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32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17)
“네? 무슨 과외요?”
“아니, 상진 씨는 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아서요.”
“글쎄요. 제 주변 제가 조언을 들을 만한 연애 고수는 없는데요. 굳이 한 명 꼽자면 한 대위님 정도랄까요?”
“우리 오빠요? 허, 절대 우리 오빠 말은 듣지 마세요. 연애 고수가 아니라 허당이니까.”
“사실 저도 고수까지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오상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가 한소희를 다시 설레게 만들었다.
‘진짜 뭐야, 이 남자…….’
지금껏 만나본 남자들은 대부분 한소희의 환심을 사려 애를 썼다. 입에 발린 칭찬은 기본이고 고가의 선물에 필요 이상의 매너까지. 공주 대접을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한소희는 그런 과함이 싫었다. 받는 게 있으면 그만큼 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 속에서 커 온 그녀로서는 지나친 호감에 보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오상진이 입바른 소리를 할 때 이 남자도 똑같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겪으면 겪을수록 오상진이 달리 보였다. 생물학적인 남자가 자신처럼 예쁜 여자에게 바라는 거야 같겠지만 적어도 결과를 위해 안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유로움? 넉넉함?
금방 달아올랐다 금방 식는 남자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상진이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이상 삐딱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스테이크 다 못 먹을 것 같아요.”
상념을 털 듯 한소희가 말을 돌렸다.
“그래요? 그냥 하나 시켜서 나눠 먹을 걸 그랬나 봐요.”
“솔직히 말해봐요. 이렇게 시켜도 상진 씨는 양이 안 차죠?”
“에이. 저 그렇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오빠 말로 군인들은 앉았다 일어서기만 해도 배가 꺼진다던데요?”
“한 대위님이 그러셨습니까?”
“왜요? 아니에요?”
“일반 병사들은 그럴 겁니다. 훈련은 고단한데 먹는 건 부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요즘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는데 그 정도는 아닌가 봐요?”
“좋아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군대죠.”
“그렇구나.”
오상진을 향한 한소희의 시선이 살짝 안쓰럽게 변했다. 그러자 오상진이 걱정할 거 없다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병사들 이야기고 장교들은 잘 먹고 다니니까요.”
“그럼 오빠도……?”
“네. 한 대위님은 식사 때마다 밖에 가서 드실 겁니다.”
“웃겨. 그래놓고 군대 밥이 맛이 없어서 살이 쭉쭉 빠지는 거 같다고 하던데요?”
“하하. 그게 과연 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도 대식가까지는 아닙니다. 물론 먹는 걸 마다하지는 않지만요.”
오상진이 한소희가 가진 선입견에 대해 해명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 군인들이 대부분 먹을 것에 사족을 못 쓰다 보니 군복 입은 사람들은 다 그런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오상진이 말했듯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오상진 역시 과거 힘든 가정환경 속에서 살아왔지만, 먹는 것에 큰 미련을 두는 타입은 아니었다.
흔히들 식욕과 성욕, 수면욕이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오상진을 지배하고 있던 건 그 무엇도 아닌 출세욕이었다.
그 결과가 씁쓸하게 끝나긴 했지만 어쨌거나 오상진은 회귀한 이후에도 딱히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 한대훈과 김소희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어? 두 사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야.”
한소희가 바로 답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한대훈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는 왜 나한테만 신경질이냐? 나도 좀 예뻐해 주면 안 돼?”
“옆에 앉은 분한테 예뻐해 달라고 해. 왜 나한테 그래?”
“그럼 그래 볼까?”
한대훈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김소희 중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김소희 중위가 주책이라며 한대훈의 옆구리를 쿡 쳤다.
큭 하고 웃던 한대훈이 오상진을 보며 물었다.
“참. 오 소위. 이렇게 넷이 밥 먹으니까 어떻습니까? 좋죠?”
“네, 좋습니다.”
오상진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냐고 물어보는데 싫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우리 종종 이렇게 모여서 어울리는 게 어때요?”
한대훈의 제안에 한소희가 한마디 했다.
“오빠 자꾸 그러면 김 중위님이 싫어할걸?”
“김 중위가? 왜?”
한대훈이 슬쩍 고개를 돌려 김소희 중위의 표정을 살폈다. 당연히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 여겼는데 김소희 중위 역시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대훈이 좋은 남자이고 자신에게 잘해주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까칠한 여동생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차에 종업원이 요리가 담긴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손님, 주문한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은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한대훈은 재빨리 자기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자기.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냉큼 썰어줄게요.”
“어멋, 안 그러셔도 되는데.”
“에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 꼭 제가 시킨 거 같잖아요.”
“시키긴 누가 시켜요? 내가 내 여자 챙겨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정말이죠?”
“그럼요.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한대훈과 김소희 중위가 보란 듯이 깨를 볶았다. 말을 주고받는 게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서로 달달한 분위기를 연출하자고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오상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슬쩍 한소희에게 말했다.
“소희 씨. 주세요. 제가 썰어드리겠습니다.”
“지금 저쪽 커플 따라 하시는 거예요?”
“아뇨, 제가 소희 씨 고기를 썰어드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저도 썰 줄 아는데요.”
“그럼 이렇게 할까요? 소희 씨 것은 제가 썰고, 제 것은 소희 씨가 썰어주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냥 마음이죠. 서로를 위하는 마음. 어때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한소희가 피식 웃었다. 한대훈 커플을 따라 하는 게 목적이라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오상진의 말을 듣고 보니 서로 썰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제 것이 더 큰 거 같아서 바꾸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소희 씨. 사이즈는 이 정도면 될까요?”
“네. 딱 좋아요.”
“저는 적당한 크기로 썰어주십시오.”
“이 정도는 어때요?”
“네. 좋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한대훈은 기분이 묘했다. 사귄 기간이나 진도를 놓고 봤을 때 자신들이 더 다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오상진과 한소희 쪽이 더 달달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한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소희 중위 역시 오상진과 한소희 쪽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게 아닌데.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어.’
한대훈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김소희 중위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자. 다 썰었습니다.”
“어머, 예쁘게도 썰었네요.”
“고기를 여기 소스에 찍어서 한 번 먹어보세요. 아마 엄청 맛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럼 어디…….”
“에이, 첫입은 제가 먹여줘야죠. 자, 아 하세요.”
“보는 눈이 많은데…….”
“뭐 어떻습니까? 내가 내 여자 챙긴다는데. 자, 아~ 하세요.”
잠시 오상진과 한소희의 눈치를 보던 김소희 중위가 한대훈이 내민 고기를 냉큼 받아 물었다. 그리고 씹지도 않은 채로 말을 했다.
“어머. 대훈 씨 말처럼 더 맛있네요.”
“그렇죠?”
그 모습을 본 한소희가 슬쩍 오상진에게 말했다.
“상진 씨. 설마 저것도 따라 하실 건 아니죠?”
“소희 씨가 원한다면요?”
“전혀요. 전 남들 앞에서 저러는 거 딱 질색이에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솔직히 저런 건 단둘이 있을 때 해야죠.”
“단둘이요?”
순간 한소희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불현듯 영화 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호텔 방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오상진이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한소희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오상진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자꾸 도발하지 마요. 이러다 내가 먼저 덮칠지도 모르니까.’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곧바로 영화관을 향했다.
레스토랑에서 영화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으로 걸어가면 오상진이 말했다.
“한 대위님. 식사 맛있게 잘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오상진은 먼저 가서 계산을 치르려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실례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산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아까 저 손님께서 오셔서 계산하셨습니다.”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한대훈이 먼저 계산을 해버린 것이다.
“허허허,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도 잘 먹었다는 인사는 해야죠.”
“그거면 충분합니다.”
한대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자 한대훈의 팔짱을 끼고 있던 김소희 중위가 그러지 말라며 팔꿈치로 한대훈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그럼 다음번에 오 소위가 사는 건 어떻습니까?”
한대훈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김소희 중위였다 하더라도 남자 친구 혼자서만 계산하길 바라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소희가 끼어들었다.
“오빠, 뭔 소리야. 군인이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내가 사면 되지. 왜 상진 씨 부담 주고 그래?”
“부담은 무슨. 밥 한 끼 먹는 거 가지고. 너무 상진 씨 편드는 거 아냐?”
“내가 우리 상진 씨 편든다는데 오빠가 무슨 상관?”
“뭐야, 벌써부터 우리 상진 씨?”
한대훈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뒤늦게 본심이 튀어나왔다는 걸 알게 된 한소희는 순간 민망했던지 버럭 화를 했다.
“뭐래? 시끄러워!”
“야, 한소희 오늘따라 귀엽다?”
“됐어! 말하지 마!”
“싫은데? 계속 말할 건데?”
“흥. 상진 씨 우리 먼저 가요.”
한소희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오상진의 팔을 잡고 끌었다. 그 모습을 한대훈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주말이라 그런지 영화관에는 대기 인원들이 상당했다. 하지만 한대훈은 걱정할 거 하나 없다고 말했다.
“영화는 제가 미리 예매했습니다.”
“영화는 제가 사야 하는데…….”
“아이고. 괜찮습니다. 그렇게 미안하면 이렇게 자주 보면 되는 거예요.”
“그건 좀…….”
“오 소위. 오 소위까지 이럴 겁니까?”
“하하, 농담입니다.”
“아무튼 여기들 있어요. 가서 표 뽑아올 테니까.”
“네. 그럼 전 팝콘이랑 음료수 사서 오겠습니다.”
한소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여기서 더 들어갈 배가 남았어요?”
“제가 좀 촌스러워서 영화 볼 때는 팝콘을 먹어야 영화 보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전 안 먹으니까요. 제 것은 사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오상진은 대답을 한 후 팝콘을 구매하는 곳에 왔다. 그런데 뒤에서 수군거렸다.
“오빠, 오빠 저 남자.”
“왜왜?”
“저 남자 옷.”
“옷이 왜?”
“잘 봐. 어디서 많이 본 옷 아냐?”
“잠깐.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