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일보 앞으로!(7) >
인생 리셋 오 소위! 087화
11장 일보 앞으로!(7)
잠시 뚫어지라 TV를 바라본 오상진은 로또 번호를 확인 후 조용히 TV를 껐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2층 테라스로 나갔다.
“후우······.”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일부러 테라스로 왔는데 막상 악이라도 지르려고 하니 쑥스러웠다.
군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방에 함성을 내지르곤 했는데.
새집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기쁨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얼마일까? 이번 주에만 천억 원 가까이 팔렸다는 기사를 본 거 같은데 300억? 세금 때문에 400억까지는 무리겠지?”
오상진은 흥분이 되는지 가슴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나 혼자 당첨된 걸까? 하아. 아니야. 오상진. 욕심부리지 말자. 설사 다른 당첨자가 나오더라도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자.”
이미 세 번이나 로또에 당첨이 됐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내 준 하늘도 화를 낼 것 같았다.
“아무튼 진짜 야무지게 잘살아보겠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상진이 다짐하듯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밤하늘의 별이 반짝, 빛을 냈다.
10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1층으로 내려오니 오상희가 이미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다.
“어? 큰 오빠다. 이삿짐 다 정리했어?”
“넌 인마. 일찍 좀 와서 짐 정리하는 거 도와주지. 이 시간까지 뭐했어?”
“뭐래? 중대장님 부부 온다고 친구 집에서 놀다 오라며.”
“그래도 너무 늦잖아. 너무!”
“뭐야? 이랬다, 저랬다.”
오상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으며 물었다.
“오빠. 내 물건 손 안 댔지?”
“박스 뜯지도 않았잖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박스에 대놓고 건드리면 가만 안 둠, 이라고 써 놨는데 누가 그걸 건들겠냐.”
“그럼 다행이고.”
오상희가 제 방으로 들어갔다. 본래 오정진과 2층 방을 두고 경쟁했지만 수험생 생활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결단에 오상희의 방은 거실 화장실 옆방으로 결정이 났다.
“방 예쁘네.”
오상진이 오상희의 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오상희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정진이 오빠 대학 가면 바로 방 바꿀 거야.”
“그러시던가요.”
“암튼 나 예쁜 침대 사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렇지 않아도 주문했으니까 곧 올 거다.”
“정말?”
“그나저나 정진이는? 너는 왔는데 왜 정진이는 안 와?”
“작은 오빠를 왜 나한테 물어봐? 나랑 학교도 다른데. 그리고 작은 오빠, 큰 오빠랑 같은 고등학교 다니거든?”
“그랬냐?”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작은 오빠 올 시간 됐으니까 큰 오빠가 마중 나가보던가.”
“마중? 내가?”
“뭐래? 오빠 올 때마다 맨날 작은 오빠가 마중 나갔거든?”
“그래 볼까?”
생각해 보니 오상진은 동생 오정진을 한 번도 마중 나가본 적이 없었다. 약간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모교도 한 번 찾아갈 겸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방에서 대충 윗옷만 걸쳐 입고 아파트를 벗어나 학교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야, 이 길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흘렀지만 학교 주변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게들도 그대로였다.
몇 년 전까지 오상진이 매일 다녔던 이 길을 오정진이 다닌다고 생각하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감상에 젖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학교 교문 앞까지 왔다.
“이제 끝날 때가 되었을 텐데······.”
때마침 학교 종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학생들이 하나둘 나왔다.
오상진은 두리번거리며 오정진을 찾았다.
“어디 있지? 늦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오정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안 나와.”
오상진은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는데 금방 통화가 연결됐다.
“야, 오정진! 너 왜 안 나와?”
-무슨 소리야? 나 집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뭐? 집에 벌써 왔다고? 나 정문인데?”
-정문? 형이 왜 정문에 있어?
“그게······ 너 길 잃어버릴 거 같아서 데리러 나왔지.”
-그럼 말을 하지. 나 후문으로 나와서 지름길로 집에 왔는데.
“지름길? 하아. 알았다.”
오상진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름길은 또 어디야. 모처럼 형 노릇 한번 해주려고 했더니······.”
오상진은 허탈함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한편, 오정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갑자기······.”
“누구야?”
함께 가던 정수연이 물었다.
“아, 우리 형.”
“형이 마중 나오기로 했어?”
“그냥. 오늘 이사해서 겸사겸사 얼굴 보려고 온 거 같은데?”
“그래? 형하고 친해?”
“뭐, 그럭저럭.”
“그렇구나.”
정수현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정진에게 형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학교까지 마중 올 만큼 살가운 형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내친김에 오정진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었다. 공부 잘하고 똑 부러지는 반장이라는 걸 떠나서 정수현은 오정진에게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오정진은 말없이 묵묵히 앞으로 걷기만 했다. 학급에서 인기 많은 동급생과 같이 하교를 하게 됐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참, 정진아. 너 여동생도 있다고 했지?”
“응.”
“우리 학교 다녀?”
“아니, 다른 데 다녀.”
“왜에?”
“그렇게 배정이 됐어.”
“아,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 아파트로 언제 이사 온 거야?”
“오늘.”
“오늘? 그럼 우리 졸업할 때까지 등하교 같이하면 되겠다.”
정수현이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오정진의 눈치를 살폈는데 정작 오성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네. 등교는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하교는 같이하자. 혼자 오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정말이지?”
“그래.”
“헤헤.”
오정진의 무뚝뚝한 대답에 정수현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해졌다.
“정진이 너는 몇 동이야?”
“106동이라고 들었는데.”
“뭐? 정말? 나도 106동인데······. 신기하다. 그치.”
정수현은 마치 운명이라는 듯 신기해하며 박수까지 쳤다. 그렇게 106동 앞까지 왔을 때
“정수현!”
1층 현관에서 누군가가 정수현의 이름을 불렀다.
정수현이 움찔 놀라며 1층 현관 쪽으로 향했다.
“어,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오니!”
“야자한다고 했잖아.”
“야자한 거 맞아? 딴짓하다 늦은 거 아니고?”
정수현의 어머니가 힐끔 오정진을 바라봤다. 정수현이 올 시간이 되어서 나와봤다가 오정진과 다정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봤으니 의심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오정진은 정수현의 어머니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정수현의 어머니는 오정진을 찬찬히 보며 물었다.
“그래. 안녕. 그런데 넌 누구니?”
정수현이 곧바로 나섰다.
“어, 엄마. 우리 반 친구.”
“친구? 그래? 너 데려다준 거야?”
“아니, 친구도 여기 산대.”
“여기 살아?”
정수현 어머니는 오상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아니라지만 낡은 신발이나 어딘지 모르게 싼 티가 나는 교복 재질로 봐서 잘 사는 집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값이 떨어졌나?”
정수현 어머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엄마! 얼른 가자.”
“얘는. 왜 이렇게 보채.”
정수현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상진도 자동문이 닫히기 전에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13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주 서게 됐다.
정수현 어머니는 이때다 싶어 오정진을 계속 훑어봤다. 그런 어머니의 행동이 부끄러웠던지 정수현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엄마, 좀······.”
“가만히 있어 봐, 얘.”
정수현 어머니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면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우리 정현이랑 친구라고?”
“네.”
“부모님은 뭐하시니?”
“어머니는 식당 다니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너······ 공부는 좀 하니?”
정수현의 어머니는 평소 친구를 가려 사귀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면서 수준이 맞는 애들이 아니라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정수현의 어머니가 보기에 오정진이 정수현과 친구로 지내려면 공부라도 잘해야 할 것 같았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몇 등인데? 우리 수현이보다 잘해?”
정수현은 학교에서 전교 5등이었다. 적어도 학업으로는 부끄러울 게 없는 딸이었다.
하지만 정수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엄마!”
“귀청 떨어지겠다. 얘!”
“정진이 우리 반 반장이야.”
“반장? 맨날 전교 1등 한다는 그 애?”
“그래,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
어머니는 금세 표정이 바뀌며 말했다.
“어머나, 그렇구나.”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세 사람이 탔다.
반장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우리는 7층인데 너는 몇 층이야?”
정수현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결 살갑게 변했다.
“15층입니다.”
“15층? 알았어.”
정수현 어머니가 15층을 누르는데 움찔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오정진을 바라봤다.
“맨 꼭대기 층에 사니?”
“예!”
“그, 그럴 리가 없는데······. 거긴 김 사장님 댁인데.”
정수현이 또 나서서 말했다.
“오늘 이사했대, 오늘!”
“오늘?”
잠시 후 7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정수현이 오정진을 보며 말했다.
“저, 정진아 잘 가. 내일 보자.”
“그래, 잘 가. 어머님 안녕히 가세요.”
오정진은 그 와중에도 예의를 잊지 않았다.
“그래. 너도 잘 올라가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정수현은 어머니를 흘겨보며 소리쳤다.
“내가 엄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
“얘는 진짜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보다 진짜 쟤 우리 아파트 사는 거 맞아?”
“맞겠지. 그럼 반장이 거짓말하겠어?”
“낮에 이사를 하긴 했는데 정말 쟤네 집인가?”
정수현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정수현을 보며 물었다.
“수현아, 쟤 말이야.”
“아, 또 왜?”
“쟤네 엄마 식당 일 한다며?”
“근데 뭐? 엄마가 식당 일 하니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는. 엄마를 뭐로 보고. 그게 아니라 쟤네 엄마 큰 식당 운영하는 거 아니니?”
“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정수현은 소리를 빽 지르고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현아!”
정수현의 어머니가 서둘러 정수현을 쫓아갔다.
11
15층에서 내린 오정진이 문 앞에 섰다. 몇 번 오긴 했는데 오늘부터 이 집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 신순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정진이에요.”
“왔니? 잠시만.”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환한 표정의 신순애가 오정진을 맞이했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
“이 아파트 사는 친구랑 같이 와서 금방 왔어요.”
“그래? 다행이네.”
집 안으로 들어간 오정진은 TV를 보고 있던 오상희와 잠깐 눈을 마주친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방이 휑했지만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방이라서일까.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형. 고마워.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은혜 꼭 갚을게.”
어둑한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오정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형이었지만 이젠 오상진이 꼭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 11장 일보 앞으로!(7) > 끝
ⓒ 세상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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