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전우이지 말입니다(2) >
인생 리셋 오 소위! 089화
12장 전우이지 말입니다(2)
박은지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오상진은 그 분위기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아, 그래요? 그 사람은 좋겠네요.”
“그렇죠. 저도 완전 부러워요.”
“뭐에요? 그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저하고 이야기하기 싫어요?”
“그럴 리가요. 그럼 은지 씨는 로또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으세요?”
오상진이 슬쩍 분위기를 돌렸다. 그러자 박은지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저요? 으음······. 글쎄요. 금액이 얼마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번처럼 200억에 당첨되면 신문사를 차리고 싶어요.”
“신문사요?”
“네. 요새 하도 간섭이 심해서 출판사 하나 차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기사들을 마음껏 쓰고 싶어요.”
“멋지네요.”
오상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박은지에게 기자가 천직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상진 씨는 뭘 하고 싶어요?”
“글쎄요, 뭘 해야 할까요?”
오상진은 잠시 말을 아꼈다. 아직 수령한 건 아니지만 조만간 1등 당첨금을 받으면 그걸로 뭘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오상진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해 보였을까.
“뭐예요. 설마 이번 1등도 상진 씨에요?”
박은지가 짓궂게 눈을 흘겼다.
“그, 그럴 리가요. 그냥 기분 한 번 내봤습니다. 과연 200억에 당첨되었다면 뭘 해야 할까 하고 말입니다.”
“설마 상진 씨도 형부처럼 로또 계속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어? 그것도 아십니까?”
“형부는 언니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본데 언니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그리고 숨길 거면 잘 숨기던가. 로또 영수증을 지갑 안쪽에 둔다고 언니가 모를 거 같아요?”
“이런, 들켰군요. 중대장님께는 제가 조용히 언질해 두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언니가 많이 속상해하거든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시고요.”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주문한 김치찌개 나왔다.
“그럼 한번 먹어볼까요?”
박은지는 곧바로 수저를 들었다. 오상진이 앞접시에 덜어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며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입에 가져갔다.
“와, 맛있다!”
“입에 맞으십니까?”
“맛집 맞네요. 정말 맛있어요.”
“후후, 저만 믿으시라고 했잖아요. 어서 드세요.”
“네. 상진 씨도 많이 먹어요.”
박은지는 밥 한술을 크게 뜬 뒤 반쯤 익은 김치를 올려 야무지게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오상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이래서 은지 씨가 좋다니까.’
오상진도 본격적으로 식사를 했다. 그렇게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 뒤 오상진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말입니다. 우리 부대에 취재 온 이유가 민용기 상사님 때문입니까?”
박은지가 흠칫했다. 그러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그렇군요.”
“혹시 그분에 대해서 따로 들은 얘기라도 있어요?”
“아뇨. 솔직히 제가 요새 너무 바빠서요.”
“아, 얘기 들었어요. 체력 테스트 하다가 산악 구보까지 했다면서요? 겸사겸사 사람도 구하셨다고 그러던데?”
“하하······. 저희 중대장님이 별 얘기를 다 하셨네요.”
“그렇다고 괜히 중대장님께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언니랑 비밀이 없는 사이라서요.”
“네네, 이해합니다.”
박은지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우리 그만 일어나죠. 또 취재를 가 봐야 해서요.”
“다시 부대에 들어가십니까?”
“아뇨. 이건 다른 취재. 기자들이 좀 바쁘답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오상진이 계산을 치렀다. 고작 이 정도로 박은지가 만족할까 싶었지만.
“잘 먹었어요.”
박은지는 거하게 대접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마워했다.
“아닙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곳에서 대접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전 이걸로 충분해요. 그럼 담에 또 봬요.”
박은지는 손을 흔들며 차를 타고 떠났다. 그런 박은지를 눈으로 마중한 뒤 오상진도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3.
“응?”
행정실로 들어가려던 오상진의 눈에 저만치 박중근 하사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는데 통화 내용이 심각했다.
“그래서 얼마가 더 필요한데. 알았어! 울지 말고,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이 사람아, 지금 그게 중요해? 그래.”
통화를 하던 박중근 하사도 뒤늦게 오상진과 눈이 마주쳤다.
박중근 하사가 움찔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대장님 오셨어, 이따가 다시 통화해.”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오상진에게 다가왔다.
“소대장님, 식사하셨습니까?”
“네, 박 하사도 했습니까?”
“네.”
“그런데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닙니다. 별일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뭔가 미심쩍었지만 박중근 하사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오상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참, 박 하사.”
“네.”
“이번에 새로 오신 행보관님에 대해 아는 거 있습니까?”
“행보관님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분에 대해 알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그런 거라면 제가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사관들끼리 조만간 행보관님 환영식을 할 모양입니다. 그때 제가 한번 안테나 돌려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요.”
“에이, 고맙긴요. 그리고 전에 주셨던 LA갈비는 잘 먹었습니다.”
LA갈비는 전에 산악 구보 때 우승 상품이었다. 짠돌이 대대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보니 양이 많지 않아 오상진은 자신의 몫을 박중근 하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말이다.
“아, 그거 말입니까.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러십니까. 아무튼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저 챙겨주는 건 소대장님밖에 없다고 와이프가 정말 좋아했습니다.”
“소대장이 부소대장 챙기는 거야 당연한 거죠. 그리고 조만간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떻습니까?”
“저는 언제든지 콜입니다.”
“약속한 겁니다?”
“네, 하하. 그럼 전 일과 보겠습니다.”
박중근 하사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걸어가는 박중근 하사의 어깨가 왠지 모르게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통화를 하는 것으로 보면 돈에 관련 된 것 같은데······.”
오상진은 그런 박중근 하사가 마음에 걸렸다.
“행정반에 있는 부소대장들에게 슬쩍 물어볼까? 아니지. 그보다는······ 행보관에게 슬쩍 물어보는 편이 낫겠어.”
오상진의 머릿속에 1중대 행정보급관인 김도진 중사가 떠올랐다.
“있다가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오상진은 일단 행정반에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아 시가전 교육훈련에 관한 교재를 살폈다.
그런데 4소대장이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오상진을 불렀다.
“저기, 1소대장님.”
“네.”
“혹시 말입니다. 박 하사······.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오상진이 심각해졌다.
“왜 그러죠?”
“아니, 아침부터 뭐가 그리 바쁜지 계속해서 전화를 받으러 왔다갔다 하더란 말입니다. 얼굴 표정 역시 좋지 않고. 그래서 혹시 1소대장님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 하사를 저도 조금 전에 잠깐 본 것이 다여서······.”
오상진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교재를 덮었다.
4소대장까지 저리 말하는 걸로 봐서 일이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알아봐야겠어. 박 하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이야.’
오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잠깐 행보관님 만나 뵙고 올게요.”
“네.”
오상진이 행정반을 나와 중대 창고로 향했다. 지금 이시간이면 김도진 중사는 중대 창고에 있을 시간이었다.
충성부대는 각 중대별로 행정보급관이 존재했고, 그 위에 대대 상임행정보급관이 있었다.
그 상임 행정보급관이 이번에 새로 온 민영기 상사였다. 상임 행정보급관은 주로 상사 또는 원사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중대 행정보급관은 짬이 높은 중사나 상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오상진은 불현 듯 자신이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이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뭘 하든, 어떻게 살든 궁금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오직 자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회귀를 한 이후로는 이런 일들을 그냥 지나 칠 수 없게 됐다.
특히나 박중근 하사는 1소대 부소대장이었다. 늘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받쳐준 덕분에 최용수 병장 사건 이후에도 1소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래, 명색이 소대장이 되어서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 오상진이 중대 창고에 도착했다. 창고 앞에는 김도진 중사가 뭔가를 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행보관님.”
오상진은 짬이 되는 김도진 중사를 깍듯하게 대우했다. 현재 중사 짬밥에서 최고 고참이 바로 김도진 중사였다.
그래서인지 부사관들 대소사는 물론이고, 선배들의 일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괜히 김도진 중사가 부대에서 마당발로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응?”
김도진 중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오상진를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어이구, 소문이 자자한 우리 1소대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행보관님 창고 정리 중이십니까?”
“아뇨, 재고 파악 중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물론이죠. 소대장님은 식사하셨습니까?”
“네. 저도 먹고 왔습니다.”
“요즘 군대짬밥 잘 나오지 않습니까? 저도 일이 바빠서 병사 식당에서 먹었는데 녀석들이 제법이더란 말입니다. 물론 아줌마의 솜씨도 없잖아 있지만······. 하하!”
김도진 중사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3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보낸 시절이 적잖아서일까. 말투나 행동에서 노련함이 풀풀 풍겼다.
“그렇죠. 요즘 짬밥 정말 맛있게 나옵니다.”
오상진도 맞장구를 쳐주며 말했다. 그러다가 창고를 두리번거렸다.
“그간 별일 없으셨죠? 맞다. 이렇게 창고에서 고생하시는데 그냥 왔습니다. 제가 음료수라도 사 들고 왔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러게 말입니다. 빈손으로 오시고······. 실망입니다.”
“지금이라도 뭐 좀 사 올까요?”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일단 저쪽에 앉으시죠. 믹스 커피가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제가 타 드리겠습니다.”
“에이 아닙니다. 제가 타 드리겠습니다.”
오상진이 직접 움직이려고 하자, 김도진 중사가 말렸다.
“무슨 소대장님께서 커피를 타십니까. 그러면 안 되죠. 그냥 앉아 계십시오.”
김도진 중사는 오상진을 자리에 앉힌 후 커피포트를 켰다. 그리고 종이컵 두 개에 꺼내 커피 믹스를 부은 후 커피포트에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물이 다 끓자 종이컵에 부은 후 수저로 몇 번 휙휙 저어 오상진에게 건넸다.
“자, 여기 커피 대령이오. 아실지 모르겠지만 커피는 제가 미스 김보다 잘 탑니다. 드셔 보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오상진이 피식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김도진 중사는 특유의 입담으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미스 김이면 요 앞에 있는 별 다방 미스 김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 별 다방 말고 요번에 새로 생긴 장미 다방이라는 곳인데······. 어? 그런데 1소대장님이 별 다방을 어떻게 압니까?”
“네? 아, 한 번 가 봤습니다.”
오상진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커피를 마셨다. 김도진 중사의 입가를 타고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졌다.
< 12장 전우이지 말입니다(2) > 끝
ⓒ 세상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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