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5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7)
3.
1중대의 상대인 2중대 중대장은 경기 시작보다 일찍 연병장에 나와 있었다.
잠시 후 김철환 1중대장과 오상진이 얘기를 나누며 걸어 나왔다.
“어? 1중대장님 나오셨습니까?”
2중대장이 환한 얼굴로 김철환 1중대장을 맞이했다.
“어, 그래. 2중대장은 벌써 나와 있었네.”
“당연히 제가 먼저 나와서 1중대장님을 기다려야죠.”
“에이, 무슨 그렇게까지 하나.”
“육사 한 기수 선배라도 당연히 깍듯이 모셔야 합니다.”
“허허, 거참…….”
김철환 1중대장은 이런 2중대장의 예우가 살짝 부담스러웠다.
김철호나 1중대장과 2중대장은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기수는 한 기수 차이. 2중대장이 1년 늦게 육사에 들어왔다.
선후배 관계가 깍듯한 육사에서 기수 차이가 나는 김철호 1중대장과 2중대장이 서로 살가워질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 기수 위의 선배 중에서 사교성이 좋아 늘 많은 친구와 함께 다녔던 김철환 1중대장은 2중대장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육사 졸업 후 헤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충성대대에서였다.
2중대장으로 발령받은 충성대대에 김철환 1중대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2중대장의 얼굴을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한 김철환 1중대장이 무안하다 못해 미안할 정도였다.
이후 2중대장은 김철환 1중대장을 닮으려 노력했다. 그냥 혼자서 목표로 삼았다면 좋았겠지만 워낙에 티 나게 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2중대장에게 리틀 김철환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처음에는 그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김철환 1중대장도 2중대장이 군인 집안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움찔 놀라고 말았다.
김철환 1중대장의 장인도 군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군인들이 군인 집안 출신 여자와 결혼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김철환 1중대장은 2중대장을 만날 때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2중대장은 김철환 1중대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의도로 김철환 1중대장을 본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육사 시절 김철환 1중대장은 본받을 만한 선배였고 따르고 싶은 선배였다.
김철환 1중대장의 영향으로 생각에도 없던 군 간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랑도 하지 않은 여자와 무작정 결혼한 건 결코 아니었다.
비록 신혼 때만 못하긴 해도 아내와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고.
어쨌거나 2중대장은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는 김철환 1중대장의 1중대와 축구 시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광이었다.
그래서 딱히 투쟁심이 생기지 않았다. 2중대보다는 1중대가 잘하는 게 당연하고 모양새도 사는 만큼 가능하다면 1중대에게 그냥 져 주고 싶었다.
하지만 2중대 축구팀 감독을 맡은 3소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에는 무조건 이긴다, 무조건!”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독려한 뒤 3소대장이 2중대 축구팀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2중대장에게 다가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대장님, 준비 확실하게 했습니다. 오늘 기필코 1중대를 박살 내겠습니다!”
그러자 2중대장의 표정이 변했다.
“야, 뭘 박살 내. 전쟁하냐?”
“축구는 총 없는 전쟁이라 배웠습니다!”
“또 누구한테 그런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야?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살살해.”
“네?”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그 순간 3소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중대장님. 또 왜 그러십니까? 우리 목표는 우승 아닙니까.”
“그래, 그래. 우승하면 좋지. 그런데 상대는 1중대잖아. 1중대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스포츠에서 중대 순번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왜 우리만 1중대 체면을 생각해 줘야 합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그리고 같은 군인끼리 우승에 목을 매야겠냐?”
“하아, 중대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 진짜 맥 빠집니다. 중대장님은 2중대의 중대장님이십니다. 1중대 중대장이 아니란 말입니다.”
3소대장은 2중대장이 김철환 1중대장을 극진히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내심 김철환 1중대장의 인품에 반했으니 2중대장을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공과 사는 좀 구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2중대장은 그런 3소대장의 진심을 오해했다.
“그냥 솔직해지자. 너 상대가 오상진이라서 꼭 이기고 싶은 거 아니야?”
“여기서 갑자기 오 소위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갑자기는 뭐가 갑자기야? 너 오상진 얘기만 나오면 핏대 세우잖아. 안 그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김철환 1중대장과 2중대장이 서로 친분이 있는 것처럼 3소대장과 오상진도 초면이 아니었다.
사실 3소대장과 오상진은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다. 하지만 김철환 1중대장과 2중대장처럼 서로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3소대장이 일방적으로 오상진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오상진을 싫어하는 건 비단 3소대장만이 아니었다. 육사 동기 중 오상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만큼 육사 시절 오상진은 비호감의 절정이었다. 잘난 머리 하나 믿고 어찌나 설쳐대는지 누구 하나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오상진이 집안 형편 때문에 미친 듯이 공부에만 몰두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가정 형편 어려운 동기들은 오상진 말고도 많았지만 그중 누구도 오상진처럼 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독하게 굴지 않았다.
그래서 오상진과 같이 충성 대대에 왔을 때 3소대장은 오상진이 걱정스러웠다.
육사와 충성 대대는 다른데 과연 오상진이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오상진이 절대로 부대에 적응 못 할 줄 알았다.
초반만 하더라도 3소대장의 생각대로였다.
사람 좋은 김철환 1중대장을 만나 겨우겨우 버텼을 뿐 소대장으로서 오상진의 평판은 빵점에 가까웠다.
다른 소대장들과는 일찌감치 척을 지고 소대 병사들에게 무시나 당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달라지더니 생판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소대 내 폭력 행위를 근절했다고 하질 않나 대민 봉사에 가서 멧돼지를 잡았다고 하질 않나.
새로 온 대대장 앞에서 구토를 할 때까지만 해도 오상진도 끝났다고 봤는데 갑자기 충성대대의 스타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오상진을 대신해 1중대로 자리를 옮기겠다는 3소대장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물론 부대를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상진과 동기에 소대장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왔던 만큼 오상진의 자리가 비게 된다면 자신이 옮겨 갈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는데 오상진이 갑자기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김철환 1중대장의 라인을 타보겠다는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허풍쟁이가 됐다는 점이다.
“오 소위요? 글쎄요. 오 소위가 많이 까다롭긴 하죠. 대인 관계가 썩 좋은 편도 아닙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다. 솔직히 공부는 좀 했을지 모르지만 체력은 저보다 약할걸요.”
부임 초반에 누군가 오상진에 대해 물으면 3소대장은 보란 듯이 오상진을 깎아내렸다.
실제로 오상진이 학업 성적이 우수해 교수들의 총애를 받았을 뿐 기본 실력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설사 오상진이 따지듯 찾아온다면 모두의 앞에서 오상진과 제대로 한 판 붙어볼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오상진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면서 그전에 내뱉었던 말들이 화살처럼 3소대장에게로 되돌아왔다.
뒤늦게 친해서 한 말이라고 둘러댔지만 그마저도 오해를 샀다.
친구가 잘되는 게 눈꼴 시려서 시기 질투를 했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와, 진짜 육사 시절로 돌아가서 다 보여줄 수도 없고.”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3소대장은 억울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준결승 전 상대가 오상진이 키웠다는 1중대 축구부라는 사실을 알고 쾌재를 내질렀다.
이번 기회에 오상진과 모든 악연을 끊는다.
이것이 3소대장의 계획이었다.
‘각오는 됐겠지, 오상진.’
3소대장이 고개를 홱 돌려 오상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것 같던 오상진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김철환 1중대장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와, 저 가증스러운 새끼. 이렇게 날 무시한다 이거지? 두고 봐라. 넌 오늘 내가 무조건 밟는다. 너는 진짜 이긴다.”
3소대장은 혼잣말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4.
잠시 후 1중대와 2중대 간의 축구 준결승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골은 2중대가 먼저 터뜨렸다.
전반 15분이 지난 시점에서 미드필더 쪽에서 혼전 상황이 벌어졌는데 하영운 일병이 찬 공이 쌍둥이인 하영진 일병의 등을 맞고 우연히 2중대 공격수 앞에 떨어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2중대 공격수가 공을 골대 구석으로 차 넣으면서 선취점을 올렸다.
“그렇지! 잘했어!”
그토록 기다리던 첫 골이 들어가자 3소대장은 월드컵 때 히동구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기뻐했다.
반면 2중대장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김철환 1중대장 체면이 있는데 선취골을 넣어 버렸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중대장이 슬쩍 고개를 돌려 김철환 1중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때마침 김철환 1중대장 역시도 2중대장을 바라봤다.
2중대장은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김철환 1중대장이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저 친구는 골 하나 가지고 뭐가 저리도 미안하다고 저러는지.”
“왜 그러십니까?”
옆에 있던 오상진이 물었다.
“2중대장 말이야. 한 골 넣었다고 저 미안한 표정 짓는 것 봐.”
“그냥 중대장님하고 눈이 마주쳐서 고개 끄덕인 거 아닙니까?”
“아니야. 내가 저 친구 성격을 좀 알아. 완전 착해 빠져서, 저 성격으로 제대로 진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상진아.”
“네.”
“너 저기 박 소위하고는 사이가 어때? 별로야?”
“박 소위 말입니까?”
오상진의 시선이 아직까지 첫 골의 희열에 빠져 있는 3소대장 박 소위에게 향했다. 공교롭게도 3소대장은 오상진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아, 동기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 너희 둘이 동기인 줄은 아는데 사이가 어땠냐는 이야기야.”
“솔직히 말씀드립니까?”
“그럼 솔직히 말해야지. 중대장한테 거짓말할래?”
“육사 시절에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오상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왜?”
“아시지 않습니까. 집안 형편도 있고 해서 공부만 악착같이 했습니다. 솔직히 친구 사귈 틈도 없었습니다. 그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고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지 뭘 그렇게 독하게 살았어? 하긴 뭐 이해는 간다. 집안 좀 살고 연줄 좀 있고 하는 놈들이야 육사 시절이 즐겁지. 그렇지 않은 애들은 이 악물고 공부밖에 할 수 없었겠지. 내 친구 놈 중에서도 그런 놈이 있어. 에이, 빌어먹을 놈. 연락 한 통이 없네. 아무튼 그렇게 지내면 알게 모르게 미운털이 박히게 마련이고.”
찌질한 과거조차 너그럽게 포용해주는 김철환 1중대장의 모습에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중대장님은 어떠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