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9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11)
“에이, 저희 중대장님께서는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중대장님은 별로 안 좋아하셔도 다른 사람들은 갈 거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갑니다. 저는 중대장님 모셔야 할 것 같아서 같이 복귀할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거죠?
“그럼요. 저와 중대장님은 바늘과 실 같은 사이입니다.”
-으음, 그럼 우리 중대장 오빠를 한번 만나야겠네.
“예?”
-바늘과 실 같은 사이라면서요. 그럼 제가 중대장님께서 잘 보여야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도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상진 씨 중대장님이라는 분은 꼭 한 번은 뵙고 싶어요.
“네, 기회가 된다면 그때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네, 소희 씨도 잘 자요.”
오상진이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좀 겁이 났는데 한소희의 말투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녀와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잠시 여운을 즐기다 몸을 돌려 다시 들어가려는데 박중근 하사가 나왔다.
“어? 박 하사. 왜 나옵니까?”
“소대장님 지금 들어가시게요?”
“네.”
“지금 들어가지 마십시오.”
“왜요?”
“2소대장 술 잔뜩 먹고 빡쳤습니다.”
“예?”
“술주정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는데 중대장님께 하소연 중입니다. 완전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그래요?”
오상진이 슬쩍 내부 상황을 확인했다. 2소대장이 약간 눈이 풀린 채 김철환 1중대장에게 억울한 듯 말을 내뱉고 있었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진짜 너무 하십니다.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그리 밉습니까? 저는 말입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님은…….”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상 이렇게 하소연을 하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김철환 1중대장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았다. 모처럼 군기를 잡으려는데 술주정을 하고 있으니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오상진이 안 되겠는지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박중근 하사가 다급히 오상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냥 계십시오.”
“그래도 제가 들어가서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3소대장, 4소대장이 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대장님이 들어가시면 2소대장이 2절 할 것 같습니다.”
“2절이요?”
“왜 있지 않습니까. 육사 출신이 어쩌고…….”
“아, 그렇죠.”
오상진 역시 빠르게 수긍했다. 장재일 2소대장은 3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상진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들어갔다가 장재일 2소대장의 술주정거리만 늘어날 것 같았다.
“끝나면 4소대장님이 전화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그때 저하고 같이 들어가시죠.”
“그게 좋겠습니다.”
오상진이 다시 몸을 돌렸다. 박중근 하사가 씩 웃으며 물었다.
“담배 한 대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전 됐습니다.”
“그보다 소대장님…… 혹시 요즘에 연애하십니까?”
박중근 하사의 물음에 오상진이 움찔하며 웃었다.
“티 납니까?”
“네, 엄청 티 납니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티가 나나 봅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소대장님이 요즘 핸드폰 보시면서 자주 웃으시니까요. 아마 알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 제가 그랬습니까?”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가끔 한소희의 문자를 볼 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는데 그걸 들킨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상한 소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그전에 소대장님. 김소희 중위님하고는 완전히 끝난 겁니까?”
“아, 소문이 어떻게 났습니까?”
“그게…….”
박중근 하사는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소대장님이 좀 잘 나가시니까. 김 중위님을 찼다고…….”
박중근 하사가 오상진의 눈치를 살폈다. 오상진이 피식 웃었다.
“소문이 그렇게 났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아닙니까?”
“네, 그건 아닌데…….”
“진실이 뭡니까?”
“말하기 좀 복잡한데요.”
“저에게만 말씀해 주십시오.”
오상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살짝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김소희 중위와 가짜 연애를 한 거라고 말하기는 그랬다. 왜냐하면 그 중간에 한종태 대대장이 엮여 있기 때문이었다.
“김 중위님하고는 잠깐 호감이 있어서 썸만 탔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이고 제가 좀 일방적으로 좋아한 것도 있고요.”
“아, 연애가 아니고 썸이었습니까?”
“예, 그런데 군인인데 무슨 썸을 타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사귄다고 소문이 나서 그냥 서로 그러려니 하게 됐는데 막상 사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요?”
“아무래도 김 중위님은 저보다 상관이고 또 연상 아닙니까? 그동안 부대 일이 바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소원해졌습니다. 이게 진짜 연인들처럼 뜨겁게 연애라도 하면 좀 나을 텐데 저희는 그런 게 아니어서.”
“아하.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대장님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시하진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부대에 사건 사고가 많았지 않습니까.”
“아 참. 그랬죠.”
“거기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다른 생각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 중위님은 그런 점이 서운하셨나 봅니다. 솔직히 여자는 자신에게 신경 잘 써주는 사람이 좋지 않겠어요?”
“예, 예. 그렇죠.”
“그러다 서로 멀어지게 됐는데 최근에 김 중위님께서 다른 분을 만나고 계셔서 저도 맘 편히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어? 김 중위님께서 다른 분을 만나고 계십니까?”
“예.”
“으음……. 그럼 그 소문도 맞나?”
“뭐가요?”
“아니, 김 중위님이 저기 의무대 한 대위님하고 데이트를 한다고…….”
“헐, 벌써 들켰습니까?”
“어? 그것도 아십니까?”
“아, 예예. 한 대위님이 먼저 절 찾아오셔서 얘기해 줬습니다. 전 괜찮으니까, 두 분 잘 만나보시라고요.”
마당발인 감도진 중사와 친분이 두터워서일까.
박중근 하사의 정보력도 수준급이었다.
덕분에 오상진이 할 말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 이제야 얘기가 정리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오 소위님 남자십니다.”
“예?”
“저 같으면 아무리 상사라 해도 김 중위님 같은 미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게 무슨 남자입니까.”
오상진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박중근 하사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박 하사는 지금의 아내분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아, 이제 제 차례입니까? 이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시간은 넉넉할 것 같은데요.”
“제가 말입니다…….”
그날 밤, 오상진과 박중근 하사는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체육대회 당일이 되었다.
본부중대 병사들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야, 상품 옮기자.”
병사들이 중앙 정문 앞에 놓인 박스를 확인했다. TV 박스와, 세탁기 박스, 그 외 다른 상품들이 있었다.
“와, 이게 다 뭡니까?”
“뭐긴 뭐야. 체육대회 상품이지.”
“그런데 원래 체육대회 상품이 이렇게 푸짐합니까?”
“아닐걸? 나도 이렇게 상품 많은 건 처음이야.”
“자자, 그만들 떠들고 조심해서 옮기자.”
“네.”
“옆에 잘 잡았지?”
“그렇습니다.”
“괜히 잘못 잡아서 떨어뜨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알지?”
“네!”
“그럼 셋에 든다.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춰 병사들이 동시에 세탁기 박스를 들었다.
그런데 순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무거워야 할 박스가 휙 하고 공중으로 치켜 올려졌기 때문이다.
“어라? 빈 박스잖아!”
“뭐죠?”
“다른 박스는?”
“다른 박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중앙계단을 통해 주임원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병사 중 한 명이 주임원사를 발견하고 말했다.
“주임원사님.”
“왜?”
“박스가 비어 있습니다.”
“뭐? 박스가 왜 비어 있어?”
주임원사의 눈이 똥그랗게 변했다.
그때 대대 행보관이 나타났다.
“이봐 행보관.”
“네.”
“아니, 상품 박스가 다 비어 있어.”
순간 움찔한 대대 행보관이 만약을 대비해 준비했던 멘트를 바로 뱉어냈다.
“아, 그게 수량이 다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우선 박스만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인마 빈 박스는 좀 거시기하지 않냐?”
“일단 상품이라고 하고 쌓아 놓으려고 했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은 다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거였어?”
“네, 그렇다고 몇 개만 갖다 놓기 뭐해서 아예 다 빼버렸습니다.”
“그럼 진즉에 말하지 그랬어. 이거 옮기는 애들이 깜짝 놀랐잖아.”
“네, 죄송합니다.”
주임원사는 이해를 했다는 듯 연병장으로 향했다. 대대 행보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새끼들.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이야기했어야지. 왜 주임원사를 찾아?”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 티 안 나게 한 곳에 잘 쌓아 놔라.”
“네, 알겠습니다.”
“이 새끼들아. 아까처럼 조심해서 옮겨. 빈 박스 티 내냐?”
“네, 넵!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서넛씩 붙어 박스를 옮기는 걸 보며 대대 행보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시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6.
체육대회를 맞아 각 중대들은 부산히 움직였다. 특히 본부중대원들은 아침을 먹은 후 창고로 가서 천막을 가져왔다. 그리고 연병장 단상 우측으로 천막 두 개를 신속하게 설치했다.
그런 본부중대원들의 모습을 다른 중대원들이 불쌍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쯧쯧, 김 상병님. 저기 본부중대 보십시오. 아침 일찍부터 나와 천막 치고 있습니다.”
“고생이네, 책상에 앉아 만날 볼펜만 잡다가 천막을 치려니 얼마나 힘들겠어.”
“하긴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날도 더운데 에어컨 바람 밑에서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좀 부럽지 말입니다.”
“인마, 부러울 것도 많다.”
그때 내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 연병장에 나가서 축구장 라인 그리랍니다.”
“시발! 누가?”
“누구겠습니까?”
“알았다. 나간다고 해.”
“넵!”
“에이, 아침에 좀 쉬려고 했더니.”
김 상병이 투덜거리며 연병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흰색 파우더로 줄을 그었다.
먼발치서 그 모습을 보던 1소대 소대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띠블, 저거 보니까 어제 연병장에서 돌 줍던 거 생각나네. 땡별에 땅만 보며 걷다 보니 현기증이 일어나서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어제는 진짜 힘들었지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저렇듯 힘들게 작업한 곳에 흰색으로 라인이 예쁘게 그려지니 뿌듯합니다.”
“새끼……. 그래 그 정도 감상은 가져도 돼.”
그때 연병장 한 곳에서 천막 두 개가 다 쳐졌다.
“천막 다 쳤습니다.”
“그래?”
“저런 거 보면 본부중대도 짠하지 말입니다.”
“야! 짠하긴 뭐가 짠해. 쟤네들 만날 사무실에 앉아 꿀 빨고 있는데.”
“하긴 본부중대 녀석들은 웬만해서는 훈련도 참가 안 하죠.”
“그래. 총은 제대로 쏠 줄 아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우리 소대장님은 어디 계시냐?”
“저쪽 천막 쪽으로 가십니다.”
“그래?”
천막은 연병장 단상에서 우측으로 세 개의 동이 지어졌다. 세워진 천막 안에 오상진을 비롯해 각 소대장과 부소대장들이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