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1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3)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화기중대장과 달리 김철환 1중대장은 평소 잘 안 하던 아부까지 섞어 가며 작전장교를 반겼다.
그러자 애써 근엄한 컨셉트를 유지했던 작전 장교의 표정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김철환 1중대장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차 중위. 진짜 심판처럼 제대로 할 거지?”
“물론입니다.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도 준비했습니다.”
작전장교가 뒷주머니에서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꺼내 보였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조잡하게 색깔만 맞췄겠지만 준비성이 남다르기로 유명한 작전 장교는 실제 축구 심판들이 쓰는 카드를 공수해 왔다.
“오호, 준비 많이 했구먼.”
김철환 1중대장이 혀를 내둘렀다. 오상진이 시켜서 억지로 작전장교를 칭찬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오상진은 오늘 경기의 승패가 심판에게 달렸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상진이도 다 생각이 있겠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김철환 1중대장이 작전장교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그러자 작전장교가 움찔 놀라며 김철환 1중대장을 바라봤다.
그런 작전장교에게 김철환 1중대장이 연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난 말이야. 오늘 차 중위가 심판으로 나와서 너무 좋아.”
“네?”
“차 중위야말로 우리 부대에서 공평무사의 표본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축구 시합만큼은 우리 차 중위가 심판을 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감사하지. 아무튼 오늘 시합, 공정하게 심판을 봐줄 거라 믿어도 되는 거지?”
순간 작전장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확실하게 심판을 보겠습니다.”
“그래. 차 중위만 믿어.”
힘든 연기를 끝낸 김철환 1중대장이 고개를 돌려 오상진을 바라봤다.
‘됐냐, 인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꼭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김철환 1중대장에게 오상진은 슬쩍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잘하셨습니다. 중대장님. 차 중위님의 마음을 얻었으니까 이제 오늘 경기는 문제없을 겁니다.’
양 중대장과 인사를 마친 차 중위가 연병장 중앙으로 가자 양 팀 선수들도 자리를 잡았다.
“자자, 페어플레이다. 만약 거칠게 나오면 경고야. 이미 옐로카드랑 레드카드 준비되어 있다.”
간이로 그려 놓은 중앙선에 공을 내려놓으며 차 중위가 으름장을 놓았다.
군대 축구에서 무슨 심판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경기는 단순한 군대스리가가 아니라 올해 충성 대대 최고의 축구 중대를 가리는 예선전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기 축구마냥 눈 가리고 아웅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준비해.”
선공을 맡은 화기중대 선수들에게 대기 사인을 준 뒤 작전장교가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그리고 막 호루라기를 불려던 찰나.
“가자!”
성격 급한 화기중대 공격수들이 공을 건드려 버렸다.
그 순간 작전장교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삐익! 삐익!
갑작스러운 호각 소리에 화기중대 선수들이 공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파울입니까?”
“야! 너 뭐야?”
“네? 뭐가 말입니까?”
“내가 휘슬 안 불었잖아! 그런데 왜 시작해?”
“네? 시작한 거 아니었습니까?”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해?”
“아, 전 부신 줄 알았습니다.”
공을 건드렸던 화기중대의 상병 하나가 장난스럽게 받아넘겼다.
내일모레면 병장이 되는 처지에 작전장교랍시고 심판 흉내 내는 꼴이 우스웠던 것이다.
“야! 시작 안 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작전장교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자 상병은 애꿎은 일병에게 화를 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일병이 고참과 작전장교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너머에 가려진 작전장교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한편,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화기중대장도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저런 거로 휘슬을 불고 난리야.”
경기가 시작할 것 같으면 일단 허를 찌르라고 지시한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만약 그대로 경기가 진행됐다면 1중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선취골을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치미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화기중대장이 애써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면 김철환 1중대장은 경기 시작부터 울린 호각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쟤들 뭐냐? 동네 축구하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어째 분위기가 싸한데 괜찮겠어?”
“걱정 마십시오. 선수들에게는 휘둘리지 말라고 미리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공을 차는 걸 선호하진 않지만 김철환 1중대장도 자칭 축구 마니아였다. 당연하게도 전후반 첫 5분에 실점이 가장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행히 작전장교가 경기를 끊었으니 망정이지 만에 하나 그대로 경기가 진행됐다가 골을 먹었다면?
아마 1중대는 전반 내내 역전을 하기 위해 몇 배로 뛰어다니며 고생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상진은 크게 걱정할 게 없다는 반응이었다.
화기중대장이 3중대장과 손을 잡은 순간, 그 역시도 새로운 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이다.
박중근 하사의 문자를 받은 다음 날, 오상진은 홀로 작전과를 찾았다.
“과장님.”
“어? 오 소위. 무슨 일이야? 나한테 볼 일 있어?”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부탁? 무슨 부탁인데?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소위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돈 빌려 달라는 거랑 진급시켜 달라는 거 빼고 다 들어줄게. 말만 해.”
곽부용 작전과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상진 덕분에 부대 평판이 좋아져서일까. 그도 한종태 대대장 이상으로 오상진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오상진도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친근하게 안부를 물어봐 주는데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축구 말입니다.”
“축구? 아, 대진이 맘에 안 들어? 하긴 예선 첫 경기가 화기중대지? 거긴 무식한 놈들이 많아서 쉽지 않을 거야.”
오상진이 축구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곽부용 작전과장이 넘겨짚듯 말했다.
하지만 오상진은 대진을 따질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면 대진표가 나왔을 때 일찌감치 불만을 제기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 축구 시합 때 심판을 차 중위님께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차 중위가? 왜? 예선은 소대장들끼리 돌아가며 보기로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중대 명예가 걸린 종목인데 소대장들이 돌아가며 보는 것보다는 차 중위님이 심판을 보시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 중위님이라면 심판을 아주 공정하게 봐주실 거 같고요.”
“하긴. 차 중위가 그런 쪽으로는 지나치게 깐깐한 구석이 있지. 그렇다고 내가 볼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알았어. 내가 말해 놓을게. 생각해 보니까 차 중위라면 나쁘지 않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감사는 내가 해야지.”
“……네?”
“자네 덕분에 내가 빨리 소령을 달게 되었잖아.”
오상진 덕분에 진급에 가산점을 받은 건 한종태 대대장과 김철환 1중대장만이 아니었다.
곽부용 작전과장도 부대 분위기가 좋다는 이유로 예정보다 일찍 진급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달이시죠?”
“그래.”
곽부용 작전과장이 피식 웃었다. 처음 군 생활을 시작했을 땐 투스타까진 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고생 고생을 해가며 소령을 달고 보니 군대에서 버틴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아무튼 나중에 회식 한번 하자고.”
“넵!”
오상진의 바람대로 작전장교가 예선전을 비롯해 모든 축구 경기의 심판으로 배정됐다. 그리고 방금 전 호각으로 화기중대의 잔꾀를 무력화시키며 제대로 된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 제비뽑기 때 알아봤지만 역시 차 중위님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기를 끝까지 지켜봐야지.’
오상진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작전장교가 깐깐하게 심판을 본다고 해서 화기중대장과 3중대장 간의 밀약이 깨질 것 같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쾅!
“으악!”
경기 재개 5분 만에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누군가 다리를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저, 저 자식이!”
김철환 1중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중대 박가람 일병이 공을 몰고 가는데 화기중대 한 명이 과감하게 태클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것도 공이 아닌 정확하게 상대의 발을 향한 거친 태클이었다.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니 저 정도면 고의성이 다분하다고 봐야 했다.
군대스리가였다면 그냥 말 몇 마디로 끝났을 상황. 하지만.
삐이이익!
차 중위는 곧바로 휘슬을 불며 상황 정리에 나섰다.
“야, 너 뭐야!”
태클을 건 화기중대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거 엄살입니다. 저 그냥 정상적으로 태클한 것 밖에 없습니다.”
“뭐? 엄살? 내 눈이 호구냐. 너 발 높게 해서 정확하게 다리 노리는 것 봤는데!”
“…….”
“너 이번에 경고야. 다음에 또 이러면 옐로카드야. 너희들도 똑바로 들어!”
차 중위가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군대 축구라고 하지만 상대를 부상입힐 목적으로 태클을 시도하는 건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화기중대 선수 중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없었다.
차 중위가 쓴 웃음을 짓고는 넘어진 1중대원을 보았다.
“넌 괜찮아?”
“네.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박가람 일병이 정강이를 쓰윽 만졌다. 그냥 맨살이었다면 어딘가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사전에 정강이 보호대를 찬 덕분에 욱신거리긴 해도 참을 만했다.
‘와, 우리 소대장님 말씀 듣고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다리 부러질 뻔했네.’
박가람 일병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강유석 상병이 달려와 물었다.
“박가람.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화기중대 녀석들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래? 알았다. 아무튼 경기하는 데는 이상 없는 거지?”
“네.”
“좋아, 소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최대한 충돌은 피하고 몸조심하자.”
“넵.”
“자자, 다시 자리 잡고 시작하자.”
잠깐 멈췄던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미드필더 진영에서 다시 1중대가 공을 잡았다.
그러자 화기중대 선수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달려와 거친 태클을 시도했다.
“윽!”
사전에 대비하고 있던 조규식 일병이 몸을 피하며 충격을 최소화했지만.
삐이이익!
작전장교의 휘슬은 여지없이 울렸다.
태클을 한 화기중대 선수는 잔뜩 억울한 얼굴로 작전장교를 바라봤다.
“야, 내가 경고했지. 한 번만 더 거친 태클 들어가면 경고라고!”
“저 진짜 공 보고 태클했습니다.”
“이 새끼가 내 눈이 호구냐고! 내가 뒤에서 정확하게 봤는데 어디서 시치미야?”
“아닙니다.”
“야, 작전장교인 내가 심판이야. 감히 어디서!”
차 중위는 재빨리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