 이동한다. 씻고 빨리 자자!”
그런데 일병과 이등병을 제외한 상병들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안 씻으면 안 됩니까? 그냥 대충 세수만 하고 자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김우진 상병과 최우식 상병이 입을 모았다. 김대식 병장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야, 그래도 샤워는 해야지. 새벽 내내 땀을 한 바가지 흘렸으면서. 그렇게 있으면 몸에서 쉰내 난다. 자자, 어서 가자!”
김대식 병장이 두 사람을 데리고 샤워장을 갔다. 입구에서 옷을 벗으며 물었다.
“우리 몇 시까지냐?”
“8시 40분까지입니다.”
“그래? 15분 남았다. 빨리 서둘러라.”
“네. 알겠습니다.”
1소대원들이 서둘러 옷을 벗은 후 샤워기 앞으로 갔다. 최강철 이병이 샤워기 앞에 섰다. 그 옆으로 김우진 상병이 지나가며 씻고 있는 최강철 이병의 등을 툭 쳤다.
“이병 최강철!”
최강철 이병이 관등성명을 대며 고개를 돌렸다. 김우진 상병이 환한 얼굴로 서 있었다.
“기, 김 상병님…….”
“뭘 그렇게 놀래?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
“아, 아닙니다.”
최강철 이병은 사격 이후로 김우진 상병이 어려웠다. 이병이 상병을 어려워하는 거야 당연했지만 다른 상병들에 비해 김우진 상병과는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김우진 상병도 최강철 이병이 자신을 불편해하는 걸 알았다.
그래도 언제고 좋아질 거란 생각으로 넘어갔는데 유격을 겪고 나니 자신이 최강철 이병에게 과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짜식. 아무튼 최강철! 이번에 너 다시 봤다. 유격도 야무지게 잘하고 말이야.”
“가, 감사합니다.”
“솔직히 난 너 힘들어서 못 버틸 줄 알았다. 마지막까지 잘하는 거 보고 놀랐다.”
“아닙니다.”
최강철 이병은 쏟아지는 칭찬에 살짝 쑥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며 김우진 상병이 피식 웃었다.
“자식! 이등병 다 되었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
김우진 상병의 시선이 최강철 이병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오호, 그곳도 다시 봤네. 훌륭해.”
“네?”
“아니야, 인마. 멋지다고.”
김우진 상병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계속해서 아래로 향했다. 순간 김우진 상병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최강철 이병이 깜짝 놀랐다.
“앗! 그러지 마십시오.”
“자식, 멋지다는 걸 멋지다고 하지. 지도 좋으면서.”
“안 좋습니다.”
최강철 이병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고참들이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