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내 생에 봄날은 왔다(5) >
인생 리셋 오 소위! 097화
13장 내 생에 봄날은 왔다(5)
사실 핫팬츠를 즐겨 입는 평소 옷차림에 비하면 많이 양호한 편이긴 했다.
다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현역 군인을 만나는 데 쫙 달라붙는 미니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왔다는 거 자체가 신경 쓰였다. 저 옷차림만 보고 오상진이 한소희를 가볍게 여길까 봐 더 걱정됐다.
그런 한 대위의 표정이 보였을까.
한소희가 더욱 신경질적으로 구둣발을 놀렸다.
오상진도 곧바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떤 사람이 나오나 궁금하긴 했지만 첫 만남인데 힐끔거리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애써 참았다.
또각 또각!
점점 또렷해진 구두 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췄다.
“일단 앉자. 어서.”
한 대위가 서둘러 한소희를 오상진의 맞은편에 앉혔다.
그 순간.
“어?”
오상진과 눈이 마주친 한소희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흘렀다.
‘낯이 익은데.’
오상진 역시 한소희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는지라 예의상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처음 만난 느낌이 아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부지런히 눈을 움직이던 한 대위가 불안한 마음에 냉큼 끼어들었다.
“하하, 일단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여기는 한소희라고 눈치챘겠지만 제 여동생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여기는 내가 말했던 오상진 소위.”
“한소희예요.”
한소희의 쌀쌀맞은 반응에 오상진이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뒤늦게 한소희와 만난 일을 떠올리고는 눈을 번쩍 떴다.
‘아차, 그때 봤던 그 아가씨잖아!’
군부대 근처에서 3중대 병사들과 다투던 그 당찬 아가씨.
김소희 중위와 이름이 같아 소희란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다 예쁜가 싶었는데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대위는 한소희가 오상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오해했다.
‘이 자식이. 아무리 오 소위가 싫어도 그렇지 얼굴에 티를 내면 어떻게 해?’
한소희가 싫다는 남자를 등 떠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한 대위는 오상진이 참 좋았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며 겪어온 오상진이라면 부모님 등쌀에 삐딱해진 한소희를 잘 보듬어 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한 대위는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오 소위, 우리 소희가 첫인상이 차가워서 그렇지. 아주 착한 애입니다. 절대 오 소위가 맘에 안 들어서 그런 거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소희야?”
한 대위가 한소희에게 눈짓을 줬다. 그러자 한소희가 대뜸 말했다.
“오빠, 나 저 사람 맘에 안 드는데.”
“엉? 뭐, 뭐라고?”
“맘에 안 든다고!”
“소, 소희야!”
한 대위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앞에다 대놓고 저렇게 말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한소희의 말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오상진 소위님?”
“네.”
“왜 연락 안 했어요?”
“아, 그게······.”
“제 연락처 가져가셨잖아요. 그런데 왜 연락 안 하셨어요? 설마 저 가지고 노신 거예요?”
한소희의 직설적인 말에 한 대위의 놀란 얼굴이 오상진 쪽으로 향했다.
“오, 오 소위!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오상진은 어쩔 수 없이 한소희를 만났던 일을 풀어냈다. 물론 한소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일부러 번호를 물어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호의로 나섰다가 그 후에 바빠서 연락하지 못했다는 정도로 둘러댔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오상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한 대위가 다시 한소희에게 면박을 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싫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
“먼저 연락 안 한 건 이 사람이거든?”
“내가 말 했잖아. 군인들 바쁘다고. 오빠가 소개시켜 주는 사람이 이 사람인 줄 어떻게 알아.”
“오빠 지금 이 사람 편드는 거야?”
“편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너 아까부터 이 사람, 이 사람 하는데 호칭을 좀 조심하지.”
한 대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소희의 좋지 않은 말버릇 중 하나라곤 하지만 밖에 나와서까지 철없이 구는 건 오빠로서 넘어가 줄 수가 없었다.
한소희도 고개를 끄덕인 후 오상진을 보았다.
“죄송해요. 제가 결례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상진 씨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러자 또 한 대위가 나섰다.
“소희야. 그래도 상진 씨가 뭐냐. 오빠라고 그래, 오빠.”
“오빠는 무슨······. 아무튼 남자들은 오빠 소리 듣는 거 엄청 좋아한다니까.”
“야, 쫌!”
한소희에게 쩔쩔매는 한 대위의 모습에 오상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빠라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냥 편안하게 이름 부르십시오. 소희 씨. 그리고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연락해도 안 받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왜요?”
“워낙에 미인이시고 해서요.”
오상진이 적당히 칭찬하자 한소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도 이렇듯 다시 보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거짓말. 아까 나 못 알아봤잖아요?”
“그날은 좀 어둡기도 했고 헤어스타일도 달라지고 해서요.”
“저는 상진 씨 한 번에 알아봤는데요?”
“미안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은 거 같네요.”
“흥. 알면 됐어요.”
농담이 오가면서 어색했던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변해 갔다.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눈치를 살피던 한 대위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두 사람 다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네. 그럼 이참에 내가 좀 더 밀어붙여서 아예 못을 박아버릴까?’
한 대위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소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빠!”
“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소개해 줬으면 이만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예의 아냐?”
“벌써?”
“뭐가 벌써야. 오빠가 데이트하는데 내가 중간에 끼어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야! 오빠 여기 온 지 30분도 안 됐다. 그리고 밥도 안 먹었는데······.”
한 대위가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한소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원래 주선자는 30분 안에 빠져주는 게 예의인 거 몰라?”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으니까 좀 가.”
“그럼 밥은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여자 친구하고 맛있게 먹으면 되지. 안 그래요, 상진 씨?”
“네? 아······. 하하.”
“들었지? 상진 씨도 좀 빠져 달래.”
“쳇. 알았어.”
한 대위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지 꼭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한 대위님이 소희 씨를 참 많이 아끼나 봅니다.”
“아끼긴요. 그냥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애 취급하는 거예요.”
한소희가 투덜거렸다. 한소희 입장에서야 오빠가 저러는 게 싫겠지만 같은 여동생을 가진 오빠 입장에서 오상진은 한 대위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때 한소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참, 그런데 소개팅은 왜 나온 거예요?”
그 말이 꼭 자신에겐 연락도 하지 않고 소개팅 자리에 나왔다는 책망처럼 들려서 오상진이 냉큼 변명을 했다.
“한 대위님께 신세 진 게 많아서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여자가 있는데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셔서요.”
“주변에서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면 자주 소개팅하시는 편인가 봐요?”
“그럴 리가요. 솔직히 바빠서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한 대위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소개팅도 제가 시간을 못 맞춰서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하게 된 것이고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제가 바쁜 건 아마 한 대위님이 가장 잘 아실 겁니다.”
“흠. 뭐 알겠어요.”
오상진이 아무 여자나 막 만나고 다니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한소희가 기분을 풀었다. 그리고 오상진을 천천히 살폈다.
‘어디 보자. 머리는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이네. 그런데 되게 잘 어울리네, 이 머리. 얼굴은 나름 봐줄 만하고. 옷 입는 스타일도 깔끔하니 좋네.’
군부대 근처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사복을 입은 오상진의 모습은 남자답고 듬직했다.
게다가 오상진이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 의상이 너무 심심했나? 다른 남자들은 내 몸매 훔쳐보느라 눈이 가만있질 않던데. 이 남자는 그러지 않네. 하긴. 그때도 그랬지 참.’
한소희는 오상진과 첫 만남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날 군인들과 마주칠 때마다 훑는 듯한 시선이 싫었는데 단 한 사람, 오상진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오상진에게 호감이 갔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상진도 한소희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정신 차리자, 오상진. 정신 차리자, 오상진.’
오상진은 예전에 아찔했던 첫 만남을 자꾸만 생각났다. 첫 만남에 비해 지금은 상당히 얌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함부로 눈을 움직여서는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오상진. 정신 차려야 해!’
그리고 그런 오상진의 행동은 한소희에게 있어서 호감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우리 주문 언제 해요?”
“네?”
“아까부터 종업원이 이쪽만 보고 있는데. 여기 마음에 안 들면 자리 옮길까요?”
“아, 아닙니다. 주문해야죠.”
오상진은 냉큼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한소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상진 씨가 알아서 주문해 주세요.”
“제가 말입니까?”
오상진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메뉴판을 확인했다.
맨 첫 장에 코스 요리가 있었다.
A 코스가 25만 원.
B 코스가 20만 원.
C 코스는 16만 원.
생각보다 가격이 나갔지만 소개팅 자리고 연락을 하지 못한 걸 고려해 코스 요리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종업원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소희 씨. 여기 코스 요리가 있는데 이걸로 할까요?”
“코스 요리요?”
한소희도 자신 앞에 놓인 메뉴판을 확인했다. 그러다 만만치 않은 가격을 확인하고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에도 코스 요리 먹었는데 별로였잖아. 그냥 간단히 스테이크 먹자, 오빠.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스테이크?”
“에잇. 이리 줘. 여기 안심 스테이크 2개 주세요.”
한소희가 종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스테이크 굽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오빠는 어떻게 먹었지? 미디움이었나? 미디움 웰던?”
“미, 미디움.”
“미디움으로 두 개 해주세요.”
“네. 그럼 와인은······.”
“와인은 됐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물러나자 한소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진 씨. 무슨 첫 데이트부터 코스 요리예요? 원래 여자들 만나면 막 이렇게 사고 그래요?”
“그럴 리가요. 소희 씨니까 좀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저니까 그런 거 확실하죠?”
“그럼요.”
“그래도 코스 요리는 좀 심했어요. 그리고 이 집 코스 요리, 생각보단 별로예요.”
“그래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원래 이런 데 자주 오세요?”
“아뇨. 약속은 한 대위님이 잡아 주셔서요.”
“그렇죠? 어쩐지. 너무 오빠 스타일이라 했어요.”
“여기가 한 대위님 단골 가게인가 보죠?”
< 13장 내 생에 봄날은 왔다(5) > 끝
ⓒ 세상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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