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25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10)
“아, 안녕하세요.”
오상진은 군화 끈을 풀다가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오정진의 등 뒤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서 있었다.
“아, 네. 반가워요.”
오상진은 일단 인사를 받아준 뒤에 오정진에게 눈을 돌렸다.
“누구야?”
오상진이 씨익 웃었다.
“아, 저는…….”
여자애가 먼저 소개를 하려는데 오정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같은 반 친구.”
“같은 반 친구? 여자 친구가 아니고?”
“아니야.”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여자 친구지 남자 친구냐?”
“유치하게 왜 이래?”
오정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오상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반가워요. 저는 정진이 형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저는 정수현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수현 학생. 정진이하고 시험공부하고 있었어요?”
“네. 월요일이 수학 시험이라서요.”
“오호, 수학. 좋죠.”
“네?”
오상진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자 오정진이 정수현을 보며 말했다.
“수현아. 인사했으니까 넌 올라가 있어.”
“으응, 알았어.”
정수현이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오상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군화 끈을 마저 풀었다.
그러자 오정진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여자 친구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하냐?”
“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잖아.”
“아닌데? 난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거짓말하지 마. 내가 형을 몰라?”
“그래서 말인데 정진아. 내가 보기에는 귀엽게 생겼는데…….”
“아니라고!”
“괜찮아, 네가 어린 애도 아니고 연애도 할 수 있는 거지. 형은 괜찮다. 건전하게만 만난다면 연애해도 괜찮다고 봐.”
오상진의 공격에 오정진은 쉽게 반격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친해졌다고 해도 오상진은 아버지를 대신했던 무서운 형이었다. 그 간극이 하루아침에 좁혀질 리 없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럼 뭐 형은 여자 친구 있어?”
“자식이 뭘 모르네. 요즘 형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오상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당장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여자만 세 명이나 됐다.
하지만 오정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연애를 한다면 좀 멋을 부리게 마련인데 오상진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겠네. 쫓아다니는 여자 많아서.”
“뭐야, 그 웃음!”
“아냐, 아무것도.”
“어쭈, 이 자식이 형을 보고 웃어?”
“아니야.”
“아니긴 다 봤는데 이리와.”
“내가 뭘 어쨌다고.”
오정진이 뒤로 슬슬 물러났다. 오상진이 오정진에게 빠르게 다가가 헤드락을 걸었다.
“이 자식이 형을 놀리고 있어. 죽을래?”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그 과정에서 오상진이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이 오정진의 코앞에서 대롱대롱 춤을 췄다.
“어? 이건…….”
쇼핑백 안을 본 오정진이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오상진의 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의 신발 상자였다.
“짜식, 봤냐?”
“형 신발 샀어?”
“내 거면 가지고 왔겠냐? 너 신어라.”
“이게 뭔데?”
“묻지 마 인마. 오다 누가 버리고 간 거 주웠으니까.”
오상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사이 박스를 연 오정진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죠던이네.”
“죠던 알아?”
“알지, 당연히. 이거 우리 반에 신고 다니는 애들 많아. 그런데 이거 꽤 비쌀 텐데…….”
“비싸긴 무슨. 이제 그 정도는 신고 다녀도 돼.”
“그래도…….”
“네 친구들도 다 신고 다닌다며? 그러니까 이제 궁상 좀 그만 떨어.”
“……알았어. 형. 잘 신고 다닐게.”
오정진은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 다시 공부하러 간다.”
“밥은 먹었어?”
“아까 엄마가 차려주셨어.”
“그래? 형이 치킨이라도 시켜줄까?”
“아니, 됐어.”
오정진이 물을 마시고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오정진이 입은 트레이닝복이 오상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거 내 거 아냐?’
혹시나 했는데 기장이 길어서 발뒤꿈치를 덮는 걸 보고 오상진은 헛웃음이 났다.
“야. 오정진.”
“응?”
“그거 내 바지 아니야?”
“아, 미안, 형. 벗어 줄게.”
오상진의 말을 오해한 오정진이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벗긴 뭘 벗어.”
“그럼?”
“멀쩡한 바지 놔 두고 왜 그걸 입냐고. 너한테 맞지도 않는데.”
“아, 이게 은근 편해.”
“트레이닝복은 원래 다 편한 거야.”
“그런가?”
“아무튼…… 올라가서 공부해.”
“응.”
오정진이 올라가고 오상진은 소파에 앉아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옷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 옷을 입고 있어. 속상하게.”
로또에 당첨된 이후 오상진은 오정진에게 주기적으로 용돈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회귀하기 전처럼 궁상맞게 지내는 오정진을 보니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들 간식 줄 것이라도 있나?”
괜히 심란해진 오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안을 살폈다. 하지만 군것질을 용납하지 않는 어머니가 냉장고에 먹을 만한 걸 놔둘 리 없었다.
냉동실에 먹다 남은 삼겹살이 있지만 그렇다고 삼겹살을 구워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일이라도 깎아야 하나?”
오상진이 다시 과일 칸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일은 아닌 것 같았다.
“집 앞 빵집이라도 갔다 와야겠다.”
오상진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는 빵집으로 가서 빵과 음료수를 사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쟁반 하나를 꺼내 빵과 우유를 잘 세팅한 뒤에 오정진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똑.
노크를 했는데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야, 이 녀석들. 공부한다더니 뭘 하는 거야?”
오상진이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정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노크했는데 왜 대답이 없어?”
“문제 풀고 있었어. 근데 그건 뭐야?”
“그래도 공부하는데 간식은 먹고 해야지.”
순간 정수현이 환한 얼굴로 쟁반을 받았다.
“와, 간식이다. 잘 먹겠습니다!”
오상진은 그런 정수현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요. 많이 먹어요.”
정수현은 엄청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게다가 자기 나이에 맞게 옷을 입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잘 어울렸다.
‘뉘 집 자식인지는 몰라도 귀티가 흐르네. 집이 좀 사나? 그에 반에 정진이는…….’
오상진의 시선이 뒤이어 오정진에게 향했다.
바지는 자신이 예전에 입었던 트레이닝복이고 위에 옷은 목덜미가 잔뜩 늘어난 반팔 티였다.
‘어휴. 이 자식은 도대체 저 반팔티를 몇 년째 입고 있는 거야.’
오상진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어지간하면 착하고 공부 잘하는 동생이라고 포장해 주고 싶은데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그래가지고 연애나 하겠냐?’
속으로 혀를 차던 오상진은 저렇게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진이 옷이라도 한 벌 사줘야겠다.’
오상진은 그렇게 결심을 했다. 그런 오상진의 시선이 신경 쓰였을까.
“형. 계속 있을 거야?”
오정진이 눈치를 줬다.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형한테 물어 봐. 다 알려줄 테니까.”
“모르는 거 없으니까 좀 나가 줘.”
“짜식이. 형이 간식까지 챙겨줬는데 매정하게.”
“형. 우리 다음 주 월요일하고 화요일까지 시험 봐야 해. 수학하고 과학, 영어가 다 몰려 있다고.”
“누가 뭐래? 근데 그 학교는 아직도 주말 끼고 시험 보냐?”
“형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튼 애들을 잡는다니까. 그건 그렇고 너 내일은 뭐 하냐?”
“시험공부.”
“하루 종일 숨도 안 쉬고 공부만 할 거야?”
“또 왜애.”
오정진이 짜증을 냈다. 정수현 때문에 오상진이 일부러 장난을 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오상진도 동생의 시험공부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수현 학생이라고 했죠?”
“네. 그리고 정진이 오빠시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럼 그럴까? 혹시 내일도 시험공부 같이할 거야?”
“그러기로 했는데…… 오지 말까요?”
“아니. 꼭 와.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니까.”
“……?”
“아무튼 내일 몇 시부터 공부하는 거야? 아침 일찍부터 하는 건 아니지?”
오상진은 정수현을 보며 물었다. 정수현은 질문을 받자 오정진을 한번 보고 말했다.
“제가 학원을 가서요. 학원 끝나고 집에 오면 3시쯤에 끝날 것 같아서 4시에 하자고 했어요.”
“그러면 내일 4시까지만 집에 데려다 놓으면 되는 거네?”
“네?”
“그전에 잠깐 정진이 좀 빌려가겠다고.”
“아, 네. 그렇게 하세요.”
정수현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오정진과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오상진의 말이 묘하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무심한 오정진은 오상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내일 무슨 일 있어?”
“나랑 잠깐 나가자.”
“어딜?”
“그건 내일 알려줄 테니까 그런 줄 알고 공부나 열심히 해. 아무튼 형이 간식까지 챙겨줬는데 1등 못하기만 해. 알지?”
“그럴거면 이거 도로 가져가.”
“짜식이 낙장불입 모르나. 수현아. 맛있게 먹어.”
“네에~”
오상진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2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정수현이었다. 목이 말라 내려왔나 싶었는데 책가방을 챙긴 게 집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공부 다 끝났어?”
“네. 밤늦게 죄송합니다.”
“죄송은.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어른들이 미안하지.”
“네?”
“학생이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미안해할 거 없다는 말이야. 그런데 집이 이 근처야?”
“이 아파트 살아요.”
“오호, 이웃 사촌이었네?”
“네. 헤헤.”
정수현이 웃었다. 오정진은 분명 무서운 형이라고 했는데 대화를 나눠 보니 재미있는 사촌 오빠 같았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 와.”
“정말 그래도 되요?”
“물론 되고말고. 그리고 정진이 녀석이 둔하니까 이해해 주고.”
“……네?”
오상진이 뭐라고 코치를 하려는데 어찌 알고 오정진이 내려왔다.
“엄마는?”
“주무셔. 인사 안 해도 되니까 정진이 네가 수현이 데려다줘.”
“알았어.”
오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니 데려다준다는 것조차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밤이 늦은 만큼 배웅은 해주는 게 도리 같았다.
그때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정수현이 한쪽에 놔둔 죠던을 발견했다.
“어? 정진아. 이 신발 뭐야?”
“형이 사다 줬어.”
“이거 요즘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그 메이커 아냐?”
“맞아.”
“한번 신어봐.”
“에이, 요 앞까지 가는데 왜 신어.”
“그래도 한번 신어봐. 네가 신은 모습 보고 싶단 말이야.”
“귀찮게…….”
오정진이 투덜거리며 죠던 신발을 신었다.
“이야, 멋지다.”
정수현이 감탄할 만큼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신발이 다 똑같지 뭐. 가자, 엘리베이터까지 바래다줄게.”
“응!”
그런 둘의 모습을 오상진이 흐뭇한 얼굴로 훔쳐봤다.
“좋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