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40화
16장 지고 싶지 않아(2)
화기중대장이 단언하듯 말했다. 1중대장과 3중대장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예선전에서 1중대에 대패라도 당했다간 한동안 3중대장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우 3중대장이 원하는 건 고작 고춧가루 정도가 아니었다.
“그 고춧가루 얼마나 매운 겁니까? 어차피 예선은 1주일 단위로 치러져서 어지간한 매운맛은 금방 사라질 텐데.”
5중대장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말뜻을 눈치챈 화기중대장이 실실 웃으며 입을 뗐다.
“그럼 얼마나 화끈하게 해드릴까요? 이번 기회에 1중대 놈들 다리 몽둥이를 확 분질러 버릴까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던지 이대우 3중대장은 물론이고 5중대장도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된 거 편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전력상 1중대가 앞서는 편이라 우린 뭘 해도 용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하지만 이대우 3중대장은 물론이고 5중대장도 노골적으로 뭔가를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술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평생 무덤까지 갈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그냥 쉽게 말해서…… 1중대 좀 밟아주십시오.”
화기중대장이 피식 웃었다. 편하게 말 하라는데도 몸을 사리는 걸 보면 똥물에 손을 담그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뭐 제 재량껏 세 놈 정도 출전 못 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죠?”
“그게 가능합니까?”
“저희 애들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같이 튼튼한 거. 축구 하다 보면 넘어지고 걷어차이고 하는 거야 일상이죠, 뭐. 그러다 다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안 그렇습니까?”
“하긴. 생각해 보니 군대 축구가 다 그렇죠.”
“게다가 1중대도 들어보니까 공격수들이 하나같이 상병 이상이던데 그런 놈들은 좀만 다쳐도 드러누울 겁니다. 막말로 제대가 코앞인데 축구 하다 병신 되고 싶겠습니까?”
“하하. 화기중대장 말이 맞습니다.”
5중대장이 껄껄 웃으며 화기중대장의 말을 받았다. 척하면 척이랬다고 알아서 해주겠다는 화기중대장이 그저 든든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대우 3중대장은 확실히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긴 한데…… 보안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1중대장이 알면 지난번처럼 난리를 칠 테니까요.”
비록 김철환 1중대장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대우 3중대장으로서도 김철환 1중대장과 대놓고 부딪치는 건 부담스러웠다.
3사 출신 대대장이 새로 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육사 출신 대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김철환 1중대장의 총애가 자신에게 옮겨 올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난 전술 훈련으로 체면치레를 했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3중대의 자존심을 세워 보고 싶은 게 이대우 3중대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화기중대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뭐, 1중대장이 난리를 치면 난리 치라고 하죠. 군대 축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다 보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상처가 나고 그렇지. 안 그럼 군대를 오지 말던가. 안 그렇습니까?”
ROTC 출신인 화기중대장은 이번 장기 복무가 끝나면 미련 없이 제대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딱히 진급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우리 화기중대장. 너무 화끈한 거 아닙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제대가 멀지 않은 거. 솔직히 이제 중대 정치 같은 건 신물이 납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화기중대장을 보며 이대우 3중대장과 5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축구는 알아서…….”
“네네, 걱정 마십시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신에 알죠? 축구 끝나고 제대로 한턱내는 겁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자자, 한 잔 받으시죠.”
“네.”
화기중대장이 술을 받은 후 곧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오늘따라 술이 다네. 달아.”
그 시각.
관사에서 쉬고 있던 오상진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확인해 보니 박중근 하사에게 온 문자였다.
-3중대장, 5중대장 화기중대장과 술 먹는 중. 화기중대장에게 한우 육회 대접. 뭔가 있음!
오상진이 문자를 확인하고 바로 박중근 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하사. 이게 무슨 문자입니까?”
-아, 그거요? 아는 사람한테 받은 문자를 그대로 전달한 겁니다.
“아는 사람이요?”
-그게 화기중대에 아는 동생이 부사관으로 있습니다. 그 부사관이 알려준 겁니다.
“그래요?”
오상진이 피식 웃었다. 마당발인 김도진 중사와 친해서일까. 박중근 하사도 제법 아는 사람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박중근 하사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렇게 셋이 만났다는 건 분명 뭔가가 있다는 얘기인데요.
“그냥 친한 분들끼리 한 잔씩 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화기중대장과 5중대장이 따로 어울린 적은 없다고 합니다.
“흠……. 그렇다면 정말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럼 좀 더 알아볼까요?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쨌든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박 하사님.”
-에이, 감사는요. 저도 축구부 코치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 그래서 고맙다는 겁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소대장님.
“그래요. 내일 봅시다, 박 하사.”
-넵!
오상진은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문자 내용을 살폈다. 워낙에 간략한 내용이라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곱씹고 곱씹을수록 화기중대장이 술판에 끼어 있다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오상진은 침대에 누워 화기중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일단 화기중대는 인원이 적었다.
과거 대대장 시절에도 적은 인원 때문에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거 자체에 대한 화기중대의 불만이 상당했다.
그땐 재량껏 화기중대의 편의를 봐줬지만 한종태 대대장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축구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축구가 체육대회의 꽃이라고 하지만 축구 한 번 이겨보겠다고 다른 종목 전체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 때도 화기중대는 구기 종목을 대충대충 했지. 반면 힘을 쓰는 씨름이나, 줄다리기는 악착같이 우승하려고 들었고.’
오상진은 거기에 3중대장과 5중대장을 끼워 넣었다.
일단 5중대장은 3중대장이 불러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5중대장이 3중대장의 충실한 참모 노릇을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문제는 3중대와 1중대가 예선에서 만날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전술 훈련 때 제비뽑기로 1중대와 3중대를 붙여 놓아서일까.
이번에는 과거 토너먼트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대진표를 짰다.
대진상 1중대가 3중대를 만나려면 결승에 올라와야 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 3중대가 경계해야 할 적은 1중대가 아니라 예선에서 만나게 될 4중대와 5중대, 6중대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하필 오늘 화기중대장을 불러냈다.
‘이유가 뭘까?’
잠시 고심하던 오상진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우리 축구 예선 첫 상대가 화기중대이긴 한데. 설마 그것 때문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아무래도 불안한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오상진은 3중대에게 이로운 시나리오까지 깨닫게 됐다.
만약에 화기중대가 거친 플레이로 주전 선수들을 다치게 한다면? 소수 정예로 손발을 맞춰 왔던 1중대 입장에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상진은 요 며칠 지켜본 화기중대의 연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연습 공간이 협소해서 저러나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디체크는 물론이고, 태클들을 주로 연습하고 있었다.
“설마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이럴 줄 알고 화기중대장님이 따로 연습을 주문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화기중대가 3중대에 붙었다면 1중대에게 이로울 게 없었다.
“아무래도 불안해. 만약에 정말로 화기중대가 우리 애들 망치려고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결승에 올라간다 해도 승산이 없어.”
오상진은 잠시 해결책을 궁리했다. 하지만 마땅한 묘안이 없었다. 저쪽에서 이대우 3중대장이 움직였으니 이쪽에서 김철환 1중대장이 나설 수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했다가 일만 키울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저쪽이 어찌 나올지 아는데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일 작전과장님을 만나 뵈어야겠어.”
장고 끝에 오상진은 차선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토요일이 찾아왔다.
2.
2주간의 연습 기간을 거쳐 오늘부터 체육대회 축구 예선이 시작됐다.
주말을 통해 치러지는 이번 예선전의 첫 경기는 1중대와 화기중대가 맡았다.
선수들이 연병장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이 김철환 1중대장과 화기중대장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1중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화기중대장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처세술의 달인답게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김철환 1중대장에게 깍듯하게 굴었다.
김철환 1중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잘해봅시다.”
김철환 1중대장이 내민 손을 맞잡던 화기중대장의 시선이 1중대 선수들을 향했다.
연병장에 나올 땐 긴가민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따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허, 설마 유니폼까지 맞추신 겁니까? 언제요?”
“아하, 저거요. 그래도 축구팀인데 한 팀인 것처럼은 보여야 할 것 같아서요.”
김철환 1중대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오상진의 작품이긴 하지만 군대 트레이닝복이 아닌 유니폼을 갖춰 입은 1중대 선수들을 보니 절로 목에 힘이 들어갔다.
화기중대원들도 부러운 눈으로 1중대 선수들을 바라봤다.
“와씨! 유니폼 봐라. 죽이네.”
“쟤들 뭐냐? 국대 뛰냐?”
“무슨 군대 축구에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나오냐.”
“그래도 멋있지 않습니까? 난 멋있는데…….”
“야, 쫄지 마! 장비만 좋으면 뭐해? 실력이 좋아야지.”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얼핏 들었는데 1중대 쟤들 실력도 좋다고 합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지! 우린 화기중대다! 힘으로는 절대 안 밀려!”
그때 부대 중앙 입구로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작전장교가 나왔다.
호루라기를 목에 걸치고 나온 것으로 보아 심판 자격으로 나온 것 같았다.
화기중대장은 작전장교를 보며 말했다.
“심판이야?”
“네.”
“그래, 대충대충 하자고.”
화기중대장이 대충대충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체육대회라곤 하지만 예선인데 벌써부터 힘 뺄 필요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네.”
작전장교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철환 1중대장에게 갔다.
“이야. 차 중위? 이렇게 입고 나오니까 진짜 딴 사람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