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생 리셋 오 소위-129화 (129/1,018)

인생 리셋 오 소위! 129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14)

“그냥 두십시오. 말년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알아보니까 다른 부대에도 비슷한 녀석들이 몇몇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십시오.”

“그래도…….”

“괜찮습니다. 침 하나 놓는 게 무슨 대수라고. 저도 사적으로 오 소위 부른 거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한 대위가 침을 놔주고 의무병에게 잘 보라고 말을 한 후 오상진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절 보자고 하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오상진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한 대위가 슬쩍 주변을 살피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소위, 혹시 내가 오 소위에게 뭐 서운하게 한 적 있습니까?”

“서운하게라뇨?”

“혹시라도 있으면 말해줘요. 나도 모르게 오 소위를 기분 나쁘게 했다던가…….”

“아뇨. 그런 거 없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정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내가 소희한테 커플끼리 더블데이트 하자고 했더니 오 소위가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입니까?”

“네? 제가요?”

“역시. 오 소위 표정을 보니까 알 거 같습니다. 우리 오 소위가 그럴 리가 없죠. 아마 또 소희가 멋대로 오 소위를 팔아먹은 모양입니다.”

한 대위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상진도 이대로 한소희만 나쁜 사람을 만들 수가 없었다.

“아, 어쩌면 그 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네?”

“아시다시피 요즘에 제가 바빠서 소희 씨를 만날 시간을 못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희 씨가 저를 생각해 한 대위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아, 그런 거였습니까?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오 소위를 오해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소희를 만날 시간도 없을 만큼 무지하게 바쁜 겁니까?”

한 대위가 짓궂게 물었다. 그 역시도 부대 돌아가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한소희와 데이트를 못 할 정도로 오상진이 바쁘게 지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게…….”

“이거 제가 곽 대위님께 말씀 좀 드려야겠습니다.”

“곽 대위님이라면 작전 과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사적으로 좀 아는데…….”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리고 요즘은 좀 한가합니다. 정말입니다.”

오상진이 한 대위를 진정시켰다. 그러자 한 대위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블데이트 해도 되는 거죠?”

한 대위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오상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김소희 중위를 걸고넘어졌다.

“후우……. 그런데 김 중위님이 좋아 하시겠습니까?”

여자들끼리 친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커플 데이트를 좋아할 여자는 없었다.

특히나 한소희와 김소희 중위는 첫 만남 자체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대위가 그날의 일을 어떻게든 풀기 위해 더블데이트를 추진하려는 건 이해가 갔지만 한소희만큼이나 김소희 중위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일까.

“아, 우리 소희 씨는 괜찮습니다. 이미 오케이를 받아둔 상태입니다.”

“정말입니까?”

“못 미더우면 소희 씨 부를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대위의 당당함에 오상진의 회심의 일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계획을 다 짜놨는데 말이죠. 이번 주말에 괜찮겠습니까?”

“저녁 쯤에나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그전에 따로 약속 있습니까?”

“제가 이번 체육대회 중대 축구팀을 맡아서요. 지난 주에 집에 다녀오느라 박 하사에게 훈련을 맡겼기 때문에 이번 주는 제가 훈련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훈련은 금방 끝나는 겁니까?”

“점심 먹고 시작해서 저녁 먹기 전에는 끝낼 생각입니다.”

“그럼 오후에 영화 보고, 같이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데이트를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묻는 한 대위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제발 승낙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여기서 또 다른 핑계를 댄다면 그건 한 대위와 같이 어울리기 싫다는 것처럼 보일 터.

“네. 알겠습니다.”

오상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 대위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가 짠 계획은 이렇습니다. 일단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겁니다.”

“식사 후에도 계속 같이 움직이는 겁니까?”

“왜요? 식사만 하고 헤어졌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진도 빼려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그렇게 꽉 막힌 오빠 아닙니다. 남녀가 서로 좋으면 몰래 키스도 하고 스킨십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저도 다 해봐서 아는데 몰래 하는 스킨십이 더 짜릿한 법이죠.”

김소희 중위와 어떤 연애를 즐기는지는 몰라도 한 대위의 두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하지만 오상진은 아직 한소희와 제대로 손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관에 넷이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면 좀 불편하지 않을까요?”

“설마 제가 그렇게 생각이 없겠습니까?”

“네?”

“영화관이 어떤 곳인데 커플끼리 붙어 앉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곳 아닙니까?”

“그, 그렇습니까?”

“영화관 들어가면 우린 각자 플레이하면 되는 겁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자리를 잡았으니까 서로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면 오 소위도 남자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저 쿨한 오빠입니다. 솔직히 다른 남자라면 신경이 쓰이겠지만 우리 오 소위라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하하하.”

마치 진도를 빼길 권장하는 듯한 한 대위를 보며 오상진은 한 대위와 한소희가 배다른 형제는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날 저녁.

관사에서 쉬고 있는 오상진에게 한소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소희 씨!”

발신자를 확인한 오상진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받았으니 이만하면 세이프다 싶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냉랭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네?”

-그냥 솔직히 말해요. 제가 싫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니, 싫다면 말로하지 무슨 더블데이트에요? 제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아, 소희 씨 오해입니다.”

-오해긴 뭐가 오해에요. 밥 한번 먹자고 해도 만날 바쁘다고 하더니. 오빠가 더블데이트하자고 하니 덥석 받아요? 도대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정말로 화가 났는지 한소희의 격앙된 목소리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덕분에 오상진은 모처럼 식은땀이 다 났다.

“소희 씨.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하세요.

“일단 소희 씨 보고 싶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럼요. 솔직히 저도 더블데이트 안 하고 싶었습니다. 소희 씨와 단둘이 만날 시간도 못 내는데 더블데이트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오빠 말은 다르던데요?

“이걸 다 말하면 고자질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 한 대위님이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고 절 부르셨습니다. 저한테 서운한 게 있냐고, 없는데 왜 더블데이트를 거절하냐고 하는데 거기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무를 수 있으면 무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한소희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주말에 더블데이트를 잘 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오상진이 적극적으로 변명해서일까. 한소희의 화는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까 한 말 진심이에요?

“네?”

-제가 정말 보고 싶긴 했냐고요.

“당연하죠.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그런데 왜 연락 한 번 안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말에 데이트 신청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칫, 거짓말. 지난 주말에는 그냥 넘어갔잖아요.

“그땐 집에 다녀오느라 그랬습니다. 부대 행사 때문에 한동안 집에 못 갈 것 같아서요.”

-부대에 행사가 있어요?

“이번에 부대에서 체육대회를 하는데 이게 대대장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거라 대충 할 수가 없습니다. 중대 단위로 경쟁을 하는 거라 정말 열심히 준비해야 하거든요.”

어쩌다 보니 대화가 충성 대대 이야기로 흘렀지만 한소희는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상진의 일과를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어서 반가운 눈치였다.

-대충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우리도 교수님이 주관하는 행사 같은 건 별거 아니더라도 준비를 오래 하거든요.

“네. 대충 비슷합니다. 체육대회는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상진 씨는 체육대회 때 뭐 해요? 달리기 같은 거 해요?

“체육대회는 병사들이 선수로 뛰고 저는 중대 축구팀을 맡았습니다.”

-축구 팀이요?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는데 체육대회의 꽃이 바로 축구입니다. 종합 우승도 중요하지만 어느 중대가 축구 우승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정도입니다.”

-축구팀을 맡았다면 감독이에요?

“거의 비슷한 역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축구를 가르쳐 본 적 있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야 보통 시키면 다 하긴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건 전혀 다른 거니까요.”

-상진 씨는 매사에 열심히네요.

한소희가 살짝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남자는 매력적이지만 그로 인해 연애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달갑진 않았다.

그런 한소희의 속내를 눈치챈 오상진이 냉큼 말을 받았다.

“아무리 바빠도 소희 씨와 데이트는 해야죠. 자주 통화도 하고요.”

-뭐래. 한 번도 먼저 연락 안 해놓고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소희는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오상진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 진짜 바쁘다는 것도 알았다. 바쁜 와중에도 데이트를 하겠다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 토요일 더블데이트는 어떻게 할까요? 취소할까요?”

한소희가 적당히 풀렸다고 생각한 오상진이 넌지시 더블데이트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거절하면 상진 씨 입장이 난처해지겠죠?

“그렇다면 제가 다른 핑계를 대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못 만나는 거잖아요.

“몰래 보면 되죠.”

-우리 오빠 그런 쪽으로는 눈치 100단이에요. 바로 알 걸요? 그리고 그건 더블데이트를 미루는 거지 취소하는 게 아니잖아요.

“후우……. 솔직히 말해서 저렇게 좋아하는 한 대위님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상진 씨 사정도 있는데 제가 이해해야죠. 이번 한 번만 넘어갈게요.

한소희가 마음을 바꿨다. 한 대위의 소원 타령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오상진의 군대 생활이 불편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대신에 저 제대로 꾸미고 갈 거예요.

“네?”

-오빠 여자 친구 기를 확 죽여 놓을 생각이에요.

한소희의 목소리에서 다시 냉기가 흘렀다. 오상진에 이어 불똥이 김소희 중위에게 튄 느낌이었다.

“소희 씨. 그냥 지난번처럼 입고 나오시면 안 될까요?”

오상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소희 중위가 충성 대대 최고의 미녀라 해도 한소희의 상대가 되진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소희는 그 말이 달리 들린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