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26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11)
오상진이 오정진의 나이 때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주변도 돌아보지 않고 학업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하면 사법 고시를 통과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정 형편 때문에 육군 사관학교를 가게 됐고 군인의 길을 걷다가 회귀까지 하게 됐다.
나름 인생의 풍파를 다 겪고 보니 오정진과 정수현의 풋풋함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야. 기왕 데려다주는 거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지.”
오상진의 말에 오정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엘리베이터 타서 내리면 바로 앞인데 무슨…….”
“그래도 인마, 남자가 매너가 있어야지.”
“친구라니까.”
“누가 뭐래?”
오정진이 마지못해 정수현을 따라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주었다.
잠시 후 꼭대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활짝 열렸다.
“정진아 나 갈게.”
정수현이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오정진이 뒤따라 엘리베이터 위에 올랐다.
“어어? 왜?”
정수현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오정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형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라고 해서.”
“아아, 그래?”
“왜? 싫어?”
“아니, 나는 괜찮아.”
정수현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방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같이 공부하긴 했지만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나란히 타니까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하지만 정작 오정진은 정수현을 힐끔 바라보고는 무심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10.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고 오정진이 들어왔다. 그런데 현관문 앞에 오상진이 팔짱을 낀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 데려다줬어?”
“집 앞에까지 데려다주고 왔어.”
“좋았냐?”
“뭐, 뭐가 좋아!”
“짜식이 좋았으면서 발뺌은.”
“우리 친구라고.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
오정진이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오상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도 수현이가 신경이 쓰이는 거 같으니 내일 제대로 옷 좀 사 입혀야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오상진은 오정진을 데리고 백화점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불청객이 한 명 끼었다.
바로 오상희였다.
“우와, 백화점이다. 얼마 만에 오는 거냐.”
오상진과 오정진을 양옆에 끼고 있던 오상희가 백화점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오상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희야, 적당히 안 할래?”
“아, 왜애~ 모처럼 백화점 왔는데 기분도 못 내?”
“그러게 왜 따라와.”
“뭐뭐뭐, 그럼 나 빼고 오빠들끼리 백화점에 옷 사러 간다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는 용돈 넉넉하게 주고 있잖아. 네가 이리저리 뜯어가는 용돈이 한 달에 얼마인 줄이나 알아?”
“용돈은 용돈이고 백화점은 백화점이지! 그리고 오빠들끼리 와서 제대로 된 옷을 고를 수 있겠어? 패션 센스들은 다 꽝이면서. 내가 골라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오상희가 씩 웃고는 앞으로 쌩 하고 걸어갔다. 마치 물 만나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어후, 저 녀석 아주 살판났네.”
오정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 그냥 포기해. 쟤를 누가 말리겠어.”
“그러게 말이다.”
캐쥬얼 매장 쪽으로 걸어간 오상희가 이쪽으로 오라며 오상진과 오정진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오상진과 오정진은 반대편에 있는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거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상희 쟤도 옷 볼 줄 모른다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으휴. 아저씨들 같이 누가 남성복 코너에서 옷을 사?”
오상희가 쫓아와서 투덜거렸지만 오상진과 오정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취향을 골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 다 검은색이나 무채색 옷을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오상희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으이구,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옷 고르는 센스하고는!”
“왜? 무난하고 좋잖아.”
“난 검정색이 좋더라고.”
“이보세요. 오빠들! 집에 걸린 옷들을 좀 보세요. 죄다 검은색 옷이거든요.”
“야, 색깔이 같다고 다 똑같은 옷이냐?”
오상진이 항변했지만 오상희는 더 이상 검은색 옷을 늘릴 수 없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 됐고! 그거 도로 가져다 놔!”
“왜? 검정색은 때도 안 타고 좋은데.”
“맞아.”
“그러니까 오빠들이 여자 친구가 없지.”
순간 오상진과 오정진이 동시에 울컥했다.
“짜식이 오빠를 뭐로 보고!”
“학생이 여자 친구 사귀는 게 말이나 되냐?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오상희.”
서로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여자 친구를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사귈 수 있다.
두 형제의 항변에 오상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오상희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있어 봐! 내가 골라줄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훑어보던 오상희가 옷 하나를 집었다.
“어? 이거 괜찮네.”
오상희가 고른 옷은 흰 바탕에 큼지막한 로고가 박힌 티였다. 오정진은 그걸 보며 인상을 썼다.
“야, 무슨 흰색이야.”
“오빤 이 옷을 입어야 해. 그래야 좀 얼굴이 살지.”
“그리고 이거 로고 너무 크잖아. 이런 거 입고 다니면 쪽팔리다고.”
“남자들은 그럴지 몰라도 여자들은 이런 심플한 디자인 좋아할걸?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야, 그러지 말고…….”
“어허! 자꾸 이러면 오빠 검은색 옷 전부 다 내다 버린다?”
오상희가 단호하게 말을 하며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 옷 어때요? 어울리죠?”
그러자 종업원이 활짝 웃고는 오상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와, 고객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렇죠? 요즘 이런 옷이 유행이죠?”
“네, 맞아요. 이 옷 엄청 많이 나갔는데 이제 보니까 딱 고객님 옷이네요.”
“그, 그래요?”
“물론이죠!”
종업원의 말에 오정진이 혹하며 거울에 몸을 비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상진도 오정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오상진처럼 다소 애 같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입혀놓고 나니 딱히 로고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
“큰 오빠가 보기에는 어때?”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그 정도가 아니라 작은 오빠가 달라 보이지?”
“야,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래서? 큰 오빠도 하나 골라줘? 누구 잘 보이고 싶은 여자라도 있어?”
오상희가 오상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정진을 부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오상진의 표정을 보고 뭔가 있다고 직감한 모양이었다.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빠 얼굴에 다 써 있는데. 누군데? 여자 친구?”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고…….”
“아하, 썸? 우리 큰오빠가 썸을 타신다고?”
오상희가 짓궂게 웃었다. 그러다 살짝 일그러진 오상진의 표정을 보고는 냉큼 입을 가렸다.
“아무튼 큰오빠!”
“왜?”
“내가 제대로 코디해 줄까?”
“네가?”
오상진은 순간 코웃음이 났다.
패션 센스가 부족하다고 해도 한참 어린 여동생에게 코치를 받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상희의 안목은 오상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이거 왜 이래? 나 아이돌 지망생인 거 몰라?”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내가 우리 오빠들 공항 패션부터 시작해 데일리룩까지 매일같이 체크하고 있는데 오빠 데이트룩 하나 코디하는 게 어렵겠어?”
“흠…….”
“솔직히 이런 기회 흔치 않을걸? 세상에 어느 여동생이 오빠하고 같이 백화점에 와주냐. 안 그래?”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에이, 알면서.”
“용돈?”
“용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코디비라고 할까?”
“야, 너 내가 지금껏 준 용돈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오상진이 한마디 했다. 빈말이 아니라 오상희에게 매월 들어가는 돈만 30만 원이 넘었다.
물론 오상희보다 더 많은 용돈을 받는 친구들도 없지 않겠지만 과거 오상희가 어머니에게 받아 쓰던 용돈은 한 달에 3만 원에 불과했다.
오상진이 로또에 당첨된 덕에 용돈이 10배로 올랐으니 오상희가 오상진을 업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런 오상진의 본심이 느껴진 것일까?
“그래서 이번엔 내가 공짜로 해줄게. 대신에 다음에도 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알지?”
오상희가 냉큼 말을 돌렸다.
“너 하는 거 봐서.”
“대신 내가 골라준 대로 입는 거다?”
“이상한 거 골라줄 줄 어찌 알고?”
“내가 미쳤어? 용돈이 달린 일인데.”
도대체 얼마나 더 뜯어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상희는 오정진의 옷을 고를 때보다 더 열과 성을 다해 오상진의 옷을 골랐다.
그렇게 여러 매장을 전전해서 건진 건 심플한 무늬가 박힌 흰 티셔츠와 대학생들이 즐겨 입을 만한 청바지였다.
“이건 좀 너무 갔지?”
오상희가 무릎 쪽이 찢어진 청바지도 들어 보였지만 마흔 살을 바라보던 시절까지 살다 와서일까. 오상진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못 입을 것 같아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에다 아까 그 옷을 입으면 어때?”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너무 영한 거 아니냐?”
“뭐래? 오빠 아직 서른도 안 됐거든?”
“그랬나?”
“뭐가 그랬나야? 벌써 치매 왔어?”
“짜식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빠한테 치매라니. 혼날래?”
“미안. 그니까 오빠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입술을 삐죽거리는 오상희를 뒤로하고 청바지를 계산했다.
오정진의 옷 다섯 벌에 오상진의 옷 네 벌까지.
아홉 벌을 사는 데 100만 원 가까운 지출이 나왔다.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오정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상진은 괜찮다며 웃었다.
“그동안 못 먹고 못산 거 누리는 거로 하자.”
“난 지금도 괜찮은데.”
“짜식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내가.”
“그런데 우리 것만 사도 되려나?”
오정진이 미안한 얼굴로 오상희를 봤다.
본래 예정에 없던 동행이긴 했지만 오상진과 오정진의 옷을 고르는 동안 오상희의 옷은 한 벌도 사지 않았다.
“상희야. 너도 몇 벌 사.”
오상진도 미안했던지 오상희에게 권했다.
하지만 오상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필요 없어. 어차피 아이돌 데뷔하면 협찬 들어올 텐데 뭘.”
“정말이지? 나중에 딴소리 마라.”
“대신 오빠. 나 용돈으로 줘.”
“뭐? 또 용돈이야?”
오상희의 용돈 타령을 들은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용돈을 달라는 건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야, 오상희. 뭔데?”
“뭐가?”
“솔직히 말해. 내가 용돈 주면 뭐할 건데?”
“아, 싫으면 마. 왜 갑자기 성질이야?”
“성질 내는 게 아니라 너 말하는 게 이상하잖아. 어디 돈 쓸데라도 있어서 그러는 거야?”
오상진이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자 오상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화 안 낸다고 약속해.”
“뭐야, 너 사고 쳤어?”
“그런 거 아니거든?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화 안 낸다고 약속하라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