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63화
17장 체육대회는 끝이 났지만(3)
“오빠!”
“응?”
김이중 상병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인 이진영이었다.
“어? 진영아. 너 어떻게 된 거야?”
김이중 상병은 기쁘면서도 의아해했다. 이진영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그냥 오빠를 빨리 보고 싶어서 미리 출발했지.”
“뭐야. 그럼 아까 전화했을 때는?”
“버스타고 서울 올라오는 중이었지.”
“그랬어?”
“으응! 오빠 놀랐지?”
“놀라긴. 이리 와.”
김이중 상병이 이진영을 살포시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런데 내가 외박 못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미리 왔어?”
“그럼 뭐, 면회만 하고 내려가려고 했지.”
이진영이의 환한 얼굴이 김이중 상병의 눈 안에 들어왔다. 김이중 상병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스르륵 번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와락 끌어안았다.
“오, 오빠…….”
“잠깐만. 너무 예뻐서 그래. 예뻐서…….”
“오빠도 참…….”
김이중은 이진영을 꼭 안은 상태로 말했다.
“내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누가 기다리면 어때.”
김이중 상병이 이진영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보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
“전혀!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아침부터 서둘렀을 거 아니야.”
“괜찮아. 오빠 볼 생각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그럼 다행이고. 배고프지?”
“조금?”
“가자, 오빠가 만난 거 사 줄게.”
“됐어. 군인 월급이 얼마나 한다고…….”
“괜찮아. 오빠, 용돈 받았거든.”
“용돈?”
이진영의 눈이 반짝였다. 김이중 상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말해줄게.”
“칫. 그래도 난 오빠 부대 서울에 있어서 좋아.”
“수원에서 여기 오는 데 얼마나 걸리지?”
“지난번에도 말해줬잖아. 두 시간 정도?”
“생각보단 멀지 않네.”
김이중 상병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있잖아. 내 친구 남자 친구는 있지. 저기 강원도 완전 산골짜기에서 군 생활 한대. 그래서 면회 한 번 갔다 오더니 다시는 못 가겠다면서 고개를 흔드는 거야.”
“그랬어?”
“응!”
“그런데 진영아.”
“왜?”
“택시 안 잡힐 거 같은데 저 아래까지 내려가면서 계속 얘기할까?”
김이중 상병이 넌지시 물었다. 택시가 안 잡히기도 하지만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택시비도 아낄 겸 오붓하게 걷고 싶었다.
“그래!”
그런 김이중 상병의 속마음을 알아챈 이진영이 냉큼 김이중 상병에게 팔짱을 꼈다. 김이중 상병이 환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아까 얘기 계속해 봐.”
“맞다. 그래서 그 친구가 말하는데 날 엄청 부러워해.”
“그래?”
“응, 내 멋진 남자 친구 부대는 서울에 있으니 찾아가기 얼마나 편하겠냐고 그러면서……. 막 부러워하는 거 있지.”
“으응, 그랬구나.”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밀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부대를 벗어나 상점가에 도착하고서야 택시를 잡아탔다.
잠시 후 김이중 상병과 이진영이 번화가에 내렸다.
이진영은 오랜만에 보는 남자 친구의 얼굴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물론 김이중 상병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숙소부터 잡고, 뭐 좀 먹으러 갈까?”
“숙소?”
순간 이진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김이중 상병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야? 갑자기 부끄러워하고 그래.”
“내, 내가 언제!”
“귀여워. 어디 보자.”
김이중 상병이 숙소를 잡으려고 모텔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이진영이 살그머니 김이중 상병의 팔을 붙잡았다.
“오, 오빠…….”
“왜? 방은 나중에 잡고 우리 밥부터 먹자. 나 배고파.”
“그, 그럴까?”
김이중 상병은 살짝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을까?”
“오빠는 뭐 먹고 싶은데?”
“나는 고기?”
“고기?”
이진영 살짝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모텔비에 갈 때 차비도 감안해야 하는데 여기서 고기까지 먹는다면 가진 돈이 빠듯할 거 같았다.
“오빠 미안해. 오늘은 내가 돈이 좀 없어. 그냥 분식집에서 간단히 먹음 안 될까?”
이진영이 미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김이중 상병이 어깨에 잔뜩 힘을 줬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뭐?”
“오빠 용돈 받았다고 했잖아.”
“에이, 군인이 용돈 받아 봤자 얼마나 된다고…….”
“얘가 오빠를 무시하네.”
“아니,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용돈 보내줬어?”
“아니. 이번에 군대에서 오빠 축구 우승했다고 했지.”
“으응.”
“그 보상으로 우리 소대장님께서 주셨어.”
“소대장님이? 우와, 소대장님이 용돈까지 주시고 대박이다.”
“그렇지! 1소대장님인데 그분 완전 멋진 분이야.”
“그렇구나.”
이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잠깐만…….”
김이중 상병이 황급히 품에 있던 흰 봉투를 빼 들었다. 약간 두툼해 보이는 봉투였다.
“이거 봐라. 맞지!”
이진영의 눈이 반짝이며 그 봉투를 낚아챘다.
“오빠, 줘봐.”
“진영아, 오빠가 확인해야지.”
“기다려 봐, 내가 먼저 볼게.”
김이중 상병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봐. 그래도 봉투가 두툼한 것 보면 제법 넣어주신 것 같은데.”
김이중 상병의 말에 이진영이 의심의 눈초리로 변했다.
“그야 천 원짜리로 눈속임했을 수도 있지.”
“아니야. 우리 1소대장님 그럴 분이.”
“그건 모르는 거야. 아무튼 지금 확인해 보면 되지.”
이진영은 흰 봉투를 열어 한쪽 눈을 감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이진영의 눈이 엄청 커졌다.
“오, 오빠…….”
“왜, 왜?”
김이중 상병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진영은 재차 확인하며 말했다.
“오빠, 천 원짜리가 아니야. 전부 만 원짜리인데, 게다가 한 20만 원은 될 것 같아.”
“정말? 이리 줘봐.”
김이중 상병이 진영의 손에서 흰 봉투를 낚아채 확인했다. 진짜 진영의 말처럼 20만 원은 되어 보였다.
“지, 진짜네.”
“오빠, 꺼내서 제대로 확인해 봐.”
“알았어.”
김이중 상병이 돈을 꺼내 세어봤다. 그런데 진짜 정확하게 2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돈과 함께 따라 올라온 포스트잇이 보였다.
-다 함께 줬던 10만 원의 포상금과는 별도로 소대장이 특별 포상금을 지급한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옆에 있어 준 여자 친구에게 맛있는 거 사주고 모처럼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참. 탈영하면 죽는다.
김이중 상병은 포스트잇에 적힌 오상진의 따뜻한 말에 눈물이 고였다.
“소, 소대장님…….”
김이중 상병은 오상진이 관리하고 있는 1소대 병사가 아니었다. 그저 축구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런데 이렇듯 챙겨주니 너무 고마웠다.
“오빠 우는 거야?”
“울긴 누가 울어.”
“방금…….”
“안 울었어.”
김이중 상병이 황급히 눈물을 훔친 후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어디든 가자.”
“여기 번화가잖아.”
“그, 그렇지……. 하하핫!”
김이중 상병은 살짝 민망해하며 웃었다.
“일단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아까 고기 먹자며.”
“하하, 그렇지.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오빠 갑자기 이상해.”
“이상하긴…….”
김이중 상병은 민망하게 웃으며 앞장섰다. 그 모습을 이진영이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귀여워.”
그리고 김이중 상병의 뒤를 쫓아가며 외쳤다.
“오빠 같이 가.”
이진영은 김이중 상병 옆에 나란히 걸어갔다.
“그런데 오빠 이렇게 멀리 나와도 돼?”
“괜찮아. 같은 서울이잖아. 위수지역만 벗어나지 않으면 돼.”
“그래?”
“그렇다니까. 그보다 저기 고깃집 있다. 저기 가자.”
“알았어.”
두 사람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삼겹살을 무려 4인분이나 시켜서 냉면까지 배 터지도록 먹었다. 그리고 오붓하게 영화를 본 뒤에 모텔로 돌아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
4.
월요일 아침부터 1중대 행정실 안에 가전제품이 진열되었다. 바로 체육대회 때 나눠주지 못한 우승 상품이었다.
종합 우승에는 12㎏ 통돌이 세탁기.
종목별 우승에 TV.
사단장이 특별히 신경을 써준 덕분에 대대 체육대회 상품이 푸짐하게 준비됐다.
1중대는 족구와 축구를 이겼고, 종합 우승까지 차지해 세탁기와 TV 2대를 얻게 되었다.
종합 우승 상품은 누가 뭐래도 세탁기였지만 1중대 소대장들은 하나같이 21인치 평면 TV에 눈독을 들였다.
“이야. TV 잘 빠졌네.”
미리 출근을 한 4소대장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행정실 문이 열리며 오상진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셨습니까. 1소대장.”
“네.”
오상진이 자신의 책상으로 가다가 멈춰 섰다.
“어? 이건…….”
“아, 저번 주에 주지 못한 체육대회 우승 부상이 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오상진이 가방과 전투모를 책상 위에 벗어놓고 4소대장의 옆쪽에 섰다.
“박스는 이미 벗겼나 봅니다.”
“아뇨, 도착해 보니 이미 벗겨져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오상진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TV 쪽으로 가져갔다.
“세탁기는 공용세탁실에 둔다고 했고, 그런데 TV 두 대는 어느 소대에 줍니까? 일단 족구에서 우승한 3소대가 1대 가져가는 겁니까?”
4소대장이 넌지시 물었다.
“아마 그래야겠죠.”
오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축구 우승도 극적이었지만 만약 족구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아마 화기 중대와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긴 3소대 TV도 오래되어서 바꿀 때가 되었죠.”
4소대장의 중얼거림을 들은 3소대장이 애써 웃음을 삼켰다. 사실 체육대회 우승 상품이라고 해서 우승팀이 선물을 가져간다는 법은 없었다. 다 같이 고생했으니 선물도 합리적으로 나누는 게 일반적인데 그 합리적인 방법이 주로 소대 순서인 경우가 많았다.
나눌 수 있는 TV가 2대라면 보통은 1소대와 2소대의 차지였다. 그런데 4소대장이 나서서 바람을 잡아주고 있으니 3소대장도 싫지 않았다.
“일단 TV 한 대는 3소대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한 대는 당연히 1소대로 가는 거죠?”
4소대장의 물음에 오상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4소대가 가져가십시오. 어차피 저희 1소대는 TV 아직 괜찮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4소대장이 눈을 똥그랗게 떴다.
설마하니 오상진이 우승 포상을 양보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이래저래 눈치를 살피던 장재일 2소대장이 3소대장 옆으로 슬쩍 다가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3소대장, 괜찮으면 담배 하나 피우러 나가지.”
“아뇨, 괜찮습니다.”
“나가자. 할 말도 있고.”
“이제 담배 끊으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할 말 있으면 여기서 말씀하십시오.”
3소대장의 말에 장재일 2소대장이 다른 간부들 눈치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 TV 말이야.”
“TV요?”
“나에게 양보해라.”
“네?”
3소대장이 깜짝 놀랐다. 설마 설마 했지만 장재일 2소대장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요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장재일 2소대장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