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39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24)
한소희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오상진과 함께한 즐거운 데이트였다. 그래서 이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불청객 때문에 흥이 다 깨버렸다.
더 웃긴 건 사내가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20대 중반 쯤 보이는 여자가 날선 눈으로 이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느낌상 여자 친구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이런 곳에 단둘이 와서 술을 마실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닐 터.
그런데도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 남자의 자신감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여자는 뭐죠?”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아는 여자니까요.”
“저 여자한테는 절 아는 여자라고 말했겠네요?”
“하하. 그냥 지인이라고만 했습니다. 괜한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제 딴에는 배려라고 떠들지만 한소희는 그조차 역겹게 느껴졌다.
결국 나쁜 남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자기합리화일 뿐이니까.
그리고 남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됐으니까 그만 꺼져 주실래요?”
한소희가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이런 류의 남자들을 자주 접해 봐서 아는데 대충 말하면 튕기는 줄 알고 더 질척거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한소희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지 남자가 약간 민망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남자가 돌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소희에게 갔다. 그리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언제 연락 한 번 주시죠.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꺼져 달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 시간 되실 때 연락 한 번 주십시오.”
“제가 왜요?”
“명함은 테이블에 놓겠습니다.”
“뭐래…….”
한소희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고 그사이 사내가 명함을 내려놓고는 사라졌다.
그때 오상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 있어요?”
굳어진 한소희의 얼굴을 보며 오상진이 물었다. 그러자 한소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명함은 뭐예요?”
“몰라요. 어떤 이상한 사람이 놓고 갔는데 신경 쓰지 마요.”
“그래요?”
실은 오상진도 화장실에서 나오다 한소희에게 추근대는 사내를 봤다. 그래서 냉큼 나서려고 했는데 한소희가 매몰차게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일단 지켜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소희는 지금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었다.
“우리 그만 가요.”
“그럴까요?”
한소희를 따라 오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슬쩍 명함을 손에 움켜쥐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너 딱 걸렸어.’
와인바를 나서며 오상진이 구석에 앉은 사내를 노려봤다.
그런 오상진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사내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함께 온 여자와 와인잔을 부딪쳤다.
16장 지고 싶지 않아(1)
1.
수요일 저녁.
한적한 고깃집으로 3중대장 이대우 대위와 5중대장이 자리했다.
충성 대대 앞에는 외박을 나온 장병들의 발걸음을 붙잡기 위한 고깃집들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 장사가 잘되는 집은 주로 대로변에 위치해 있는 반면 이 고깃집은 외진 곳에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손님들이 잘 찾지 않았다.
그나마 일부 단골들만으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 고깃집을 단골들이 찾는 이유가 바로 근처 고깃집 중 유일하게 소고기를 판매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드릴까?”
“일단 3인분 내오시고 아까 전화로 이야기한 거 있죠?”
“그거? 준비됐지.”
“내가 신호하면 그때 줘요.”
“알았어.”
3중대장과 주인 사내는 서로 말을 놓을 만큼 살가운 편이었다. 외상은 안 받는다는 주인 사내도 3중대장만큼은 가끔 외상을 허락해 줬고 3중대장도 중대 회식은 꼭 이 식당에 와서 매출을 올려주었다.
주인 사내가 물컵을 내려놓고 사라지자 5중대장이 주위 눈치를 살피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3중대장님. 정말 온다고 합니까?”
“그래, 온다고 했어.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네.”
그때 문이 열리며 화기중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사에서 낮잠이라도 자다 나왔는지 트레이닝복 차림이 지나치게 편해 보였다.
“화기중대장, 여깁니다!”
이대우 3중대장이 손을 흔들었다. 화기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무리 내가 보고 싶어도 그렇지 무슨 수요일부터 부릅니까. 금요일 날 한잔하자니까.”
“금요일 날 보면 너무 티가 나지 않습니까.”
“티 좀 나면 또 어때서요? 우리가 하루 이틀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아무튼 기왕 이렇게 온 거 편하게 술 한잔합시다.”
“그럼 정말로 적당히 합니다?”
“그럽시다. 나도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5중대장이 슬쩍 말했다.
“그래도 3중대장님이 화기중대장을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화기중대장 온다고 소고깃집으로 다 자리를 잡으시고 말입니다.”
“에이, 좋아하긴 뭘 좋아합니까. 여기 3중대장님 단골집인 거 소문 다 났는데요. 그리고 여기 한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였더라? 미국이었나?”
화기중대장이 호들갑스럽게 주변을 살피다 호주산이라 적힌 메뉴판을 보고 씩 웃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오셨네.”
“에이, 호주산이든 한우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이렇게 다 함께 소고기를 먹는 것이 중요하죠. 그리고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3중대장님께서 제대로 쏜다고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5중대장이 슬쩍 이대우 3중대장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이대우 3중대장이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렇지. 그럼. 당연히 한턱내야지.”
“그럼 그땐 한우로 갑니까?”
“그럽시다. 그깟 한우 얼마나 한다고.”
“좋습니다. 그럼 그 말씀 믿고 어디 한번 먹어 볼까요?”
때마침 주인 사내가 소고기를 내왔다.
“제가 굽겠습니다.”
눈치 빠른 5중대장이 집게를 들고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그사이 3중대장이 소주를 까서 화기중대장의 잔을 채워주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3중대장의 극진한 접대가 부담스러울 만했지만 화기중대장은 씩 웃고는 먼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참. 화기중대장이 육회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육회요? 좋아하죠. 없어서 못 먹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3중대장님께서 화기중대장을 위해 특별히 육회까지 주문하셨습니다,”
“육회를요? 이 식당에서 육회를 하나요?”
“그러니까 특별 주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한우입니다.”
“오오, 한우!”
3중대장의 손짓에 주인 사내가 미리 준비한 육회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말이 좋아 한우이지 한우 전문점에서 파는 수준의 육회는 아니었지만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듯 화기중대장은 군침부터 삼켰다.
“3중대장님.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에헤, 또 이런 걸 가지고……. 어서 드십시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화기중대장은 냉큼 육회 접시를 집어 들고는 계란 노른자를 톡 하고 터뜨렸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쓱쓱 비빈 뒤에 입안으로 한입 가득 집어넣었다.
“크윽, 바로 이 맛 아닙니까.”
화기중대장은 생각 이상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잘 먹어도 너무 잘 먹었다. 3중대장과 5중대장의 시선이 절로 화기중대장의 입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화기중대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한 입 해보시겠습니까?”
“아냐, 아냐. 먹어요. 먹어.”
“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정말 맛있나 봅니다.”
“엄청 맛있는 것까진 아닌데 한우라 그런지 육질이 살아 있네요. 또 여기에 우리 3중대장님의 정성이 들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화기중대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육회 한 접시를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귀한 한우 육회까지 준비하신 거로 봐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화기중대장의 시선이 이대우 3중대장에게 향했다. 그러자 5중대장이 슬쩍 이대우 3중대장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대신 입을 열었다.
“저기, 화기중대장.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 토요일부터 축구 예선이죠?”
“오호, 축구? 솔직히 축구나 농구 중 하나일 줄은 알았는데. 축구였습니까?”
“크흠. 눈치채셨습니까?”
“그럼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나왔겠습니까? 그나저나 어디 보자. 생각해 보니까 우리 상대가 1중대네요.”
화기중대장이 빙긋 웃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3중대장이 1중대장과 라이벌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우리가 이번에 1중대를 잡으면 되는 겁니까?”
화기중대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5중대장이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 1중대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야 우린 좋죠.”
1중대가 은밀히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화기중대장이 작심하고 나서서 1중대를 이겨 준다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화기중대장도 축구는 거진 포기한 상태였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우리 중대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아시잖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축구 연습할 시간도 없습니다. 게다가 인원도 적어서 이 종목 저 종목 다 참여하려다 보면 잘하는 애들 돌려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축구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중대와 달리 화기중대의 정원은 30명에 불과했다.
이 중 일부는 농구 대표로 참가하고 일부는 축구 대표, 일부는 족구 대표로 참가해야 하는 데다가 화기중대가 자신 있어 하는 씨름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달리기와 줄다리기까지. 경기 일정이 꼬여 버리기라도 한다면 선수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화기중대장은 일찌감치 축구를 배제했다.
14명이라는 가장 많은 인원을 잡아먹는 축구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을 종목별로 충분히 배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기중대장의 말에 이대우 3중대장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3중대는 어느 종목을 노립니까?”
“솔직히 구기 종목 쪽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씨름이나 줄다리기 정도랄까요.”
화기중대는 81㎜ 박격포를 주 무기로 삼는데 그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화기중대원들 대부분이 힘이 좋은 편이었다.
“줄다리기야 화기중대를 감당할 부대는 없을 테지만, 줄다리기 하나로 종합 우승은 힘들지 않아요?”
“에이, 저희가 무슨 종합 우승입니까. 언감생심 꿈도 안 꾸고 있습니다. 그냥 체면치레할 겸 우승 하나만 하면 됩니다. 지난번에도 줄다리기 우승을 했으니 이번에도 욕심을 내는 상황이고요.”
화기중대장은 역시나 줄다리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씨름도 자신 있긴 하지만 워낙에 변수가 많은 종목이다 보니 우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대우 3중대장이 말했다.
“그럼 이번 축구 예선은 대충 할 생각입니까?”
“이겨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지진 않을 겁니다. 질 때 지더라도 고춧가루는 제대로 뿌려 볼 생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