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59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21)
김일도 상병은 억지로 키핑하지 않고 오른발로 툭 건드려 방향만 바꾼 뒤에 그대로 3중대 골대를 향해 내달렸다.
“막아!”
김일도 상병의 드리블 실력이 박정태 상병 못지않다는 걸 알아챈 우창호 상병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김일도 상병은 달려드는 수비수를 가볍게 따돌린 뒤 앞을 막아선 수비수까지 제치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왼쪽에 있던 킹리, 김이중 상병이 다급히 손을 들어 외쳤다.
“공! 공! 여기 공!”
오른쪽에 있던 이근우 병장이 재빨리 몸을 홱 돌려 공간을 찾아 움직였다. 그 순간 3중대 수비수들이 우왕좌왕했다.
“야, 어디? 어디야!”
“왼쪽! 왼쪽이야!”
우창호 상병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그땐 이미 공을 받아 든 김이중 상병이 왼쪽으로 치고 나간 뒤였다.
“야, 막아! 막으라고!”
3중대 골키퍼 정대만 상병이 다급히 소리쳤다. 선수 출신인 김성진 상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큰 키에 긴 팔을 가지고 있어서 전방에 김성진 상병 못지않은 선방 쇼를 펼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선수 출신이 아니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골 욕심으로는 1중대, 아니, 충성 대대에서 첫 손에 꼽힐 김이중 상병은 의외로 침착하게 공을 몰았다.
평소 같았다면 일단 골키퍼에게 달려들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공을 밀어 넣어 봤겠지만 2 대 1로 뒤진 가운데 모처럼 잡은 찬스를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수비수들이 나한테 붙었어. 일도는 아직이고. 이근우 병장뿐이야.’
때마침 이근우 병장이 수비수들 뒷공간으로 뛰어드는 게 보였다.
“이 뱀!”
김이중 상병은 망설이지 않고 왼발로 땅볼 크로스를 때렸다.
“크로스다! 막아! 사람을 막으라고!”
크로스가 날아들 것을 직감한 우창호 상병이 한발 앞서 소리를 내질렀지만 3중대 수비수 중 누구 하나 몸을 날려 공을 걷어내지 않았다.
“비켜!”
보다 못한 골키퍼 정대만 상병이 소리를 내지르며 공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텅!
그보다 한발 앞서 공을 잘라 먹은 누군가가 비어 있는 골대 안으로 공을 튕겨 넣으면서.
삐이이이익!
작전장교의 호각이 울리게 만들었다.
그 발의 주인공은 바로 이근우 병장이었다.
이근우 병장이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갔다.
“우와아아아아아!”
1중대원들이 일제히 이근우 병장에게 달려갔다. 그들과 잠시 기쁨을 나누던 이근우 병장은 자신에게 크로스를 해준 김이중 상병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야, 인마! 크로스 대박이었다.”
“전 이 병장님을 믿었습니다. 꼭 골을 넣을 줄 알았습니다.”
내기 축구를 벌일 땐 최고의 앙숙이라 불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조금 전 보여준 환상의 호흡은 최고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이로써 점수는 다시 2 대 2 동점이 되었다.
“좋았어, 애들아! 바로 그거야.”
김철환 1중대장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좋아했다. 그러다 너무 오바했나 싶어 고개를 돌려 한종태 대대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종태 대대장은 김철환 1중대장보다 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저거야! 저렇게 했어야지.”
한종태 대대장이 주먹을 흔들며 좋아했다.
그 옆에 있던 곽부용 작전과장도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로 말을 받았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후반전은 1중대가 이길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뭐라고 했나? 그래도 아직 방심하긴 일러. 점수는 2 대 2라고.”
“그렇지만 기세를 탄 쪽은 1중대입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이번에 동점 안 됐으면 내가 경기장으로 들어갈까 했어.”
“대대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속이 타면 그랬겠어? 농담이 아니라 후반에라도 1중대 소속으로 뛰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아무리 그러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농담일세. 농담! 무슨 농담도 못 해?”
한종태 대대장이 농담이라고 웃어넘겼지만 곽부용 작전 과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기에 눈이 먼 한종태 대대장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점 골이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곽부용 작전과장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1중대의 추가 골을 바랐다.
하지만 이후 양 팀의 공격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3중대의 작전은 간단명료했다.
공격 루트를 단순화하고 무조건 전방에 있는 박정태 상병에게 공을 몰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을 간파한 1중대의 센터백 김우진 상병이 찰거머리처럼 박정태 상병을 따라다니자 박정태 상병은 좀처럼 공을 구경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미드필더 지역까지 내려와 공을 받고 억지로 슈팅을 하면 그땐 김성진 상병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 막아냈다.
“뭐야? 박정태도 별거 아니잖아?”
박정태 상병의 날카로운 슈팅을 가볍게 막아낸 김성진 상병이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전반에는 긴장감으로 몸이 무거웠지만 오상진의 격려를 받고 난 다음부터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김성진 상병이 선방을 이어갈수록 박정태 상병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후반전 중반이 지나고 나서부터 박정태 상병은 자신의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집중 견제를 받은 탓에 체력적으로 지치는 데다가 발등에 제대로 얹혔다 싶은 슛을 김성진 상병이 전부 걷어내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박정태! 박정태애애!”
그럴 때마다 이대우 3중대장은 박정태 상병의 이름을 불러댔고 박정태 상병은 어쩔 수 없이 공격 작업에 가담해야 했다.
자신 이외에 다른 공격 루트가 있다면 그쪽을 활용했겠지만 애당초 3중대에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는 건 박정태 상병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고 1중대가 우위를 점한 건 아니었다. 동점을 만들긴 했지만 1중대 역시 3중대의 수비를 쉽게 뚫지 못했다.
박정태 상병 한 명만 최전방에 배치한 3중대가 후반 들어 수비 라인을 내리면서 1중대 역시 빌드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 이렇게 답답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철환 1중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3중대는 미드필더와 수비수의 간격이 짧고 미드필더와 공격수의 간격이 넓었다.
한마디로 수비를 탄탄히 한 후 박정태 상병을 앞세워 역습을 노리는 작전을 써먹었는데 전반전에는 이 작전이 제대로 먹혔다. 1중대 수비수가 우왕좌왕한 것도 한몫했고 말이다.
하지만 후반전에는 통하지 않았다. 김성진 상병의 눈부신 선방 쇼가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1중대가 기세를 잡아야 하는데 좀처럼 공격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3중대가 수비 라인을 많이 내려서 쉽진 않겠지만 선수들이 해줄 겁니다.”
오상진은 두 번째 골이 들어간 이후로 반쯤 마음을 비우고 경기를 봤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싸워주고 있는데 감독으로서 승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오상진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1중대에 기회가 왔다.
3중대 우창호 상병이 박정태 상병을 보고 길게 찌른 패스를 강인한 상병이 잘라내고 그 공이 곧장 플레이메이커 김일도 상병에게 이어진 것이다.
“좋았어!”
김일도 상병은 공을 잡기가 무섭게 전방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김이중 상병과 이근우 병장 역시 공간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막아! 새끼들아! 막으라고! 반칙을 해서라도 막아!”
눈 깜짝할 사이에 미드필더 지역이 뚫리자 이대우 3중대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빌미를 제공한 우창호 상병이 미친 듯이 달려와 김일도 상병을 향해 태클을 걸었다.
“으악!”
김일도 상병이 발목을 잡으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 순간 작전장교가 호각을 불며 뛰어왔다.
삐이이이익!
“3중대 반칙!”
우창호 상병도 반칙을 인정하며 순순히 손을 들었다. 하지만 작전장교는 고의성이 다분한 반칙이라 간주하고 옐로카드를 꺼냈다.
“너 이리와! 한 번만 더 과격한 파울을 하면 퇴장이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우창호 상병은 옐로우 카드를 받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후반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퇴장당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오히려 우창호 상병은 흔들렸던 수비수들을 독려했다.
그사이 1중대가 프리킥을 준비했다.
3중대 수비수들은 1중대가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제법 두껍게 벽을 만들었다.
“수비벽이 너무 가깝잖아.”
프리킥을 준비하던 김일도 상병이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우창호 상병이 헛소리 말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무슨 소리야. 정석으로 수비벽을 세웠어.”
작전장교가 잠시 바라보더니 공과 수비벽 사이의 거리를 발로 재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9미터 정도는 떨어져야 해.”
“딱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9미터 넘습니다.”
“그건 심판인 내가 판단한다.”
작전장교가 다리로 아홉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 수비벽을 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물러나, 어서!”
작전장교의 지시에 따라 3중대가 수비 위치를 2미터가량 옮겼다. 그 사이 이근우 병장이 다가와 김일도 상병에게 공을 건넸다.
“일도야, 자. 네가 얻은 프리킥이니까 네가 차!”
“아닙니다. 제가 골문으로 띄우겠습니다.”
“그 패턴은 너무 뻔해. 다들 나나 이중이만 마크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시원하게 한번 때려 봐. 너 프리킥 잘 차잖아.”
“이 병장님…….”
“네. 김 상병님이 차십시오.”
뒤쪽에 있던 하영진 일병도 한마디 거들었다.
수비 위주로 돌아선 3중대를 뚫으려면 차라리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이 나아 보였다.
“알겠습니다. 꼭 골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김일도 상병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근우 병장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널 믿는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근우 병장과 김이중 상병은 3중대 수비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안으로 뛰어들어 갈 수 있다며 수비수들을 자극했다.
김일도 상병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살짝 삐뚤어진 공을 들어 올려 살짝 입을 맞춘 뒤에 마음에 드는 곳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어디로 찰까? 어쩌면 이번이 후반전 마지막 공격 기회일지 몰라.’
김일도 상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근우 병장은 직접 슈팅을 시도하라고 말했지만 그러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번 공격까지 이근우 병장과 김이중 상병에게 떠넘기는 것도 미안했다.
후방에서 두 사람에게 공을 배급하는 사이 이근우 병장과 김이중 상병은 수없이 넘어지고 차였다. 그런 두 사람을 더 이상 힘들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직접 차 보자!’
김일도 상병은 수비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 방법을 시도해 볼까?’
보통 프리킥을 찰 때 수비벽들이 점프를 하며 슈팅 각도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일도 상병은 그걸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작전 장교가 호각을 불기가 무섭게 점프하는 수비벽 밑 공간으로 강하게 공을 밀어 찼다.
김일도 상병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김일도 상병의 발에서 공이 떨어지자 수비벽이 예상대로 높게 점프한 것이다.
골키퍼 정대만 상병도 수비벽을 넘어올 공을 대비하다가 갑작스럽게 발밑으로 깔려 들어오는 슈팅을 보고는 당황했다.
“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