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68화
17장 체육대회는 끝이 났지만(8)
“안녕하세요. 오상진이라고 합니다.”
“어머, 군인이시네.”
“네. 장교입니다.”
“아, 장교? 그런데 직접 하시게요?”
“저는 아니고 저희 어머니가 가게를 하실 겁니다.”
“아, 그래요.”
그 아줌마가 슬쩍 오상진을 보다가 이내 한소희 쪽으로 시선이 갔다. 순간 아줌마의 눈이 커졌다.
한소희의 패션이 예사롭지 않았다. 백화점을 다니며 많이 봤던 스타일이었다.
물론 요즘에 명품을 따라 하는 제품들이 많지만 그런 건 사실 때깔부터가 달랐다.
백화점 VVIP로서 봤을 때 한소희의 옷은 진짜였다. 옷뿐만 아니라 손에 낀 반지부터 귀걸이, 목걸이까지 하나같이 럭셔리했다.
‘뭐야 이 여자는? 몸에 걸친 거 전부 명품이잖아. 그리고 저 가방은…….’
아주머니가 한소희가 들고 있는 백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 저건 구쯔의 올해 한정판!’
건물주 사모님답게 아주머니는 명품 가방에 대해서 빠삭했다. 백화점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으니 브랜드마다 신상 정보는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한정판에다가 워낙에 비싸서 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 부잣집 딸인가 보네.’
아줌마는 어느 정도 계산을 정리한 후 물었다.
“무슨 장사 할 거예요?”
“아마 국밥집을 할 겁니다.”
“국밥집? 뭐 나쁘지 않네요. 원래 여기 해장국집을 했으니까요.”
“네. 들었습니다.”
“일단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물어보세요.”
“만약에 계약하면 언제부터 장사를 할 생각이에요?”
“가능한 빨리하면 좋죠.”
“인테리어는 새로 할 거죠?”
“네, 해야죠.”
“인테리어는 최대한 빨리 끝내줘요. 이 근처에 원룸촌이 많아서 소음이 생기면 민원이 들어와요.”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대충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줌마는 강단 있게 바로 돈 얘기로 들어갔다.
“조건은 들으셨죠?”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싸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오상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래 거래의 기본은 흥정이고 가능하면 계약 조건을 조율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보증금은 둘째 치고 월세가 월 250만 원이었다.
1년이면 3천만 원꼴인데 그 돈도 돈이지만 월세 때문에 어머니가 괜히 무리하실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한소희의 옷차림을 알아본 아주머니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아요. 이 동네 시세라는 게 있는데 나 혼자 내리면 주변에서 욕해요. 그보다 이 아가씨. 딱 봐도 부자인 것 같은데 뭔 돈을 깎고 그래요.”
“네?”
오상진이 눈을 크게 떴다. 아줌마는 한소희의 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죠. 그거 명품관 구쯔 매장의 한정판 가방.”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가지고 있거든요.”
아주머니가 살짝 허세를 부렸다. 한소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구나. 백화점 어디 다니세요?”
“청담동 프라우스 백화점이요.”
“어멋! 저도 거기 다니는데……. 다음번에 거기서 한번 봬요.”
한소희가 반기듯 말했다. 순간 아주머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뭐야, 정말 거기 다녀? 젠장……. 괜히 말했나 보네.’
사실 프리우스 백화점은 명품 쇼핑족들에게는 알아주는 곳이었다. VIP 관리가 상당히 깐깐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살짝 빈정이 상했다.
“그리고 권리금 말인데요.”
그러자 중간에 한 사장이 끼어들었다.
“사모님 그렇지 않아도 그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요새 또 권리금 많이 안 받는 추세인데 아시죠?”
한 사장이 먼저 선수를 쳐서 1억 원의 권리금을 조금 낮출 생각이었다.
사실 권리금은 앞서 장사한 영업자에게 지불하는 돈이었다.
가게 시설이나 상권 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런데 예정보다 일찍 가게가 빠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영업자가 자신이 지불했던 권리금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걸 아주머니가 중간에서 냉큼 낚아채 버린 것이다.
모든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한 사장은 적당히 조율에 나섰다.
오상진은 권리금을 줄여서 좋고.
아주머니는 본래 받지 못할 권리금을 조금이라도 챙겨서 좋고.
이렇게 하는 편이 모두에게 윈윈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건 그거고, 전 좀 더 받을 생각인데요.”
“네?”
순간 오상진은 눈을 치떴고 한소희의 눈살을 찌푸렸다.
부동산을 통해 조건을 알고 만났는데 막무가내로 조건을 올린다는 건 몰상식한 짓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오기 전에 서로 입을 맞췄다고 생각하고는 언성을 높였다.
“집도 잘 살면서 권리금 낼 돈이 없어서 그래요?”
“아, 사모님. 이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사실 권리금은 기존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받는…….”
“됐고. 내 건물이고, 내가 주인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여기 있는 시설하고 상권도 내가 다 넘겨받았어요. 해장국집 사장이 냈다는 권리금도 돌려줬고요.”
“그걸 돌려주셨습니까? 언제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내 가게 권리금을 받겠다는데, 문제 있어요?”
한 사장은 땀까지 삐질 흘리며 당황했다.
“원래 이 집 장사 잘되었어요. 그리고 여기 사장 제 사촌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에요.”
“그, 그러셨습니까?”
“아무튼 권리금 다 줬고, 그 권리가 나에게 넘어온 거예요. 모르면 가만히 있어요.”
“아, 네에 사모님…….”
한 사장은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까발릴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아주머니 남편은 건물주고 부동산 중개업자 입장에서는 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오상진에게 괜히 이곳을 소개시켜 줬다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한소희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그래서 아주머니께서는 권리금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한 2억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전 분명히 권리금 1억이라고 했다. 그런데 1억을 더 부른 것이었다.
오상진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한소희가 바로 말했다.
“2억이면 괜찮네요.”
오상진과 한 사장이 눈이 크게 떠졌다.
“소, 소희 씨.”
하지만 한소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내가 보는 눈이 정확했어. 돈 있는 집안이었단 말이지.’
아줌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오늘 계약서 바로 작성할까요?”
아줌마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한소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 말고 몇 군데 더 알아봐야 해요. 저희 어머니 가게인데 대충 정할 수는 없잖아요?”
“……?”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주머니를 외면한 채 한소희가 오상진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가요, 상진 씨.”
“아, 네네…….”
그 뒤를 한 사장도 곧장 따라 나왔다.
가게 안에 있던 아줌마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2억을 다 먹을 뻔했다가 코앞에서 놓쳐버렸으니 말이다.
“뭐야, 저 여자. 꼭 계약할 것처럼 굴더니……. 아니면 내가 너무 앞섰나? 아니야, 애초부터 계약할 생각이 없었어. 저년이 날 가지고 논 거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후자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저 새파랗게 어린 년이…….”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따질 수도 없었다. 자신이 멋대로 권리금을 올렸듯 저들에게도 계약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밖으로 나온 한소희는 콧방귀를 꼈다.
“건물주 인성이 틀려먹었어요. 솔직히 조건이 엄청 좋은 편도 아니고. 다른 데 봐요.”
그러면서 한 사장을 보았다.
“사장님, 여기 말고 몇 군데 더 있죠?”
“아, 네네.”
“그럼 가요.”
“네, 절 따라오세요.”
오상진은 그런 한소희의 모습을 보고 웃음밖에 안 나왔다.
‘은지 씨도 그랬는데 소희 씨도 만만치 않네.’
오상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사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깁니다.”
한 사장이 보여준 두 번째 가게와 세 번째 가게는 영업 중이었다. 두 가게 모두 장사도 잘되고, 평수도 괜찮았다. 그러나 두 가게의 문제는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권리금도 상당했다. 두 번째로 본 갈빗집은 1억 5천을 달라고 했고 세 번째 곱창집도 최소 1억을 생각한다고 했다.
“권리금이 좀 크죠?”
“네. 생각했던 것보다 세네요.”
“약간 외곽이라고 해도 서울은 서울이니까요. 그리고 이 근처는 상권이 좋아서 좀 더 부르는 편이고요.”
한 사장은 오상진이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열심히 비위를 맞춰 주었다. 오상진이 돈이 많은 건 얼추 짐작하고 있지만 장사 처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권리금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었다.
그건 한소희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권리금 받는 거 말도 안 돼요.”
“그렇죠. 그렇다고 오랜 관습을 없앨 수도 없고, 저 사람들도 다 권리금을 내고 들어왔을 테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권리금이 있는 가게에서 장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장사가 잘된다는 거니까요.”
“대신 정말 그 권리금을 받을 만한 가게라면 말이죠.”
한소희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상진은 살짝 못마땅했다.
‘나 참, 굳이 권리금을 주면서까지 해야 해?’
그런 오상진의 속내를 읽은 것일까. 한소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진 씨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한소희 역시 오상진이 맘에 안 들어 하는 것을 느꼈다. 한 사장도 눈치를 챘는지 곧바로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제가 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오상진이 대답을 한 후 한소희와 함께 걸어갔다. 그때 한소희 눈에 건너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파랑 글씨로 ‘임대’라고 적혀 있었다.
“저기 사장님.”
“네?”
“저 건물 임대가 오래 붙어 있었어요?”
한 사장도 건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건물요.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사실 저 건물주가 건물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IMF 때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건물들 정리하면서도 저긴 안 팔겠다고 놔뒀었는데 워낙에 세가 비싸서 공실률이 높아지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내놓으셨더라고요. 건물주 사정이 좋지 않아서 어쩌면 경매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고요.”
한 사장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한소희가 눈을 반짝이며 오상진을 보았다.
“상진 씨, 차라리 가게를 임대하지 말고, 저 건물을 사는 것은 어때요?”
오상진이 깜짝 놀랐다. 건물을 살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건물을 사요?”
“네. 상진 씨가 아예 건물주가 되어버리면 권리금이라든지 다른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어차피 상진 씨 건데……. 게다가 비어 있는 곳은 다른 사람에게 세를 줘버리면 되고요. 내가 보기에는 일석이조인 것 같은데.”
한소희의 말에 오상진도 귀가 쫑긋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