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34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19)
‘우연이었나?’
의심을 푼 한소희도 뒤늦게 영화에 집중했다. 그러다 처음처럼 몇 차례 팝콘 상자 위에서 오상진과 손이 부딪혔지만 오상진처럼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상진이 팝콘 상자에 손을 뻗길 기다리게 됐다.
주인공이 나오던 장면이 바뀌자 오상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한소희가 한발 먼저 팝콘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상진의 손이 한소희의 손등을 잡자 괜히 심술을 냈다.
“아까부터 왜 계속 타이밍이 겹쳐요?”
“그랬나요?”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글쎄요. 저는 영화를 봤지만 제 손은 소희 씨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뭐래. 암튼 말은 잘한다니까.”
한소희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15.
오상진이 과거로 회귀해 처음으로 본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인공 브루스는 지역 방송국의 뉴스 리포터였다. 입담이 좋은 브루스는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뉴스 형식으로 전하며 이웃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정작 스스로는 별 볼 일 없는 취잿거리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대단치 않은 삶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신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낡은 건물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신이라 자처하는 정체불명의 청소부를 만나게 됐다.
신은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브루스에게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을 나눠줄 테니 얼마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보자고 했다.
이후 신의 능력을 가지게 된 브루스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던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후반에 이르러 자신이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게 진짜 행복임을 깨닫게 된 브루스는 신에게 받은 능력을 포기하고 다시 예전의 지역 리포터로 돌아가게 된다.
오상진은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후 한동안 여운에 휩싸였다. 주인공 브루스가 신을 만났을 때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걸 보니 왠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미디 영화는 별로라며 시큰둥해하던 한소희도 영화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영화 어땠어요?”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소희 씨는요?”
“누가 자꾸 팝콘 대신 제 손을 집어서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요?”
“이런. 그럼 제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까요?”
“농담이에요.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가다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한대훈과 김소희 중위를 만났다.
분명 코미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울었던지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린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저쪽에 가 있어. 오 소위. 금방 올게요~”
한대훈과 김소희 중위는 다시 화장실로 사라졌다.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에는 사람들이 붐벼 시간이 걸릴 것 같았기에 오상진과 한소희는 예매소 근처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예매소에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상진과 한소희가 앉은 테이블 좌우에도 커플들이 앉아 있었는데 얼핏 대화를 엿들어보니 다들 ‘브루스 신이 되다’를 보러 온 것 같았다.
“우리가 본 영화가 인기가 많았나 보네요.”
“요즘 한국 영화 볼만한 게 없잖아요. 주인공이 되게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이기도 하고요.”
“저는 모처럼 괜찮은 영화를 본 기분입니다.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를 왜 모르고 있었나 싶어요.”
“영화를 좋아해요?”
“아, 그게…… 주말의 명화 아시죠? 거기서 나오는 영화들을 좋아했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며칠을 봐야 하지만 영화는 2시간 안에 모든 내용이 다 담겨 있으니까요.”
“말하는 걸 보니까 육사에 가지 않았다면 영화감독이 됐을 거 같은데요?”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앞으로는 시간 내서 영화를 좀 찾아볼 생각입니다.”
과거 오상진의 몇 안 되는 취미 생활 중 하나가 혼자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IPTV가 대중화된 이후로 TV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생긴 취미였다.
하지만 오늘 모처럼 영화를 보고 나니 영화는 역시 영화관에서 보는 게 제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진 씨 하고 같이 영화 보러 다닐 생각이 없는데. 상진 씨는 그럼 누구랑 영화를 보려나?”
“하하. 좀 봐 주십시오. 대신에 코미디 영화는 DVD로 빌려 보겠습니다.”
“농담이에요. 대신 만날 때마다 영화 보러 가는 건 사절이에요. 내 친구가 그러는데 만나서 하던 것만 하다 보면 금방 질린댔어요.”
“그야 당연하죠. 저 그렇게 뻔한 남자 아닙니다.”
“뻔한 남자 아니라서 좋으시겠어요.”
한소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진 씨. 상진 씨가 브루스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제가 브루스처럼 전지전능한 힘을 갖게 된다면 말이죠?”
“네. 상진 씨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거예요?”
“글쎄요. 저도 아마 비슷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야 좋다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보겠지만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하니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저도 브루스처럼 신의 힘을 내려놓고 본래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영화가 주는 교훈이 그런 거니까요.”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한소희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너무 정형적인 대답이었지만 한소희는 오상진의 대답이 맘에 들었다.
‘이 사람 뭔가 진국인 것 같아.’
한소희가 오상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오상진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한소희는 모르겠지만 오상진은 이미 브루스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암에 걸려 죽을 상황에서 수류탄에 몸을 던졌다가 과거로 회귀해 로또 1등에 세 번이나 당첨됐다.
이 정도면 영화 속 브루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했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오상진은 브루스처럼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절 과거로 보내주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켜봐 주세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테니까.’
16,
“신순애 환자님. 물리치료 끝났습니다.”
알람 소리와 함께 물리치료사가 와서 알려주었다.
배드에서 일어난 신순애는 신발을 신고 카운터 쪽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과 눈을 맞추는 간호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담당 의사 선생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혹시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선생님하고 따로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면 진료 예약 잡아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진료실 앞에 앉아 계세요. 예약 넣어드렸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래요. 고마워요.”
신순애가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간호사의 말처럼 진료실 예약 모니터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대기자 명단이 많았다.
“많이 기다려야겠네.”
신순애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목 주위를 톡톡 닦아냈다.
그런데 가장 밑에 있던 자신의 이름이 어느 순간 중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옆에는 입원이라는 표기가 덧붙었다.
약 10분 후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중년 남자가 나오자 간호사가 신순애를 불렀다.
“신순애 환자분.”
“네.”
“지금 바로 들어가실게요.”
“아, 네에. 감사합니다.”
신순애가 아직 닫히지 않은 문을 열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
자신이 수술을 해서일까. 담당 의사가 반갑게 웃으며 신순애를 맞았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신순애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담당 의사가 진료 내역을 확인하고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물리치료는 잘 받고 계시는 거로 나와 있는데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선생님께서 수술을 잘해주셔서 이제 멀쩡해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재활치료도 끝나고 해서 와봤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저…….”
신순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일해도 괜찮은 거죠?”
“일이요?”
“지난번에 재활치료가 끝나면 일을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뒤늦게 뭔가 떠오른 담당 의사가 피식 웃었다.
2주 전쯤일까.
물리치료를 마친 신순애가 아들인 오상진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신순애는 다짜고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 수술 경과는 좋은 거죠?”
“네. 어머니. 이제 별걱정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저 일해도 되죠?”
그 소리에 오상진이 버럭 소리쳤다.
“엄마! 말도 되지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 몸으로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말씀하시는 거 못 들었어? 별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하시잖아.”
“그건 수술적인 이야기고 아직 걷는 것도 불편한데 무슨 일이에요?”
“이제 엄마는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선생님. 저희 어머니 좀 말려 주세요. 수술 경과가 좋다고 지금 당장 무리해서 일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요.”
오상진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의사는 딱 보니 어머니의 고집을 꺾어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그땐 아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네, 어머니. 여기 아드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 물리 치료도 더 받으셔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움직이시는 건 괜찮지만 지금 당장 일해서 허리에 무리를 주면 나중에 수술 부위에 탈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좋은 말로 신순애를 달랬다. 신순애도 서운한 듯 한 번 바라보는 거 말고는 다른 말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재활치료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찾아와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났네요. 그때 제가 말씀드린 치료는 꾸준히 잘 받고 계셨던 거 맞죠?”
“그럼요. 못 미더우면 확인해 보세요.”
“그럼 잠시 확인 한번 하겠습니다.”
담당 의사는 컴퓨터를 조작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미 신순애의 재활 기록은 확인한 뒤였다.
다만 지난번에 오상진의 편을 들었던 만큼 무턱대고 다시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 우리 어머니 지난 2주간 꾸준히 하셨네요. 물리치료도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고요.”
“네.”
담당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물리치료 선생님도 열심히 잘하신다고 하셨고…….”
담당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신순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담당 의사를 바라봤다.
그렇게 모니터를 훑던 담당 의사의 시선이 신순애에게 향했다.
“어머니. 혹시 앉았다가 일어섰다 할 때 다리가 저린다거나, 힘이 안 들어가거나 하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