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셋 오 소위! 110화
14장 뜻대로 된다면 그게 인생이겠는가(8)
“네. 팀장님.”
직원이 컴퓨터 앞에서 잠시 뜸을 들이곤 말했다.
“팀장님, 그 차 있네요.”
“있어요?”
박은지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강하윤은 동료를 보며 물었다.
“차량 위치는?”
“저 뒤에 있잖아요.”
“아, 거기로 옮겼어?”
직원과 모종의 눈빛을 주고받은 강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은지에게 다가와 말했다.
“다행히 아직 차가 있다네요.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네.”
“그럼 가시죠.”
강하윤이 박은지를 데리고 간 곳은 차량이 가득 세워져 있는 구석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강하윤은 한참 동안 문제의 차량을 찾아 헤맸다.
“이 근처인데 왜 안 보이지?”
“왜요? 차가 없어요?”
“아뇨, 있다고 하는데…….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그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딜러 하나가 느긋하게 강하윤 쪽으로 다가왔다.
“형식아.”
“네.”
“혹시 말이야. 여기에 세워져 있던 아븐테 차량 어디 갔냐?”
“아븐테요? 혹시 차량번호가 28차에 5578번 말씀이죠?”
“어어, 그래 맞아!”
“방금 전에 팔렸어요.”
“뭐라고?”
강하윤은 애써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슬슬 시작인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은지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억눌렀다.
잠시 딜러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하윤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객님 죄송한데, 고객님께서 찾으시던 차량이 방금 팔렸다고 하네요.”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무실에서는 안 팔렸다고 했잖아요.”
“아마 그때 다른 사무실에서 매매가 진행 중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팔리지 않은 거로 나왔던 거고요.”
“그럼 저 그 차 못 사는 건가요? 어, 저 그 차가 너무 사고 싶어서 온 건데. 어쩌죠?”
박은지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강하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왕 오셨는데 다른 차라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다른 차요?”
“서울에서 오셨잖아요. 매장에 다른 좋은 차들도 많으니까 한번 보고 가세요. 혹시 아나요? 보신 차보다 더 마음에 드는 차가 나올지.”
박은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제가 너무 미안해서 웬만하면 안 보여주는데……. 제가 따로 숨겨 놓은 차가 있습니다.”
“네?”
“완전 신차급! 딱 보면 반하실 겁니다. 사실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보셨던 그 차 있지 않습니까.”
“네.”
“사실 그 차 사고 차량이었습니다. 막말로 그 차 사 갔으면 완전 사기당하시는 겁니다.”
“정말요?”
“그럼요. 차가 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전 몰랐어요.”
“당연히 모르실 겁니다. 원래 여자분들은 잘 모르세요. 그리고…….”
강하윤은 자신의 품에서 딜러증을 보였다.
“이거 아까 안 보여드렸죠?”
“이게 뭐예요?”
“딜러증이라는 건데 이거 없이 딜러라고 속이고 차량 파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걸리시면 안 돼요.”
“아…….”
박은지는 순진한 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넘어왔네.’
강하윤은 피식 웃으며 찍어 놓은 차량 쪽으로 박은지를 안내했다.
“바로 이차입니다. 깔끔하죠!”
박은지가 그 차량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와아. 정말 예쁜데요?”
강하윤이 보여준 차량은 고급스러운 흰색이 돋보이는 그란져 TG였다. 검은색이나 은색보다 흰색을 선호하는 여자들 특성상, 번쩍번쩍 광까지 낸 고급 세단을 보고 입을 벌리지 않을 리 없었다.
강하윤은 피식 웃으며 차량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일단 이 녀석 같은 경우에는 2000년식이고 1인 신조 차량입니다.”
“1인 신조요?”
“이 바닥 용어입니다. 주인이 새 차를 사서 계속 타고 다니다가 중고차로 팔았단 소리죠.”
“아, 그러니까 출고 이후 계속 한 명의 주인이 몰았다는 거죠?”
“어휴, 똑소리 나게 말씀하시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차는 무사고 차량인데 전 주인이 부잣집 사모님이셨어요. 듣기로는 그냥 서브 카로 종종 타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강하윤이 차량 문을 열고 보여주었다.
“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겨우 15,000㎞ 탄 차량입니다.”
“우와. 3년이나 지났는데 15,000밖에 안 탔다고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잘 안 보여드리는 차라고. 아마 전국 중고차 매장을 전부 다 뒤져봐도 이만한 차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차 가격은 얼마 정도 하는데요?”
“이 차 가격은 원래 보시려던 차량 가격보다 살짝 비쌉니다.”
“그래서 얼마…….”
박은지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러자 강하윤이 무슨 책자를 꺼내 확인을 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며 답했다.
“어디 보자, 2000년식에 킬로 수는 15,000! 거의 신차급에 풀옵션! 천오백오십인데. 에이, 아까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까. 오십 깎아서 천오백에 드리겠습니다.”
“네? 아까 아븐테는 칠백이었잖아요. 두 배나 더 비싼데…….”
“그 차량은 원래 칠백에 나온 거고. 그리고 이 차는 그 차보다 두 단계 더 위인 차량이에요. 이만한 가격에 찾기 힘듭니다.”
강하윤은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차는 없다는 걸 몇 번이나 강조하며 구매를 설득했다. 하지만 박은지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돈이 없음을 항변했다.
“제가 수중에 가진 돈이 칠백밖에 없어서요.”
“에이, 요즘 누가 현찰박치기를 합니까. 카드도 있고 대출도 받고 하는 거죠.”
“그건 좀……. 그리고 전 아까 그 차를 살 수 있다고 하셔서 온 거라서요.”
“원래 그런 차량은 희귀한 겁니다. 원 차주가 싸게 내놔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죠.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그 매물을 봤을 텐데 욕심이 안 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사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 좀 빨리 오시죠. 그리고 막말로 중고차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맡아달라고 하면 맡아준답니까? 그러다 막상 보시고 살 생각 없다고 말하면 저희만 곤란해지는 건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천오백은 너무 비싸고……. 게다가 이렇게 큰 차는 필요가 없어요.”
“으음…….”
강하윤이 자신의 턱을 만지며 잠시 고심했다.
호구 같아서 적당한 매물을 떠넘겨 볼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완강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놓칠 수는 없는 노릇. 7백만 원은 있는 듯하니 그거라도 뜯어내야 할 것 같았다.
“이 차는 정말 맘에 안 드십니까?”
“맘에는 드는데, 너무 비싸서…….”
“어떻게 한다.”
“그럼 저 오늘 차 못 사는 거예요?”
“하아, 고객님께서 정 그러시면 그 금액에 맞는 차량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그런 차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 보실 차는 방금 보셨던 차보다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그건 좀 이해해 주십시오.”
“네,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고객님께 좋은 차를 소개해 주는데 또 안 산다고 그러시면 저 정말 힘들어요.”
“저도 차 꼭 사고 싶어서 왔거든요.”
“네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자신이 짜증이 났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강하윤이 앞장서서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박은지도 정신없이 강하윤을 뒤쫓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오상진에게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걸 잊지 않았다.
“상진 씨 저 C-27번으로 이동 중이에요. 들어오시면 바로 아실 거예요.”
얼마 가지 않아 강하윤이 어떤 차 앞에 도착했다.
“자, 이 차량입니다.”
차를 보기가 무섭게 박은지가 인상을 썼다. 확실히 조금 전 봤던 차와는 확실히 달랐다.
“보닛을 열어서 한번 보시겠습니까? 엔진은 괜찮습니다.”
강하윤이 차량의 보닛을 열어 보여줬다. 박은지는 핸드백을 가슴 쪽에 꼭 끌어안은 뒤에 보닛을 훑었다. 강하윤이 그 모습을 봤지만 별로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았다.
‘파인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왜 저래? 아무튼 유난은.’
그때 박은지가 뭔가를 발견하고 강하윤을 불렀다.
“저기 딜러님.”
“네?”
“저기 저거 뭔가요? 제가 보기에는 흙먼지인 것 같은데…….”
강하윤은 박은지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마치 물결 모양처럼 흙먼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순간 강하윤이 당황했다.
“잠시만요……. 이게 뭐지? 아하, 이거 먼지예요. 먼지. 어떤 차량이든 이런 먼지는 다 붙어 있어요.”
“그래요? 혹시 문제 있는 차량은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제 말 믿으십시오. 그런 문제 있는 차량은 여기에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우리 드림랜드가 하루에 파는 차량이 몇 대인 줄 아십니까?”
“그거야 저는 모르죠.”
“대략적으로 300대 정도 팝니다. 그런데 문제 있는 차량을 팔면 우리가 어떻게 거래를 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강하윤이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강하윤의 얘기는 박은지의 핸드백에 들어 있는 소형카메라와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말 문제없는 거죠?”
박은지가 재차 물었다.
“당연하죠. 만약에 이 차에 문제가 있다면 제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강하윤이 양손을 펴 보이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럼 저는 딜러님만 믿으면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고객님 전 신용으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문제 있으면 환불은 물론이고 보상도 해드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하윤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그제야 박은지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 차로 살게요.”
“하하핫, 아주 잘 생각하신 겁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러 사무실로 가실까요? 차는 세차하고 정리를 한 후 사무실 앞으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가야 해요?”
“번거로우시더라도 그게 낫죠. 계약 시 유의사항 같은 것도 들으셔야 하니까요.”
“하아. 엄청 먼데.”
박은지가 뺑 돌아온 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편한 운동화 차림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부러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평소 신지도 않던 하이힐을 신었으니 벌써부터 발이 아팠다.
그러자 강하윤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지름길로 가면 금방이니까요.”
“……?”
“자, 그럼 가실까요?”
강승윤이 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방향을 잡았다.
제대로 가나 싶었지만 차량 사이를 가로질러 가다 보니 채 5분 만에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9.
“일단 앉아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네.”
사무실로 들어온 박은지는 다시 핸드백을 고쳐 매고 사무실을 쭉 살폈다.
순간 몇몇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박은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 강하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계약서를 가져와 내밀었다.
“자, 여기 보시면 차량번호 나와 있고요. 금액은 아까 말씀드렸고…….”
“아, 네.”
“천천히 읽어보시고 여기다가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네.”
박은지는 일부러 뜸을 들여 계약서를 살폈다. 그러자 강하윤이 계속해서 말을 걸며 박은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참, 고객님. 대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시불이십니까? 아니면 할부로?”
“아뇨, 전액 현금으로 할게요.”
“와우, 우리 고객님 알뜰하게 잘 모으셨나 봐요.”
“네. 제 생에 첫 차니까요.”
박은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