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3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5)
김일도 상병이 씩 웃었다.
물론 수적 우위를 이용해 계속 두드리다 보면 한 골 정도는 넣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겨봐야 오늘 당한 것에 대한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 발등에 도끼를 찍게 만들고 싶었다.
“정확한 계획이 뭐야?”
“이 병장님의 멋진 드리블로 파울을 하게 만들어야죠. 어차피 심판은 저희 편 아닙니까.”
“그래? 오케이. 알았다.”
그렇게 작전을 주고받은 꾀돌이 김일도 상병이 이번에는 작전 장교에게 다가갔다.
“저기 차 중위님.”
“왜?”
“혹시 축구에 몰수패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자 차 중위가 피식 웃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늘 경기에 그 규정 적용됩니까?”
“너는 내가 왜 카드를 남발했다고 생각해?”
“서, 설마……?”
“그래. 난 이런 더러운 축구 용납 못 한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
“알겠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난 이제부터 너만 보겠다.”
“알겠습니다.”
김일도 상병이 확답을 받은 후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공을 건네받은 후 화려한 드리블을 선보였다.
작전대로 이근우 병장이 적진 한가운데서 움직였다. 하지만 김일도 상병은 패스를 하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근우 상병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자신이 모든 걸 끝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새끼들아 막아!”
김일도 상병이 순식간에 수비수 하나를 제치고 들어오자 후방에 있던 상병이 거칠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화기중대 일병 하나가 김일도 상병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일병을 김일도 상병이 가볍게 제치자 당황한 일병이 팔꿈치를 휘둘러 김일도 상병의 턱을 그대로 쳐버렸다.
“으악!”
김일도 상병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그러고는 턱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어, 어어!”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일병이 김일도 상병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삐이이이이익!
그보다 먼저 작전 장교가 휘슬을 불며 달려왔다.
그리고 팔꿈치로 가격한 일병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레드카드를 빼 들었다.
“퇴장!”
“저, 저는……!”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네.”
작전장교의 박력에 눌린 일병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연병장 밖으로 나갔을 때.
삐빅. 삐비빅!
작전 장교가 다시 휘슬을 불며 경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경기 끝! 화기중대 5명 퇴장으로 몰수패! 1중대 승리!”
그 소리를 들은 화기중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몰수패? 그런 게 있어?”
“저도 얼핏 들어보긴 했는데 있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진즉 말했어야지! 이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김철환 1중대장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터라 감히 작전장교에게 따져 묻지 못했다.
그런 화기중대장을 보며 김철환 1중대장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무식하게 덤벼, 덤비길. 설마 축구가 힘으로 되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사이 오상진이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1중대 선수들을 반겼다.
“다들 고생들 했다.”
“저희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진짜 축구를 한 건지 전투를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들 볼 면목이 없다.”
오상진은 괜히 병사들 볼 면목이 없었다. 신성한 스포츠에 군대 내 정치가 얽혀 버렸으니 꼭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1중대 병사들은 괜찮다며 오히려 오상진을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기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소대장님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소대장님의 정강이 보호대! 이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래, 어쨌든 한고비 넘겼으니까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준결승 상대는 아마도 2중대일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 몸 잘 추스르자.”
“네.”
“그리고 부상자가 있으면 즉각 소대장에게 말하고!”
“넵!”
그렇게 8강전 첫 번째 경기는 너무나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날 저녁 이대우 3중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몰수패가 뭐야. 몰수패가!”
“저도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길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몰수패라니. 처음에 거짓말 하는 줄 알았습니다.”
“혹시 작전장교가 1중대하고 편 먹은 거 아냐?”
“저도 혹시나 싶어 알아봤는데 작전 장교는 비교적 중립적으로 심판을 본 것 같았습니다. 화기중대 애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파울을 했다고 합니다.”
“티 안 나게 적당히 좀 하라니까.”
“화기중대장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좀 오버한 거 같습니다.”
“그보다 1중대 상황은 어때?”
3중대장이 넌지시 물었다. 애당초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1중대의 전력 약화였다.
하지만 적진을 정탐하고 온 5중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씩 다치기는 했지만 경기에 못 뛸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에이, 젠장! 육회값만 버렸네.”
“그러게 말입니다.”
“하아. 5중대장.”
“네.”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 술이나 한잔하지.”
그러자 5중대장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저 오늘 당직사령입니다.”
“네가 당직이야? 하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찜찜한 기분을 술로 달래려 했던 이대우 3중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바꿨다.
“잠깐만. 야, 너 나랑 바꾸자.”
“네?”
“내가 할게, 당직.”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냥 내가 할 테니까. 오늘은 푹 쉬어.”
“아, 알겠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5중대장을 보내고 이대우 3중대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 오늘 걸리기만 해.”
이대우 3중대장은 빠득 이를 갈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1중대장을 탈탈 털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때마침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근우 병장님. 다 발랐습니다.”
“야, 꼼꼼히 발랐어?”
“네. 세 번씩 덧칠해서 발랐지 말입니다.”
“근데 왜 계속 아프지?”
“군의관님 말이 사나흘은 쑤실 거라 했습니다.”
“약 주고 등 돌려. 너도 발라 줄 테니까.”
“그런데 이근우 병장님.”
“응?”
“오늘 정말 화기중대 꼴사납지 않았습니까?”
화기중대 이야기가 나오자 이대우 3중대장이 괄약근을 움찔 떨었다.
순간 퍼억 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지만 다행히도 밖에서 떠드는 병사들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맞아! 내 살다 살다 그런 병신 짓은 처음 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몰수패를 당하냐? 안 그래?”
“몰수패 규정을 아예 몰랐던 것 같은데 아닙니까?”
“아까 표정 못 봤냐? 다들 넋 나간 거. 진짜 멍청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축구 시합에 출전했던 1중대 선수들인 모양이었다.
‘아주 기고만장이고만.’
이대우 3중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근엄하게 나가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아픈 배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터라 그럴 수 없다는 게 한스럽기만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밖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이근우 병장님. 우리 결승전 상대는 될 거 같습니까?”
이제 8강전이 끝났을 뿐이건만 벌써부터 1중대가 결승전에 올라간 것처럼 말했다.
“글쎄다. 아마 3중대가 아닐까?”
순간 이대우 3중대장의 눈가를 타고 웃음이 번졌다.
비록 꼴 보기 싫은 1중대 축구 선수이긴 하지만 축구 보는 안목은 가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병사는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솔직히 저는 3중대 별로입니다. 잘한다는 생각도 안 듭니다.”
‘뭣이?’
“누가 뭐래? 나도 3중대 싫어. 그래도 결승전 때 3중대가 올라와야 우리가 복수할 거 아니냐?”
“네? 무슨 복수 말입니까?”
“아, 새끼! 전에 우리 시가전 전술 훈련 때 말이야.”
“아…….”
“그때 3중대가 양아치 짓거리해서 우리가 졌잖아.”
‘야, 양아치!’
순간 이대우 3중대장이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 덩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어? 그런 겁니까?”
“너 소문 못 들었어? 실력으로 진 게 아니라 3중대에서 장난쳐서 진 거야.”
“어쩐지. 3중대는 우리 1중대 밑이었는데 무슨 일로 잘하나 싶었습니다.”
‘이 자식들이……!’
“야. 거기 3중대장도 장난 아니야. 만날 뒤에서 그런 짓거리만 한데.”
“정말입니까?”
“딱 보면 모르겠냐? 야비하게 생겼잖아. 안 그래?”
“하긴. 좀 그렇지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던 병사들이 볼일을 마친 듯 화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5분쯤 지나서야 이대우 3중대장도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뭐? 내 얼굴이 어쩌고 어째?”
손을 씻던 이대우 3중대장이 거울을 봤다.
누가 봐도 남자답게 참 잘생긴 얼굴인데 야비하다니.
뒤에서 그런 짓만 하고 다닌다니!
일개 병사들이 뭣도 모르고 떠드는 소리라고 웃어넘기기에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1중대장. 그렇게 안 봤는데 병사들 앞에서 내 호박씨를 까고 다녔다 이거지?’
이대우 3중대장이 빠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방금 전 화장실에서 멋대로 떠들던 녀석들을 붙잡아다가 연병장을 돌리고 싶었지만 중대장 체면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좋아, 점호 때 어디 한번 보자! 오늘 지옥의 점호를 보여주겠다.”
이대우 3중대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렸다.
한편, 화장실을 나온 이근우 병장과 강우석 상병이 내무실에 들어갔다. 그때 박가람 일병이 말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보면 모르냐? 화장실이지.”
“와아, 지금까지 화장실에 있다가 오셨지 말입니다.”
“왜 그래?”
“저 조금 전에 나가고 곧바로 3중대장님 화장실에 들어가셨지 말입니다.”
“화장실에? 정말이야?”
“네!”
“혹시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 하셨습니까?”
“이상한 소리?”
순간 이근우 병장과 강우석 상병이 서로 쳐다봤다.
“설마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아마도 들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이 씨! X됐네.”
그 순간 이근우 병장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렸다.
“가람아.”
“일병 박가람!”
“오늘 당직사령 누군지 알아봐라.”
“네, 알겠습니다.”
박가람 일병이 나가고 이근우 병장은 초조했다.
“아이 씨, 제발 아니길 빌어야 하는데…….”
잠시 후 박가람 일병이 오고 이근우 병장이 급히 물었다.
“그래, 누구래?”
“3중대장이라고 합니다.”
“뭐? 시발! 진짜 X됐다. 원래 오늘 3중대장이었냐?”
“아뇨, 5중대장이랑 바꿨다고 합니다.”
“아놔, 이를 어쩌냐!”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왜 그래? 아까 화장실에서 3중대장 열심히 깠는데 다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이러지.”
“하아. 이 병장님. 또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 이놈의 입이 방정인 걸 어째?”
“후우.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강우석 상병도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이근우 병장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면 이미 점호 시간에 뭔가 있을 것 같았다.
이근우 병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야, 너희들 오늘 청소 제대로 해야겠다. 하나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