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38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23)
“흠……. 상진 씨. 혹시 상황극 좋아해요?”
“네?”
“이상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뭐, 저도…… 맞춰줄 수는 있을 거 같고요.”
“하, 하하. 그렇습니까?”
오상진이 멋쩍게 웃으며 잘 구워진 한우를 한소희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한소희가 슬쩍 눈을 흘기고는 고기를 냉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때요?”
“맛있네요.”
“입맛에 맞아요?”
“저 그렇게 까탈스러운 여자 아니거든요?”
한소희가 습관처럼 뾰족하게 굴 때마다 오상진은 고기를 한 점씩 옮겨 주었다.
그렇게 오상진이 먹이고 먹이고 먹이다 보니 한소희는 금세 배가 찼다.
“뭐예요. 아까부터 나만 먹고.”
“그냥 소희 씨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습니다.”
“칫. 그럼 나도 그거 볼래요.”
“……네?”
“상진 씨 먹는 모습이요. 어디 얼마나 잘 먹나 볼까요?”
한소희가 오상진이 들고 있던 집게를 뺏어 들었다.
고깃집에 와서 직접 고기를 구워 본 적은 없다 보니 집게를 잡는 것조차 서툴렀지만 한소희는 오상진을 먹이기 위해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어, 이게 왜 탔지?”
적당히 익는 시간을 예상하지 못해 애꿎은 고기를 홀라당 태우는가 하면.
“상진 씨. 두 점씩 싸 먹어요.”
오상진의 먹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매번 엇박자로 고기를 구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고기 접시가 늘어났으니.
“여기 고기 1인분만 더 주세요!”
“1인분만 더요!”
그렇게 한소희가 고깃집에서 고기를 잘 굽는 법을 자체 터득했을 땐 오상진의 뱃속으로 5인분의 한우가 들어간 상태였다.
“상진 씨. 속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배 부르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하하.”
오상진은 한소희가 무안하지 않게 웃어넘겼다. 빈말이 아니라 한소희가 정성스럽게 구워준 소고기라면 5인분이 아니라 10인분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한소희는 다른 걸 걱정했다.
‘어휴. 바보. 오늘 상진 씨가 사기로 했는데 이렇게 많이 시키면 어쩌자는 거야.’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격까지 착한 건 아니었다.
찌개와 음료까지 포함한 가격은 어림잡아 30만 원 남짓.
군인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상진이 지출하기에는 과한 느낌이 들었다.
‘안 되겠어. 내가 사야지.’
한소희는 오상진보다 먼저 계산대로 가서 섰다.
“제가 계산할게요.”
“오늘은 제가 사기로 했잖습니까.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아닙니다. 이모님. 이걸로 계산 부탁드립니다.”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직원이 오상진이 내민 카드를 받아 들었다.
혹시나 기분 나빠 할까 싶어 오상진이 슬쩍 한소희의 표정을 살피는데 한소희는 정작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 잠깐만요.”
한소희가 직원이 건네준 오상진의 카드를 낚아채 확인을 한 후 뒷면을 봤다. 그곳에 오상진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신용 카드잖아요.”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 카드는…….”
한소희 역시도 이 카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카드가 아닐 텐데요?”
한소희의 말에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 카드 맞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상진 씨 부자에요?”
“그게…… 말이죠.”
오상진은 살짝 난감해했다. 언제고 때가 되면 한소희에게 사실을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하필 신용 카드 때문에 의심을 사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한소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을 보니까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오상진이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한소희 귀에 입을 가져갔다.
“소희 씨만 알고 계십시오.”
“……?”
“저 사실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
만약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일단 의심부터 했겠지만 오상진이라는 남자를 겪어봐서일까. 한소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오상진의 말을 받아들였다.
“정말요?”
“네.”
“그럼 상진 씨 돈 많겠네요.”
“엄청 많지는 않습니다. 그냥 먹고살 정도는 있습니다.”
한소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간단한 한마디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상당했다.
오상진이라는 남자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정략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는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로또에 당첨됐다니!
그 금액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가난한 군인으로는 비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20.
식당을 나선 두 사람은 한소희가 종종 찾는다는 와인바로 향했다.
“분위기 좋은데요?”
“이런 데는 처음이에요?”
“네. TV에서나 봤지 실제 온 적은 처음입니다.”
장교 중에 분위기 좋은 와인바를 애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오상진은 예외였다.
대위를 달고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오상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건 가성비였다. 그런 점에서 술값에 분위기까지 얹어 파는 와인바는 사치이고 낭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막상 한소희와 함께 가 보니 왜 진즉 와인바를 찾지 않았을까 후회마저 들었다.
“주문은 제가 할까요?”
“네. 그렇게 하십시오.”
“혹시 좋아하는 와인 있어요?”
“소희 씨가 좋아하는 걸로 주문하십시오. 저도 그게 좋을 거 같으니까요.”
“암튼 말은 참 잘한다니까.”
테이블에 앉은 한소희가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오상진은 와인이 나오기가 무섭게 마치 술처럼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취해요.”
“하하. 이거 정말 맛있네요.”
“한 잔 더 하실래요?”
“네.”
“대신 이번엔 음미하면서 마셔야 해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오상진은 두 번째 잔부터 한소희와 속도를 맞췄다. 한소희가 술잔을 들 때만 따라 마시고 한소희가 술잔을 내려놓으면 똑같이 술잔을 입에서 떼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생각 이상으로 화기애애해졌다.
“그런데 상진 씨. 우리 너무 사치스럽지 않아요?”
“사치요?”
“먹는 거요. 솔직히 난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하고 싶은데 너무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이러지 않아도 돼요.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오상진이 로또에 당첨됐다는 사실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상진 덕에 호사를 누릴 생각은 없었다.
좋은 곳에서 비싼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 한소희가 오상진을 만나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 좋았기 때문이다.
오상진도 어느 정도 공감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소희 씨에겐 뭘 해드려도 아깝지가 않지만 소희 씨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밥 먹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걸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한소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오상진을 보고 입을 뗐다.
“그런데 로또 말이에요.”
“네.”
“몇 회차에 당첨된 거예요?”
“그게…….”
적당히 둘러대려던 오상진의 눈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소희의 얼굴이 들어왔다.
순간 이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섣부른 거짓말 때문에 이 여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생겼다.
“최근에 로또 기사 보신 적 있으세요?”
“자주는 아니지만 보긴 봤어요. 작은 오빠가 로또 광이거든요. 로또에 당첨만 되면 제대로 사업을 하겠다나 뭐라나. 들어보니까 9회차인가 당첨금이 300억을 넘었다면서요?”
“네. 제가 그때 당첨됐습니다.”
“그래요? 몇 등인데요?”
“제가…… 그 1등입니다.”
“저, 정말요?”
순간 한소희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그녀가 알기로 9회차 2등 당첨자가 4명인데 한 사람당 12억이 넘는 돈을 수령했다고 한다.
3등 당첨자도 천만 원 이상을 받았다.
그래서 최소 3등 정도를 예상했는데 오상진의 입에서 2등도 아니고 1등이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돈은 다 뭐 했어요?”
“아직 제 통장에 있습니다.”
“한 푼도 안 썼어요?”
“어느 정도는 썼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새 집으로 이사도 하고 겸사겸사 가구도 사고. 아, 그리고 중고로 차도 샀습니다.”
“중고로요?”
“어차피 군인이라 자주 타고 다니지 못해서요. 그냥 지인 소개로 괜찮은 중고차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요?”
“그리고…… 소희 씨하고 이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요.”
오상진의 넉살에 한소희도 피식 웃었다. 300억이나 되는 거금에 당첨됐으니 수십억쯤 쓰고 싶은 대로 쓴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오상진은 자신의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오상진을 빤히 바라보던 한소희가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내뱉었다.
“멋있다.”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소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한소희의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오상진의 얼굴에도 흐뭇함이 감돌았다.
그런데……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부작용이 생겼다.
평소 군인 정신으로 억눌렀던 욕망이란 녀석이 자꾸 꿈틀대더니 어느 순간부터 한소희의 가슴 쪽이나 잘록한 허리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안 돼. 정신 차리자.’
오상진이 속으로 중얼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희 씨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오상진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오상진의 행동을 본 한소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냥 봐도 괜찮다니까.”
처음 오상진이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한소희는 기대만큼이나 걱정이 앞섰다. 술에 취해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나. 그래서 오상진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깨지면 어쩌나.
하지만 술이 얼큰히 취한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인내를 보이는 오상진을 보니 남자 하나는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남자라니까.”
한소희는 오상진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때 뒤에서 낯선 남성의 음성이 들려 왔다.
“실례합니다.”
“……? 저요?”
“네? 아까부터 쭉 지켜봐 왔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소희가 나타난 남자의 위아래를 쭉 훑었다. 무슨 명품 가게 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있었다.
생긴 것도 제법 근사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지금까지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던 수많은 남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저 남자 친구랑 같이 왔는데 못 봤어요?”
“아까 그 사람이 남자 친구였습니까?”
“네.”
“이런 말씀 실례지만 그 사람은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뭐래?”
순간 한소희가 울컥하고 성격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은 예상했다는 듯 사내는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여자 보는 눈이 정확한데, 아가씨 같은 분은 저런 남자를 만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런 남자는 아가씨를 감당할 수 없어요.”
남자는 적당히 위해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한소희는 이런 남자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순진한 남자 물어서 공사 칠 생각 말고 자신과 만나자. 그럼 최소한 백 하나쯤은 안겨줄 생각이 있다.
‘하아. 오늘은 어째 조용하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