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일이 점점 커지네(1) >
인생 리셋 오 소위! 072화
10장 일이 점점 커지네(1)
1.
오랜만에 머리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나온 박은지는 솔직히 신이 났다.
말은 취재라고 했지만 겸사겸사 오상진의 얼굴도 볼 수 있으니 장시간 운전도 피곤하지 않았다.
“여기 근처인 것 같은데······.”
내비게이션을 따라 한참을 달리던 박은지가 이내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오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저예요. 거의 도착했는데요. 어디세요?”
-마을 입구까지 나와 있습니다. 아마 쭉 오다 보면 제가 보일 겁니다.
오상진의 말을 듣고 박은지가 정면을 응시했다. 그때 저 멀리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눈이 들어왔다.
순간 박은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 찾았어요. 바로 갈게요.”
박은지는 휴대폰을 끊고 차에서 내려 오상진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요?”
“아뇨,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제 차에 타요.”
“네.”
오상진이 차에 올라탔다. 박은지가 오상진을 보며 물었다.
“잘 지냈어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은지 씨도 잘 지냈습니까?”
“저야 똑같죠. 취재하고 새벽에 마감하고, 또 취재하러 나가고.”
“힘드시겠습니다.”
“사는 게 다 힘들죠, 뭐. 그런데 이 길로 가는 거 맞죠?”
“네,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네에.”
박은지가 히죽 웃으며 차를 몰았다.
“여기입니다.”
“여기에요?”
박은지가 차를 세우고 차창 밖을 확인했다. 그런데 밖이 뭔가 부산스러웠다.
“무슨 일 생겼나요?”
“일이요?”
“저기 밖에······.”
박은지가 가리키자 오상진이 고개를 돌려 차창을 봤다. 그 순간 뭔가를 발견했는지 오상진이 재빨리 차에서 뛰쳐나갔다.
“상진 씨, 왜 그래요?”
하지만 오상진의 귀에까진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다급한 그의 모습에 박은지는 차의 시동을 끄는 것도 잊어버린 채 후다닥 내렸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어멋! 멧돼지?”
박은지의 시선이 오상진에게 향했다. 오상진은 매우 조심스럽게 멧돼지 근처로 다가가며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박은지는 곧바로 기자 모드로 바뀌었다. 지금 이 상황을 취재해야겠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다.
박은지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 몇 장으로 끝내는 것보다 화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동영상으로 촬영해 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상진 씨가 다치면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꽤 이성적인 모습으로 오상진의 상황을 촬영해 나갔다.
제일 먼저 오상진을 찍고, 천천히 폰을 움직여 할머니의 모습도 동영상에 담아냈다.
“좋았어.”
다시 멧돼지를 찍은 후 화면을 확인했다. 그 와중에 병사 두 명이 할머니 곁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 역시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촬영했다.
박은지는 좀 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이동을 했다. 그리고 오상진과 할머니가 한 앵글에 잡히도록 만들었다.
“좋아.”
박은지는 휴대폰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안에서 오상진이 멧돼지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낮은 자세로 대치했다.
그사이 병사 둘이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부축을 한 후 멧돼지에게서 멀어졌다.
이 모든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촬영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박은지는 취재를 하면서 부지런히 병사들과 오상진을 응원했다. 그런데.
“어이쿠야, 나 죽네, 나 죽어!”
갑자기 할머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의 부축을 받던 할머니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들은 당황했고 자연스럽게 멧돼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멧돼지가 할머니 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안 돼!”
그와 동시에 오상진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멧돼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까악! 상진 씨!”
박은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상황상 누구 하나는 크게 다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상진의 엄청난 포효에 놀라기라도 한 듯 멧돼지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도망을 가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모든 게 핸드폰에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후우. 정말 다행이야.”
박은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영상 촬영을 종료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조금 전 촬영한 영상을 확인했다.
다시 봐도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상진 씨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끼어들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자칫 잘못했다간 상진 씨가 크게 다칠 수도 있던 상황이었는데······.”
시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참된 도리라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오상진처럼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나라 지키랴, 대민지원하랴, 고생하는 군인들을 위해 기사라도 한 줄 써줄까 했는데 뜻하지 않은 기삿거리가 생겼네.”
박은지는 휴대폰 영상을 자신의 이메일로 전송했다.
“아무튼 여길 오길 잘한 것 같아.”
2
그 시각.
“이보게. 소대장! 소대장!”
저 멀리서 이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멧돼지가 나타났다면서?”
“네.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디 있어?”
이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뒤로 몇몇 마을 주민도 함께 왔다.
“그게······ 방금 전에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설마하니 이 많은 사람들이 멧돼지 때문에 몰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산으로 도망갔어?”
“네.”
“후우, 다행이네. 난 또 큰일 치르는 줄 알았어. 아무튼 다행이야.”
이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오상진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저기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뒤로 넘어지면서 좀 다치신 것 같습니다.”
“저 할망구가 넘어져? 아니 왜?”
“병사들 말로는 부축을 하는 과정에서 주저앉으면서 좀 다치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가 보자고.”
“네.”
오상진과 이장은 곧장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방에 드러누워 신음을 흘렸다.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아이고······.”
이장이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좀 어떻소?”
“어떻긴 뭘 어때! 나 죽겠어. 나 죽는다고.”
할머니가 아프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운 거 보니까 진짜 죽지는 않겠네.”
“뭐야? 이 망할 영감탱이가!”
“그보다 어쩌다가 그런 거야? 멧돼지에게 치이기라도 한 거야?”
“그게 말이지······.”
할머니가 이때다 싶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상진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할머니께서는 멧돼지에게 치인 것은 아닙니다. 멧돼지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피하시다가 넘어진 것뿐입니다.”
“아, 그래?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병원에 가자고. 난 또 멧돼지한테 치이기라도 한 줄 알았네.”
이장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자 할머니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염병할! 아파 뒈지겠는데 병원은 무슨 병원! 아니고 죽겠네. 나 죽겠어.”
할머니는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병원에 가는 건 질색했다.
그런 할머니를 계속 달래던 이장도 이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러게 이 할망구야. 뭐 한다고 밖으로 나와, 나오길! 군인들이 작업하니까 집에 있으라고 내가 몇 번 말했어?”
“내가 내 집 뒷마당 나가는데 네놈이 뭔 지랄이여! 그냥 잠깐 나간 거여, 잠깐 바람 쐬러 나가지도 못혀? 그리고 바로 집 앞에서 저러는디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녀. 그런데 멧돼지가 떡하니 보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
할머니가 고함을 질렀지만 이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끄러워, 이 할망구야. 그리고 제발 그 성질머리 좀 죽여. 진짜 그러다가 저세상으로 가는 수가 있다니까?”
이장이 잔소리를 해댔지만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밖에 있는 오상진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 군인 맞아?”
“그럼 맞지. 딱 보면 몰라?”
“무슨 군인이라는 놈들이 멧돼지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말이야. 총으로 한 방 쏴버리고 죽이면 됐을 것을.”
“이 할망구가 큰일 날 소릴 하네.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군인들이 함부로 총을 쏴?”
“왜 못 쏴? 그러라고 군인이 있는 거 아녀?”
“얼마 전에 최 순경 말 못 들었어? 멧돼지를 총으로 쏘려면 절차가 복잡하다잖아. 동물 보호 협회인지 뭐시기인지에서도 난리라고 하고.”
“그럼 맨손으로라도 잡았어야지!”
“이 할망구가 실성을 했나. 그 시커먼 놈을 무슨 수로 맨손으로 잡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겨?”
이장의 핀잔에 할머니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 영감탱이야. 영감이 입버릇처럼 떠벌리고 다녔잖아. 왕년에 군대에 있을 때 맨손으로 멧돼지를 때려잡았다고 말이야. 그런데 저것들은 못한다고?”
“내가 그, 그랬다고?”
“술만 퍼 마시면 김 영감하고 둘이서 멧돼지 타령을 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이여?”
이장은 슬쩍 오상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말했다.
“크흠, 그때가 어느 때인데······. 그건 다 옛날 얘기지. 그리고 사실 다 뻥이야, 뻥!”
“뻥이라고?”
“그래 이 할망구야. 진짜 그랬으면 난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멧돼지를 어떻게 맨손으로 때려잡아?”
이장의 말에 할머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무튼 저놈들 때문에 내가 다쳤어. 그러니까 저 놈들한테 책임지라고 해!”
“이봐, 할망구! 생떼를 부릴 때 부려야지.”
“뭐? 생떼? 내가 지금 생떼를 부리는 거라고? 아이고, 영감! 영감이 일찍 죽으니까 내가 이 영감탱이한테 이런 괄시를 받네. 내가 죽어야지, 그래 죽어야 이런 꼴을 안 당하지.”
할머니의 하소연에 이장은 이골이 난 듯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오상진도 할 말이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꼴 아닌가. 해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장은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할망구야. 말 같잖은 소리 좀 하지 마. 우리가 힘들다고 하니 먼 길을 달려와 준 고마운 군인들인데 그게 할 소리야?”
“도와주기로 했으면 응당 멧돼지도 잡고 그랬어야지. 그것도 못 잡고 아주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 두고, 나는 이렇게 다치게 만들고. 이것들이 무슨 군인이야.”
할머니도 지지 않고 말했다. 이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럼 진즉에 시청 다닌다는 아들 좀 부르지 그랬어? 그 잘난 아들은 코빼기도 안 비치면서 무슨······.”
“이놈아, 네놈이 이장이면 이장이지. 왜 여기서 우리 아들을 걸고 넘어져! 지금 우리 아들이 시청에서 얼마나 바쁘게 일을 하는데 여기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어?!”
“어휴. 할망구. 성질머리 하고는.”
“나가! 이놈아. 그 말만 할 거면 나가라고!”
“그렇지 않아도 나도 나가려고 했어.”
“어서 꺼지지 못해!”
“나가, 나간다고.”
이장이 나와서는 오상진에게 다가갔다.
“딱 보니까 그냥 엄살이야. 멀쩡해.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아.”
< 10장 일이 점점 커지네(1) > 끝
ⓒ 세상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