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13화
14장 뜻대로 된다면 그게 인생이겠는가(11)
“침수 차인지 아닌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이네요.”
최무근 경장을 대신해 차 안을 살핀 김 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거 잭뿐만 아니라 뭔가 눅눅한 느낌이 드는 게 침수 차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때 사무실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팀장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이고, 선생님. 저희 애들이 큰 잘못을 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십시오. 계약대로 위약금까지 물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700만 원이라는 위약금을 처리하려면 팀장은 물론이고 밑에 있는 딜러들까지 적잖은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편이 기사화되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었다.
박은지도 위약금을 주겠다며 사과하는 팀장의 태도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진즉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잖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딜러도 인간이다 보니 이런 실수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실수라고 하시는 데 정말로 실수하신 거 맞아요? 세차하기 전에 제가 흙이 묻었다고 했는데 강하윤 딜러가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거든요.”
“어휴. 딜러라고 다 차를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외관상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흙 조금 묻은 거로 사고 차라 단정 짓기도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팀장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재주가 탁월했다.
“좋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 볼게요. 만약에 저처럼 여기서 차를 구매했는데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럼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보상해 주시나요?”
“네. 당연합니다. 실수로라도 문제 차량을 판매했다면 전액 환불과 함께 위약금까지 물어 드립니다.”
“정말이죠?”
“그럼요. 사무실에 가 보시면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보여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지난번에 최민경 씨는 왜 보상 안 해주셨어요?”
“최…… 누구요?”
“어? 팀장님도 아실 텐데요. 저에게 차를 팔려고 했던 저 강하윤 딜러님한테 한 달 전에 차를 산 여자분이거든요.”
“하, 한 달 전에요?”
“차량 번호도 말해 드려요? 검은색 그란져 16차 3821. 듣기로 그때 계약을 팀장님이 진행하신 거로 아닌데 전혀 기억을 못 하시네요.”
박은지의 말에 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박은지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눈치챈 것이다.
“뭡니까. 지금 그 사람 사주받고 온 겁니까?”
강하윤도 언성을 높였다. 자신이 박은지에게 했던 짓을 떠나 왠지 당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취재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 찍고 있다고.”
박은지가 핸드백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강하윤이 제 얼굴을 가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카메라 좀 치우라고요!”
“왜요? 카메라 없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까 그 험악한 분들 앞세워서 저 위협하시려고요?”
박은지가 경찰을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덩치 큰 사내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믿는 구석이 있더라도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철수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정황이 박은지의 카메라에 담긴 이상 사내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 대리! 뒤로 빠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팀장이 강하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자님. 저희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죠?”
“저희가 최민경 씨 만나서 잘 합의하면 되는 겁니까?”
“합의라뇨. 차량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확인되면 2배로 배상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합의를 하신다는 거죠?”
“그게…… 내부 규정상 최민경 씨에게 환불을 해드리는 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분이 워낙에 험하게 차를 타고 다녀서요.”
“아, 문제 차량이라고 해도 차를 타고 다니면 환불은 안 해주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러지 마시고, 우리 좋게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카메라 끄고 이야기하시죠. 여기 경찰분들도 와 계시는데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팀장이 사정하듯 말했다. 그 역시도 할 말이 많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더 이상 입을 열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박은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전에 먼저 약속부터 해주세요. 문제 있는 차라는 게 확실해지면 최민경 씨에게 환불을 해주실 거예요? 안 해주실 거예요?”
“후우……. 차량 확인해 보고 정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전액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2배 배상은요?”
“2배까진 어렵겠지만 차량 감가상각비를 고려해서 적정선에서 위로금 지급하겠습니다.”
“약속하신 거예요? 그때 가서 딴소리하시면 저 이 영상 어떻게 쓸지 몰라요.”
“그럼요. 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한 입으로 딴소리 잘하시던데요?”
“만약 그렇다면 영상 공개하십시오.”
“좋아요. 그럼 조만간에 최민경 씨와 함께 다시 만나 뵙는 거로 하죠.”
“같이요?”
“제가 안 오면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제발 카메라 좀 꺼주세요.”
“좋아요. 그날 차량 전문가하고 사회부 기자도 동행할 거예요. 그러니까 잠깐 시간 버시려는 거면 그냥 지금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박은지는 팀장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아울러 작심하고 공론화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쳐 팀장을 압박했다.
이 상황에서 팀장이 할 수 있는 건 백기 투항뿐이었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주십시오.”
“뭔데요?”
“기사 쓰시더라도 저희 단지는 익명으로 좀 처리해 주십시오.”
“지역은 나갈 텐데요?”
“그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그건 나중에 보상이 제대로 마무리되는 거 봐서요.”
“알겠습니다.”
팀장과 대화를 마친 박은지는 핸드백에 있던 소형카메라를 껐다.
그제야 팀장이 표정을 풀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어린 여자 앞에서 억지로 웃고 있으려니 얼굴에 경련이 이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창피함을 넘어 모멸감까지 들었다. 중고차 거래만 20년 넘게 해 오며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지만 오늘처럼 된통 물린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작심하고 쳐들어온 박은지에게 화를 낼 자신은 없었다.
“오실 때 연락 한 번 주십시오.”
“알겠어요. 그리고 감사해요. 팀장님.”
“네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팀장을 따라 직원들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최무근 경장이 다가왔다.
“취재는 다 끝나셨습니까?”
“네. 취재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경장님.”
“감사는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아, 넵. 살펴 가십시오.”
박은지가 별말 없자 최무근 경장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건 최무근 경장의 착각일 뿐이었다.
“이번 일에 경찰은 별 상관없는 건가요?”
“상관이 왜 없겠어요. 최미경 씨가 경찰서에 찾아가 하소연을 했는데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한 게 바로 저 최 경장인데요.”
“그럼……?”
“이번 취재로 썩은 싹을 전부 도려낼 수는 없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에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언론인의 사명이니까요.”
오상진은 잠시 박은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볍게 웃는 박은지의 모습이 퍽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애정이라기보다 존경에 가까웠다.
친구 삼고 싶은 여자.
반평생을 군대에서 지낸 것으로도 모자라 회귀 후에도 군 생활을 이어가는 오상진에게 박은지는 확실히 대단한 여자였다.
“아무튼 상진 씨,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별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만약 상진 씨가 없었으면 저도 취재를 마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요?”
“네. 사실 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실랑이가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상진 씨가 단번에 침수 차라는 걸 확인시켜 줘서 일이 편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보다 앞으로 중고차는 못 살 것 같아요.”
“왜요?”
“저런 일을 겪었는데 누굴 믿고 중고차를 삽니까.”
그러자 박은지가 피식 웃었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안 담그시게요? 세상에는 저런 사람들 말고 좋은 딜러들도 많아요.”
“그런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왜요? 차 사시게요?”
“네. 저도 슬슬 차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흠……. 뭐죠? 이 묘한 기분은?”
“네?”
“저 때문에 차를 사는 것 같진 않은데…… 누구예요? 혹시 다른 여자 생겼어요?”
박은지가 슬쩍 눈을 흘겼다. 그러다 당황해하는 오상진을 보고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닌데 상진 씨가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거죠.”
“하하. 그런가요?”
“그래도 살짝 서운하긴 해요. 저한테 기회라도 주시지.”
“……네?”
“아니에요. 아무튼 제가 아는 사람 있으니까 상진 씨 연락처 알려줄게요.”
“정말요?”
“제가 미리 말해놓을 테니까. 언제 시간 내서 한번 가 보세요.”
다음 날.
-강서구 쪽에 중고차차로 가셔서 임창석 대리님을 찾으세요. 제가 말해놨으니까. 제 이름 대면 아실 거예요.
박은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상진은 임창석 대리에게 전화를 넣어 원하는 차종과 구매 가능 금액을 말해주었다.
-지금 당장 매장에 있는 매물은 없지만 워낙에 인기 있는 차종이니까요. 매물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창석에게 연락이 온 건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오상진은 휴가를 내고 차량을 구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임창석 대리님 계십니까?”
“아, 은지 소개받고 오신 분 맞으시죠?”
“네. 오상진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임창석입니다.”
“아, 네에.”
“안 그래도 방금 차를 가져다 놨습니다.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임창석 대리는 곧바로 차량 쪽으로 오상진을 안내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회색 싼타페르가 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은지 소개도 받았으니 구매하신다면 특별히 매입가로 드리겠습니다.”
오상진은 싼타페르를 보며 감회에 빠져들었다.
생각해 보면 과거 처음 구매했던 차도 싼타페르였다.
돈이 없어서 10년이 지난 차를 200만 원에 업어오다시피 했지만 이렇다 할 잔 고장 없이 한동안 오상진의 든든한 발이 되어 주었다.
“3년 된 차입니다. 킬로 수는 이제 10,000을 조금 넘겼고요.”
“새 차나 다름없네요?”
“완전 신차급입니다. 전 차주분이 사업가인데 갑자기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급하게 내놓은 물건을 저희가 인수했습니다. 풀옵션이고 선루프까지 장착되어 있습니다.”
“좋네요.”
오상진은 다시 한번 싼타르페를 쭉 훑어보았다.
솔직히 최신형 차를 봐 오다 구형 싼타페르를 보니 멋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리 멀쩡한 싼타페르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중에 정진이 면허증 따면 물려 줘야겠다.’
오상진이 씩 웃었다.
그때 임창석 대리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은지, 아니, 박 기자와 무슨 사이십니까? 혹시 남자 친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