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83화 (183/183)

86. 이야기 (1)

바야흐로 진정한 봄이 왔다.

날씨가 눈에 띄게 따뜻해졌고 황무지가 신록으로 물든다.

“절대 민희한테 내가 엄창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전시훈은 우민희에게 갔다.

우민희를 만나지는 못했는데 도중에 서울 근교에서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정부 쪽 차량에 옮겨 탔기 때문이다.

별일은 없을 것이다.

신신당부를 했고 또 우민희는 그 이후로 별 이야기가 없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만 파주 쪽 상황이 격렬하다는 건 매일 듣는 군단파 방송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마 우민희도 전력을 다해 파주 쪽의 분출을 막고 있겠지.

한 가지 의아한 건 사실상 인천과 그 주민을 포기한 정부가 왜 굳이 파주에서 몬스터를 막냐는 건데 글쎄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지는 않을까?

킹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특별히 없다.

게시판 활동은 열심히 하는 거 같은데 스타일상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글을 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도도한 게시판 유저라고 할까.

옆에 여자도 많고 무려 3만 명이나 있는 도시의 지배자니 우리처럼 절실하게 인적 교류가 필요한 것도 아니겠지.

인천은 바야흐로 전국시대에 돌입했다.

피난소 별로 파벌이 나뉘어 합종연횡을 한다거나 전투를 벌이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피난소 단위로 절멸전마저 펼친다고 한다.

정확한 내막을 알 방법은 없다.

인천에 있는 게시판 유저는 없고 페일넷 유저들도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까.

인천 사정은 이른바 “카더라” 통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황무지로 쏟아져나오는 피난민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피난민들은 내 영역이 아닌 동쪽 군단파의 영역을 목적지로 삼고 있었다.

정부를 떠나 군벌을 향해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총격전을 벌이는데 군단파 쪽에서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곁들인 고상한 방송을 하고 있으니 군단파 쪽이 더 살기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아무튼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내 주변의 세상은 평온하다.

최근 게시판에서 인기가 있는 화제는 “판사킬러” 제작법이다.

판사킬러라는 건 전쟁 초기에 제작되던 사제 석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 모 법원에서 어떤 사람이 판결에 원한을 품고 판사를 석궁으로 저격했다고 해서 붙여진, 나름 사연이 있는 물건인데 이 판사킬러가 화제가 되는 건 슬슬 탄환이 부족해지는 시점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쪽 유저들은 이미 2년 전부터 판사킬러를 애용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방 쪽엔 많은 총기와 탄환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석궁 같은 건.

그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어로활동이다.

냉동고가 텅 비었다.

작은 냉장고 하나를 가동하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든 건 대부분 물이나 바로 먹을 농작물 정도고 냉동육 같은 건 전부 소비했다.

냉동육이 없어도 대체할 단백질은 얼마든지 있지만 주로 통조림이나 먹기 거북스러운 고형식이다.

고형식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느낀 건데 확실히 사람 몸은 신선한 단백질을 필요로 한다.

내 영역 주변에 뮤테이션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긴 한데 그것들을 사냥하는 건 쉽지도 않고 해체나 운반도 또 일인지라 그보다 쉽고 간편한 단백질 공급원을 찾았다.

적절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산 뒤쪽을 흐르는 개천이다.

당초 방공호 부지를 정할 때 뒷산 너머 개천에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물고기라도 먹어야지.

전쟁 전에 비축한 생존술 영상물을 보며 어로활동에 대해 연구했다.

자료에 의하면 낚시보다는 통발이나 그물 쪽이 효율이 높다고.

가장 효율이 좋은 어로 도구는 그물인데 그물은 멀리서도 눈에 띄고 꽤 많은 노동력이 들고 작업 중에 무방비 상태에 처할 위험이 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는 배터리를 방전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배터리가 금보다 귀한 이 시대에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진 않다.

오랜 고심 끝에 내가 결정한 건 통발이다.

생존술 영상을 참고해 모기장과 철사를 이용해 간단한 통발을 만들었다.

미끼로는 오래된 된장을 썼다.

보존을 잘못하여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곰팡이가 슬어가던 녀석인데 혹시 쓸 데가 있지 않나 싶어 창고 안에 넣어뒀는데 드디어 녀석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통발 낚시의 장점은 간편성.

미끼를 넣고 물고기 채취 포인트에 넣어 두기만 하면 된다.

새벽에 통발을 설치하고 저녁에 통발을 회수해보았다.

“흠.”

몇 마리 피라미가 들어있긴 한데 성에 차는 양은 아니다.

통발을 늘려야 하나.

생존술 DVD에서도 여러 대의 통발을 설치하는 쪽을 추천하기도 하고.

방공호 위 언덕 위에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새로운 통발을 만들며 하루를 보냈다.

방공호에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한다.

인터넷에 접속하자마자 내가 먼저 하는 일은 검색이다.

키워드는 “스켈톤”과 “엄창이”.

둘 다 없다.

절반의 섭섭함과 절반의 안도를 느끼며 그다음으로 내가 하는 일은 인기글 확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인기글도 볼 게 없다.

그놈의 판사킬러 만들기 열풍이 불어 너도 나도 조잡한 석궁을 만들어서 찍어 올리고 거기에 좋아요 누르는 풍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mmmmmmmmm : “저지 피니셔”

나만큼이나 유행에 민감한 m9도 석궁을 만들었는데 그 석궁은 그가 사는 집만큼이나 어딘가 기울어진 느낌이다.

공교롭게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건 동탄맘이었다.

dongtanmam : 냠냠... 판사킬러... 그딴 거 냠냠... 총알 전부 사라진 시대에는 쓸 만 하겠지 냠냠... 그런데 니가 만나는 새끼가 총을 들면 그거 쓰레기잖아...? 냠....

동탄맘도 판사킬러라는 최근 트렌드에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글의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일은 없을 테지만.

오늘은 라이브! 아포칼립스!가 있는 날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최근 라이브! 아포칼립스!도 슬슬 소재가 떨어지고 있다.

한 주에 한 번이라는 텀을 두긴 했지만 애당초 비바! 아포칼립스! 유저 숫자는 많지 않다.

최초의 동탄맘 쇼 같은 스펙타클한 라이브가 그리 자주 나올 리는 없는 것이다.

점점 수준이 떨어지고 있는 현재 라이브! 아포칼립스! 에서는 심지어 대한민국이 세계에 전파한 “먹방” 같은 의아한 컨텐츠마저 나오는 지경이다.

먹방도 맛있는 걸 먹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치즈와 곰팡이가 핀 빵으로 먹방쇼를 하다니.

그건 라이브! 아포칼립스!의 애청자인 나조차 끝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멜론 마스크도 자신의 쇼가 슬슬 한계에 부딪친 걸 아는지 전주는 라이브! 아포칼립스!를 쉬었다.

그 대신 그는 놀랍고 새로운 컨텐츠를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의 기대심을 높였다.

오늘이 그 새로운 컨텐츠가 공개되는 날이다.

절반의 기대를 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직접 잡은 피라미 튀김을 소금에 찍어 먹으며 라이브를 지켜보았다.

곧 화면에 우리의 창조자 멜론 마스크가 나타났다.

“안녕! 세계의 비바리안!”

언제나처럼 멜론 옆엔 살인 나무늘보 범피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우물우물

로메인 상추를 흉측한 갈고리가 달린 손으로 씹어먹으면서 말이다.

그 범피 옆에서 멜론 마스크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라이브! 아포칼립스!도 휴무야.”

2주 연속 실망스러운 결과.

채팅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coral8103 : 아니, 뭐이리 자주 쉬어?

X'Ds_Grrrrr :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요즘 컨텐츠가 없다고 하지만.

익명13 : 그래도 “먹방”은 최악이었어.

L-V-R-M : 누가 재밌는 걸 만들어주기 바라지 말고 자기가 재밌는 걸 만들어야지. 이렇게 될 줄 다들 예상했잖아?

익명100 : 나온 김에 멜론! 범피랑 제이슨 놀이나 해보라고!

sulfar88 : 우우우우우우~

...

...

나도 조금은 실망스럽다.

그래도 먹방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지만.

화면 중앙을 차지한 멜론 마스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채팅을 보고 있는 모양.

곧 멜론 마스크가 활짝 웃었다.

“다들 A.I 예술이라는 거 알고 있지?”

A.I 예술?

“키워드만 넣어도 A.I가 그림을 그려주는 툴 정도는 다들 알잖아?”

그러고 보니 전쟁 전에 몇몇 태그를 넣으면 A.I가 학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완성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를테면 A.I 이미지 프로그램에 “태그 : 전설”, “태그 : 헌터”, “태그 : 쿨가이”라는 3개의 태그를 넣으면 이 A.I가 알아서 스켈톤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그런 툴은 여러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철 지난 툴을 뿌리려는 걸까?

딱히 감흥은 없을 것 같은데.

3년차 올드비 유저로서 나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은 게시물의 질적 하락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발언권도 없는 로카지지 같은 노잼 듣보 유저가 A.I 그림을 빌미로 게시판 한 구석에 불쾌한 칸을 차지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한 단계가 더 나아가 있다.

“A.I 프로그램으로 영상을 만들 거야. 캘리포니아에 있는 본사 쪽에서 개발 중이던 A.I 애니메이션 생성 툴을 복원하고 테스트 중이거든. 그러니까 A.I 영화를 만들겠다는 이야기지.”

멜론 마스크가 범피와 어깨동무를 했다.

“다들 나처럼 재밌고 짜릿한 경험담 하나 정도는 있지 않겠어? 그런데 말로만 하면 재미가 없잖아? 글? 글자 하나하나 어떻게 읽어. 카툰도 다를 바가 없고.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주겠다는 거야. 너희들의 놀라운 스토리를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로 말이야! 최초는 기술적 한계상 애니메이션적으로 구현할 테지만 데이터가 쌓이면 진짜 헐리우드 엿먹이는 명작도 노려볼 수 있다고?!”

멜론 마스크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화면이 전환되며 3D 애니메이션 풍으로 만들어진 우주 방공호가 나타나고 거기에 카툰 풍으로 묘사된 저마다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한 사내가 사람을 죽이고 구역을 폐쇄하고 우주복을 입고 우주 공간으로 나가 외부 안테나를 파괴한다.

한편 그 정거장에 있던 멜론 마스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타이핑을 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카툰 풍으로 표현된 범피의 얼굴이 떠오르며 “무비! 아포칼립스!”라는 멋들어진 타이틀이 두둥하는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등장했다.

“이런 걸 만든다는 이야기지!”

현실의 멜론 마스크가 나와 특유의 재수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

틀림없다.

방금 영상은 분명 짧지만 한편의 잘 만들어진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설마 이 모든 게 사람 손을 거친 게 아닌 A.I로 만든 것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이 충격적인 영상에 세계적 규모의 채팅창이 다시 한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익명13 : 이걸 A.I로 만들었다고?

L-V-R-M :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럽긴 한데 멀리서 보면 다즈니나 픽서에서 만든 느낌인데?

demoliton'86 : 효과음이나 음악 같은 건 어떻게 한 거지? 설마 그것도 A.I?

yamazakism : 놀랍군. 기술의 발전이란.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어디까지 진보했을까?

I_HATE_NY : 동탄맘의 이야기를 보고 싶군! 그는 놀라운 생존자이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꾼이야!

Ohio9 : 일주일에 영화 한 편이 뚝딱 나온다는 거지?

mmmmmmmmm : 호오.

...

...

급류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채팅창을 보며 멜론 마스크가 우리를 향해 윙크했다.

“그럼 괜찮은 이야기 소재를 보내줘! 우리 비바! 팀이 최신식 A.I를 이용, 너희들의 이야기를 한편의 영상으로 만들어줄 테니! 아! 액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쪽이 더 화끈하네! 멜로드라마나 신-파- 스토리는 사양할게!”

멜론 마스크가 사라지고 스토리 공모에 관한 안내 사항이 나왔다.

찬찬히 읽어보았다.

흥미가 가고 새롭고 위기 혹은 액션이 있고 모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이번에 제작될 무비! 아포칼립스!가 선호하는 것이라 한다.

그 내용을 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거, 어쩌면 나를 노린 이벤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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