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19화
15장 전투체육을 아는가(5)
“중대장님.”
“왜?”
“씨름장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보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보수? 그냥 대충 쓰면 안 되는 거야?”
“자칫 잘못하면 병사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흐음. 알았어. 안 그래도 대대장님 뵈러 가야 하니까. 내가 가서 말씀드려 볼게.”
“네.”
그날 오후 김철환 1중대장이 행정실로 들어왔다.
오상진이 슬쩍 보니 김철환 1중대장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말도 마라. 씨름장 보수 우리가 맡기로 했다.”
“네? 왜 하필 우리 중대입니까? 아니, 설사 보수를 하라고 하셨다고 해도 그걸 그냥 받아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어떻게 하냐. 내가 건의하니까 그럼 1중대가 맡아서 하면 되겠네. 딱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거기다 대놓고 못 합니다, 그렇게 말할까?”
“그건 아니지만…….”
“알잖아. 까라면 까야지. 하아. 제기랄. 괜히 말했어. 아무튼 씨름장 보수는 우리가 맡았으니까, 4소대장.”
“네.”
“들었지?”
“들었습니다.”
“보수 잘해.”
김철환 1중대장은 지시를 내린 후 쌩하니 중대장실로 갔다. 4소대장은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씨름장은 또 언제 보수를 하냐.”
오상진은 괜히 4소대장에게 미안해졌다. 4소대장을 위해 나선 일이 결과적으로 4소대장에게 부담으로 돌아 온 만큼 어떻게든 도와야 할 것 같았다.
“씨름장 보수는 같이 합시다. 저도 도울 테니까.”
오상진의 제안에 4소대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네.”
“역시 1소대장님밖에 없습니다.”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자시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체육대회 일정을 확인했다.
달력을 통해 날짜를 계산하니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마지막 2주간 예선전을 치른다고 가정하면 연습을 할 시간은 길어야 2주뿐이네. 평일에는 어림없을 테고 주말이나 되어야 시합을 할 텐데…….’
오상진이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한 달이라고 해서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는데 막상 손발을 맞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서 선수 선발전 같은 걸 치른다면 시간은 더 줄어들 터. 그보다는 자신이 알아서 선수들을 구성해 팀을 만드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았다.
‘일단 움직이자.’
오상진이 결정을 내린 후 다이어리를 덮었다.
6.
부대 체육대회의 꽃은 누가 뭐래도 축구였다.
그만큼 각 중대별로 축구에 대한 자존심이 각별했다.
다른 종목은 지더라도 어떻게든 축구만큼은 이기려고 용을 썼다.
오상진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과거의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선수들을 구성했다.
과거 로또에 미쳐 살던 시절 오상진이 족구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다름 아닌 축구였다.
내기 축구가 벌어진다는 소식이 들리면 축구화까지 고쳐 신고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병사들의 눈치가 상당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에게 무시당한 설움을 축구로 풀기 위해 더 악착같이 굴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공 좀 찼다는 1중대 멤버들은 오상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만 있어 보자. 1소대에서는 누가 있더라?”
오상진이 기억을 더듬으며 1소대 내무실로 들어갔다.
오전에 정신교육이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소대원들이 내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상진이 등장하자 김대식 병장이 곧바로 일어나 경례했다.
“충성. 교육 준비 중.”
“어, 쉬어.”
오상진이 찬찬히 1소대원들을 바라봤다.
“이야기 들었겠지만 이번 달 말에 체육대회가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중대장님께서 내게 1중대 축구를 일임하셨다.”
“오오오~”
“축구 하면 또 우리 1중대 아니냐? 우리 1중대 축구팀이 다른 중대에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통해 선수들을 선발할 만큼 시간적으로 여유롭지가 않아. 그래서 소대장이 직접 선수를 차출하겠다. 참고로 거부는 없다.”
오상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소대원들이 저마다 눈을 반짝였다. 체육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면 축구 선수로 뛰고 싶은 게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런 소대원들을 쑥 훑은 뒤 오상진이 차례대로 이름을 불렀다.
“김우진 상병, 김일도 상병, 한태수 일병 이상!”
“상병 김우진.”
“상병 김일도.”
“일병 한태수.”
계급이라는 능력치가 별도로 주어지는 군대 축구, 군대스리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려면 상병쯤은 되어야 했다.
김우진 상병과 김일도 상병은 1소대에서도 축구광으로 불렸다. 거기에 발재간이 좋은 한태수 일병이 추가됐다. 두 상병의 그늘에 가려 돋보이지 않았지만 실제 1소대 에이스는 한태수 일병이었다.
“호명한 사람은 축구 선수로 뽑혔으니까 그런 줄 알고 소대장의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2소대, 3소대, 4소대까지 돌아다니며 교체 선수를 포함 총 13명의 선수를 선발했다.
벤치 멤버로 최대 5명까지 뽑을 수 있다지만 교체 가능 멤버는 국제 축구 룰에 따라 3명으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굳이 불필요하게 인원을 늘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뽑을 사람은 다 뽑은 거 같은데. 골키퍼를 어떻게 한다?”
만약 단순히 소대 간의 내기 축구였다면 골키퍼는 계급이 낮은 이병들이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핸드볼 스코어도 심심치 않은 군대에서 골키퍼란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체육대회는 달랐다. 중대끼리 경쟁이다 보니 최후의 보루인 골키퍼의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골키퍼 하면 그 녀석인데…….”
오상진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마다 공 좀 찬다는 병사들이 부대에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골키퍼로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건 그 녀석이 유일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지금 축구를 하려나? 예전에도 빼다 빼다 제대 직전에야 공을 찼는데 아직 이른가? 그래도 이기려면 이 녀석의 도움이 필요한데…….”
잠시 고심하던 오상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3소대로 방향을 틀었다.
“오 소위님. 아까 저희 소대 다녀가셨지 말입니다.”
“알고 있다. 혹시 김성진 상병 있냐?”
“김 상병님 조금 전에 담배 피우러 나갔습니다.”
“그래? 알았다.”
오상진은 다시 걸음을 옮겨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안에는 마침 김성진 상병이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김성진 상병.”
“……?”
무심코 고개를 돌린 김성진 상병이 오상진을 발견하고 재빨리 담배를 끄며 경례를 했다.
“충성.”
“너 지금 시간 있냐?”
“네. 있습니다.”
“그럼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김성진 상병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상진이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번에 부대 체육대회 있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상진이 운을 떼자 눈치 빠른 김성진 상병이 입가를 실룩거렸다.
“설마 저보고 선수로 뛰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저 다음 달이면 병장입니다.”
“다음 달에 병장 다냐?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체육대회 참가 안 할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축구 선수로 뛸 생각은 없습니다.”
김성진 상병은 냉큼 선을 그었다. 입대 후 지금까지 축구가 하고 싶어 발이 근질거리는 걸 참아왔는데 병장을 앞둔 이 시점에서 축구를 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오상진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너 아까 소대장이 한 말 들었냐?”
“네?”
“거부는 거절한다는 거. 설마 농담인 줄 알았어?”
순간 김성진 상병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축구 못합니다. 완전 개발입니다.”
“그래? 내가 듣기로 너 중학교까지 축구 했다던데?”
“그, 그걸 어떻게…….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누구에게 듣긴 인마. 너한테 들었지.’
아마 5개월쯤 지난 시점이었을 거다.
11월의 추운 날.
행정반으로 들어가려던 오상진의 옆쪽으로 축구 시합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놈들은 춥지도 않나.”
족구 다음으로 축구를 좋아했던 오상진은 걸음을 멈추고 축구를 지켜봤다. 상황을 보다가 끼어들 틈이 생기면 슬그머니 발을 담가 볼 생각이었다.
“또 3소대하고 4소대가 붙었네. 그런데 어째 4소대한테 밀리는 분위기인데?”
소대끼리 축구는 내기가 걸린 게 일반적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축구를 두고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3소대와 4소대도 걸핏하면 축구 시합을 벌였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3소대가 상당히 앞서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뭐가 문제일까 잠시 경기를 지켜봤는데 골키퍼를 보고 있는 신병이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 신병! 그딴 식으로 할 거야! 제대로 안 막아!”
“이병 신용일. 알겠습니다.”
“야, X팔 새끼야. 너 왜 축구를 그딴 식으로 해. 나와서 손으로 잡아야 할 거 아니야. 안 뛰어!”
“이병 신용일, 네, 알겠습니다.”
골을 먹을 때 마다 사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고 그 고함이 부담감이 되어 신용일 이병의 두 어깨를 짓눌렀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병 주제에 경기에 뛰는 거로 봐서는 밖에서 공 좀 찼다고 티를 낸 모양이지만 군대 축구인 군대스리가와 사회 축구는 엄연히 달랐다.
“저 녀석 빼고 내가 필드에서 뛰는 게 낫겠다.”
오상진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 와중에도 신용일 이병은 연거푸 골을 내주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상병 한 명이 다가가 신용일 이병의 멱살을 잡았다.
“이런 미친 새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시정할 짓을 왜 해!”
그때 오상진의 앞쪽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김성진 병장이 엉덩이를 털며 나섰다.
“야. 그만해. 애가 지금 잔뜩 주눅 들어 있잖아.”
“김 병장님. 이거 사흘 치 뽀글이 내기입니다. 지금 이 새끼 때문에 쫓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알아.”
“하아. 진짜 4소대 저놈들 원래 우리에게 잽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신병 이 새끼가…….”
“야, 됐고. 이기면 되잖아.”
“골키퍼가 저 모양인데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러게 왜 이병을 골키퍼로 써?”
“그게…… 4소대에서 수작을 부렸습니다.”
“수작?”
“자기네 최 병장이 골키퍼를 본다고 떼를 써서 그런데 가능하면 병장이나 이병만 골키퍼를 보자고요.”
“그래서 최 뱀이 저기서 저러고 있냐?”
“네…….”
김성진 병장의 시선이 잠시 4소대 골대 쪽을 향했다.
솔직히 그냥 모른 체해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자신만큼이나 제대일이 코앞인 병장을 앞세워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이는 4소대의 버릇을 고쳐 주고 싶었다.
“지금부터 골 안 먹으면 되잖아.”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 내가 골키퍼를 보면 돼.”
“네? 김 병장님께서 말입니까?”
“그래!”
김성진 상병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김학도 상병이 다가와 말했다.
“에이. 말년에 그냥 가만히 계시지 왜 축구를 하신다고 그러십니까? 여태까지 축구도 하지 않으셨으면서 말입니다.”
“그럼 인마, 이대로 질 거야? 내기도 걸려 있다며.”
“정말 김 병장님께서 골키퍼를 보시겠다는 겁니까? 최 병장처럼요?”
김학도 상병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