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8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10)
오상진도 감히 그 분위기를 깨지 못했다. 김철환 1중대장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실 김철환 1중대장은 본래 주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상진과 단둘이 마실 때 가끔 풀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평소에는 과하지 않은 선에서 술을 마셨다.
부대 내에서도 워낙에 후배들을 잘 챙겨주기로 유명했고 계급을 앞세워 함부로 야단을 치는 경우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데 한 번 기분이 상하면 김철환 1중대장이 180도 달라졌다. 마치 가면 속에 감춰진 다른 얼굴이 드러나듯 권위를 내세워 찍어 눌렀다.
특히나 술자리에서 그 성향이 발동하면 지옥인 게 옆에 앉혀다 놓고 갈구고, 술 먹이고 갈구기를 반복했다. 안주를 먹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
“너 인마, 중대장이 얼마나 챙겨줬어.”
“네, 네.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잔해!”
장재일 2소대장은 안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만 냅다 마셨다. 그럴 것이 안주를 먹으려 치면 김철환 1중대장이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분위기 싸해지면 또 술을 먹였다.
그 모습을 보고 오상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2소대장. 적당히 하지 그랬습니까.’
둘 사이의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김철환 1중대장이 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얼마 전에 이대우 3중대장이 장재일 2소대장을 3중대로 데려가려는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전술 훈련 때 모종의 거래에 대한 대가인지 아니면 정말로 장재일 2소대장이 필요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 버렸다.
이대우 3중대장이 전술 훈련 우승 소원권까지 써 가며 긴히 부탁을 했지만 한종태 대대장이 김철환 1중대장에게 따로 의사를 물었기 때문이다.
“3중대장이 말이야. 장재일 2소대장을 데려가고 싶어 하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 소위 저희 중대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 3중대장 말로는 1중대에서 적응을 못 한다고 하던데?”
“3중대장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3중대장이 아무리 다른 중대 일에 관심이 많아도 저희 중대 일을 저보다 잘 알 수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그래서 1중대장은 싫다는 거지?”
“네. 저는 저희 중대 사람 건드리는 것 싫습니다.”
“그래, 알았어.”
한종태 대대장은 김철환 1중대장의 반대를 이유로 들어 이대우 3중대장의 청을 거절했다.
한종태 대대장의 결재가 없으니 장재일 2소대장은 당연히 3중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조만간 3중대 소속이 될 거란 기대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던 장재일 2소대장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게 김철환 1중대장의 꼬장이라 생각했다.
한편 김철환 1중대장은 자신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뒤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장재일 2소대장이 먼저 찾아와 솔직하게 3중대로 가고 싶다고 말했으면 차라리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대장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계속해서 3중대장과 놀아나니 그 꼴을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서로 쌓이고 쌓인 게 술자리를 통해 폭발해 버렸으니 저 분위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나저나 2소대장이 중대장님을 잘못 건드렸네. 우리 중대장님 한 번 화 나면 무서운 분인데.’
오상진이 알기로 김철환 1중대장은 소위 시절 전방에 있었다.
전방은 군기가 세다 보니 술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순환 근무 차 후방으로 내려오면서 부대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훈련보다 술 마시는 일이 더 많았는데 하필 당시 중대장이 소문난 술고래였다.
중대에 새로 온 소위들을 술로 군기 잡기로 유명했는데 김철환 1중대장도 당시 중대장하고 자주 대작을 하면서 몇 번이나 위장병이 걸렸다고 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어마어마한 주량을 얻게 됐고.
게다가 그 중대장에게서 아랫사람에게 술 먹이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 왔으니 장재일 2소대장의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그때 오상진의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발신자는 박은지였다.
“응? 은지 씨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오상진은 눈이 마주친 김철환 1중대장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네. 은지 씨.”
-상진 씨 잘 지냈어요?
“네, 저야 잘 지내고 있어요. 은지 씨는요?”
-저야 만날 취재에 파묻혀 살죠. 그런데 지금 회식 중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그건 매번 물어보시네요. 이쯤 되면 그러려니 할 때도 됐는데.
“하하. 참. 그랬죠? 형수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제가 상진 씨랑 통화할 거라니까 형부 적당히 술 마시게 하라던데요?
“노력은 해보겠는데 그게 제 맘대로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다소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박은지는 지금껏 용건 없이 전화한 적이 없었다.
그건 오상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최용수의 일을 부탁할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용건이 생겨야 박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다 보니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친구처럼 인지하고 있었다.
-최근에 부대에서 고철 잔뜩 빠져나간 적 있어요?
“고철이라. 아참, 안 그래도 저희 축구팀이 연습 장소로 삼은 곳이 소각장 옆에 마련된 고철 수거장이었는데 거기서 어떻게 연습을 하냐고 했더니 고철이 다 빠졌답니다.”
-그래요? 혹시 얼마나 쌓여 있었는지 기억해요?
“예전에 보기로는 큰 트럭 두세 대 분량은 있었던 것 같은데요. 뭐 지금은 없지만…….”
-그게 한꺼번에 빠졌다는 거죠?
“네.”
-혹시 다른 부대에서도 고철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모르고 알 만한 분은 아는데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오상진이 전화를 끊고, 곧바로 중대 행보관인 김도진 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구. 오 소위가 웬일입니까? 지금 회식 중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회식 중에 김 중사님이 보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오늘 왜 안 오셨습니까? 김 중사님 빠지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하하하, 제가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랬습니다. 어제 부사관들하고 달리기도 했고요. 다음번 회식 때는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장난 아닙니다.”
-왜요?
“중대장님께서 작심하고 2소대장 앉혀 놓고 술 드시고 있습니다.”
-2소대장이요? 참. 2소대장 이번에 3중대로 가려다가 까였죠?
“하하, 역시 모르시는 게 없으십니다.”
-제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라도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고철 말입니다. 그거 다른 중대도 소각장 옆 공터에 버립니까?”
-네, 그렇죠. 이번에 싹 한 번 처리한 거로 아는데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잔뜩 쌓여 있던 고철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서 말입니다. 저희 중대 고철 양도 어마어마했는데 대대 전체 고철이 한꺼번에 사라진 게 좀 미심쩍어서요.”
-흠……. 혹시 말입니다. 오 소위님이 전에 말씀했던 그 기자분이 연락 주신 겁니까?
“네. 그래서 제가 아실 만한 분에게 알아보겠다고 하고 연락드린 겁니다.”
-오호. 그러니까 거기에 뭔가 있는 것 같다 이거죠? 사실 저도 냄새가 나긴 했는데 잘됐네요. 제가 좀 자세히 알아봐 드립니까?
“그러면 감사한데…….”
-에이, 우리 사이에 공치사는 치우죠. 며칠 말미를 주세요. 내가 제대로 파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상진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박은지에게 문자를 남겼다.
-다 빠져나간 것 맞고, 아는 분이 좀 더 알아봐 주기로 했어요.
-고마워요. 상진 씨. 내가 나중에 밥 한 끼, 아니, 술 한번 살게요.
오상진이 문자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일과 관련된 내용이 오가다 보니 박은지와의 설렘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술 한번 살게요.’라는 문자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정식으로 교제 중인 건 아니지만 마음에 두고 있는 한소희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우리 소희 씨는 뭐 할까?”
오상진은 다시 핸드폰을 들고 한소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희 씨 뭐 해요?
이렇게 보내면 분명 ‘왜요?’라고 답이 오겠지.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답이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한소희에게서 문자가 아닌 전화가 왔다.
“소희 씨?”
-상진 씨는 뭐해요?
오상진은 한소희의 음성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부대 회식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문자를 보냈어요?
“소희 씨 보고 싶어서요.”
-솔직히 말해요. 지금 나이트클럽이죠?
“갑자기요?”
-갑자기는 상진 씨가 갑자기죠. 남자들은 보통 이상한 짓 하면 여자 친구에게 문자 보내던데.
순간 오상진이 뜨끔했다.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박은지의 문자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그걸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술에 취한 상황에서 헛소리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딴짓을 안 한다는 거예요. 아님…… 내가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거예요?
한소희가 훅훅 들어오자 오상진이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걸 사귄다고 해야 해. 아니라고 해야 해. 썸을 탄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간 거 같고…….’
잠시 고민하던 오상진이 바로 말했다.
“에이, 좀 더 기다리시지.”
-뭘요?
“내가 조만간 말하려고 했는데.”
-사귀자고요?
“네.”
-무슨 남자가 뭐 그리 뜸을 들여요. 그 소리 들으려다가 할머니 될 뻔했네. 됐어요, 그냥 오늘부터 우리 1일이라고 해요.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뻔하잖아요. 고백이랍시고 이상한 이벤트 하려고 했죠?
“어, 그게…….”
오상진은 순간 난감했다. 이벤트는커녕 고백할 준비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혼자서 귀엽게 김칫국을 마시는 한소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미안합니다.”
-괜찮으니까 그런 거 하지 마요. 낯 간지러우니까. 남녀가 만나서 맘에 들면 사귀고 그러는 거죠. 그런 짓 안 해도 돼요. 전 그런 유치한 거 바라는 여자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사귀어도 정말 괜찮아요?”
-네. 대신에 저한테 잘해요. 고백도 쿨하게 넘어갔으니까요.
“알았어요.”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 뭐 하고 있는지 보고 하세요. 오늘 하루 어땠는지. 밥은 먹었는지.
“제 일과야 뻔한데…….”
-그냥 해줘요. 대신 저도 다 얘기해 줄 테니까요. 원래 연인 사이는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솔직히 대대장 시절까지 살다 온 오상진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하지만 한소희가 저렇게 말을 하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술은 몇 시까지 마실 건가요?
“글쎄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제 막 시작해서요. 아마 한두 시간이면 끝나겠죠.”
-끝나면 뭐해요? 노래방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