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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리셋 오 소위-111화 (111/1,018)

인생 리셋 오 소위! 111화

14장 뜻대로 된다면 그게 인생이겠는가(9)

“생에 첫 차를 제가 소개시켜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네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다가 사인하면 되죠?”

“네. 거기하고 여기하고, 또 여기요.”

강하윤은 박은지가 사인할 곳을 지정해 주었다.

박은지가 볼펜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강하윤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개털이긴 하지만 하나 판 게 어디야?’

강하윤이 속으로 기뻐할 때 박은지가 사인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차에 문제가 있으면 환불해 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환불해 줍니다. 여기 잘 보시면 계약상 문제 차량을 판매했을 시 계약금 두 배를 배상한다는 문구 보이시죠?”

강하윤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박은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확인했어요. 역시 우리나라 최대 중고차 매매단지답게 믿을 만하네요.”

“그럼요. 아까도 누차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신뢰와 정직으로 이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허위 매물이 난무하는 다른 중고차 매매단지하고 비교하시면 섭섭합니다.”

“네. 그럼 딜러님 믿고 계약서에 사인할게요.”

“넵!”

그때 갑자기 맞춰놨던 알람이 울렸다.

“어? 잠시만요. 전화가 왔네요.”

박은지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어, 오빠 무슨 일이야? 뭐? 이 근처에 왔다고? 에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아니야, 여기가 어디냐면…….”

박은지는 통화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들어온 박은지가 강하윤을 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남자 친구가 온다고 해서요.”

“남자 친구분이요?”

“네. 거의 다 왔대요.”

강하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하지만 거의 계약 마무리 단계고 분위기도 좋았던 터라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로부터 잠시 후.

“은지야.”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상진이 나타났다.

오상진을 본 딜러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박은지 또래의 평범한 남자일 거라 예상했는데 오상진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은지는 해맑은 얼굴로 오상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꼈다.

“오빠 왔어? 이 근처에 있었어?”

“어, 근처에 볼일 좀 보느라. 그런데 왜 혼자 왔어. 같이 가자니까.”

“오빠도 차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래도 내가 봐주면 좋잖아. 그건 그렇고 차는 골랐어?”

“응. 좋은 딜러 분을 만나서 좋은 차로 구입했어.”

“설마 사인은 하지 않았지?”

“사인? 지금 막 하려고 했는데.”

“그래? 일단 차부터 보자. 저기 제 여자 친구 차 좀 볼 수 있을까요?”

오상진이 고개를 돌리다 아니꼬운 얼굴로 서 있는 강하윤에게 눈을 맞췄다. 그러자 강하윤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세요.”

“차는 어디 있나요? 지금 바로 볼 수 있나요?”

“저 고객님이 구매하시겠다고 하셔서 지금 세차 보냈거든요. 곧 올 겁니다.”

“아, 네에.”

5분쯤 지나고 문제의 차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박은지가 오상진의 팔뚝을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왔다. 오빠 저거야. 어때? 생각보다 괜찮지?”

오상진은 완벽한 여대생 연기를 펼치는 박은지를 보며 감탄했다.

‘진짜 이럴 때 보면 감쪽같다니까. 완전 대종상 여우주연상 감이야.’

소개팅으로 만날 뻔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친구처럼 알고 지낸 지 꽤 됐지만 오늘처럼 가까이 붙어서 살가운 연인 연기를 펼친 건 처음이었다.

당연하게도 오상진은 박은지와 살갗이 닿는 것조차 신경 쓰였지만 박은지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는 건 물론이고 차를 기다릴 때는 피곤하다며 오상진의 어깨에 기대 눕기도 했다.

덕분에 사무실 안 딜러들도 박은지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찾아왔다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빠. 뭐 해? 가서 본다며?”

오상진이 잠시 멍하게 있자 박은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 그래. 가서 봐야지.”

오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하윤도 찜찜한 얼굴로 오상진을 따라나섰다.

“제가 차량을 좀 봐도 되죠?”

“그게…… 그러세요.”

강하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차를 마쳤으니 외부적인 흠결은 찾기 어려울 터. 어지간한 건 중고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니 남자 친구가 본다고 해도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오상진은 차량에 대해서 다수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박은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과거 중고차 때문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문제의 차를 두고 다투는 과정에서 오상진은 차에 대해 많은 걸 공부하게 됐다. 물론 이후로 그 지식들을 써먹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과거로 돌아와 활용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차종이 그란져 TG네요.”

“네. 5년 무사고입니다.”

강하윤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닛을 열었다.

“이 차 가격이 얼마라고요?”

“이것저것 다 해서 700만 원입니다.”

“네? 5년에 700만 원이면 너무 싼 거 아니에요?”

오기 전에 중고차 시세를 살펴봤던 오상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하윤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많은 고객분들이 저희 드림랜드를 찾아와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좋은 차를 싼 가격에 드리니까요.”

“그래도 그란져 TG인데…….”

오상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중고차 가격이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그란져 TG라면 이 가격에 매물이 나올 수가 없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가격인 거 저희도 인정합니다. 솔직히 여자 친구분께서 보셨던 매물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 이 매물을 보여드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만큼 귀한 매물이니까요.”

“여자 친구가 보려고 했던 매물하고 다른 건가요?”

“네. 그건 여자 친구분께서 오시기 직전에 판매가 완료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송한 마음에 조금 더 할인을 해드렸고요.”

“얼마나 빼주신 건데요?”

“그것까진 좀……. 아무튼 저희도 거의 마진 안 남기고 드리는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분께서 생에 첫 차라고 하셔서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이쯤 말하면 고마운 내색을 하거나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넘어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일을 키워야 한다는 특명을 받은 오상진은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았다.

“그래도 700만 원이면 너무 싼 거 같은데요. 혹시 문제 있는 차량을 판매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자 친구분께도 말씀드렸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신뢰와 정직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좀 더 살펴봐도 상관은 없는 거죠?”

“그야 상관없습니다만…… 차에 대해서 좀 아시나요?”

“조금요. 제 친구 녀석이 중고차 딜러를 하고 있어서요. 사실 친구 놈 매상 좀 올려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오상진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씁쓸히 웃었다.

“아, 네에…….”

덩달아 강하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고 많은 지인 중에 중고차 딜러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이 차를 판매할 경우 추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강하윤은 애써 오상진의 말을 부정했다. 그사이 오상진은 꼼꼼하게 차를 살펴 나갔다.

‘가장 인기 있는 흰색에 5년밖에 안 된 차량인데, 가격이 700만 원이면 크게 사고가 났다는 소리인데. 아니면…… 또 침수 차량인가?’

오상진은 일단 엔진룸 내부를 확인했다.

하지만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하긴 세차를 하고 왔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모든 흔적을 다 숨길 수는 없겠지.’

오상진은 예전에 알아두었던 침수 차량을 구분하는 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강하윤이 보는 앞에서 차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구릿한 곰팡냄새가 났다.

“음? 무슨 냄새죠?”

오상진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 무슨 냄새요? 저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이상한 냄새나지 않나요? 가령 물 냄새라든지?”

오상진이 슬쩍 떠보는 식으로 물었다. 강하윤이 움찔하다가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 방금 세차하고 왔잖아요.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그래요?”

그 뒤로 오상진은 침수 위주로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안전벨트를 끝까지 빼내 확인했다. 침수 차량이라면 그곳에 흙먼지가 묻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타나지 않았다. 엔진룸 덮게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닌가?’

오상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거 잭을 탈거해 확인했다. 순간 오상진의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거기에 흙이 묻어나 있었다.

“딜러님.”

“네?”

“거짓말하셨네요. 이 차 침수 차량이잖아요.”

“무, 무슨 소리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죠. 엔진룸이랑, 안전벨트는 다 청소하셨는지 몰라도 시거 잭은 그러지 못하셨나 봅니다.”

오상진이 말을 하면서 강하윤에게 시거 잭을 보여주었다.

오상진의 말처럼 시거 잭 안쪽에 범상치 않은 흙이 묻어 있었다.

“이, 이건…….”

“왜요, 이래도 거짓말하실 겁니까? 딜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침수 차량 체크하는 방법이요. 차량 냄새, 시거 잭, 엔진룸, 안전벨트. 다른 것은 다 청소하셨는데 시거 잭만 못하셨네요.”

강하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오상진의 손에 들린 시거 잭을 거칠게 낚아채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차 안 살 거면 그냥 가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면서 영업 방해를 하는 겁니까.”

그때 박은지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 저 그 차 샀어요. 조금 전 사인을 했는데…….”

“네?”

강하윤이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언제요?”

“방금요! 계약하고 돈 보내고 지금 나오는 길인데요.”

“뭐라고요?”

강하윤이 화들짝 놀라며 사무실로 뛰어들어가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정말로 입금자 박은지로 60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강하윤이 오상진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박은지가 일부러 대금을 통장에 입금시켜 놓은 것이다.

“제기랄!”

강하윤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계약서상 여차했다간 2배로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그럴 순 없지.”

잠시 고심하던 강하윤이 어딘가로 전화를 넣었다.

잠시 후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오상진과 박은지 앞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뭐야? 왜 남의 사업장에 와서 영업을 방해하고 그래.”

팔뚝까지 말려 올라간 소매 밑으로 휘황찬란한 용 문신을 그려 넣은 사내가 협박하듯 말했다.

이쯤 되면 겁에 질려야 정상이었지만 박은지는 오히려 잘 됐다며 핸드백을 고쳐 맸다.

“누구세요?”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 거 없고 지금 뭐 하는 건데?”

“뭘 하긴 뭘 해요. 차 사러 왔는데.”

박은지가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그러자 남자 중 하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차를 사러 왔으면 곱게 차만 사 갈 것이지. 뭔 개수작을 부려.”

“아저씨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요. 지금 누가 개수작을 부렸다는 거예요. 오히려 당신들이 침수 차량을 저에게 팔려고 했잖아요. 문제없는 차라면서요?”

그때 뒤쪽에 서 있던 강하윤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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