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80화 (180/183)

85. 킹 (5)

침식지대 자체가 인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한 연구 데이터는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오랫동안 침식에 시달렸고 기꺼이 수만 명의 몰모트를 기꺼이 부담할 수 있는 중국 쪽에서 침식지대가 인간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결론은 모호했다.

침식지대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평범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보다 훨씬 높은 정신병적 발작을 보이지만 침식지대 자체는 인간의 신체에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침식지대에 오래 활동한 우리 헌터들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침식지대엔 인간을 미치게 하는 해로운 공기가 있다.

우리 과학으로서는 규명할 수 없는.

“여기는 안전해요.”

소녀가 말했다.

멀리서 봤을 땐 여자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전시훈과 비슷하거나 좀 더 어릴 것이다.

아마 150cm도 안 되는 작은 키와 삐쩍 마른 몸이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게 했겠지.

“보이죠? 여기 마종사의 부적이에요. 이 부적을 붙인 곳엔 구붕이 들어오지 않아요.”

여자의 말엔 미세한 북한 쪽 억양이 느껴졌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중 젊은 여자들이 빠르게 서울말을 학습해 구사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이 여자가 광신도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국 변경의 보잘것없는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무협소설이나 보던 인간을 마종사라고 떠받들고 인류의 적인 몬스터를 신의 사자(使者)라고 부르고 있는 걸 보면.

광신도 특유의 광기 어린 눈빛이나 횡설수설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나는 이 여자를 살상 리스트에 넣었다.

“고맙다. 그런데 몬스터가 안 들어오는 거 확실하냐?”

킹이 숨을 고르며 벽면에 붙인 조잡한 부적을 보았다.

강시 영화에 나올 법한 노란색 종이에 아마 중국인도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문자를 붉은색을 적어 놓은 게 벽면에 붙어 있다.

그런데 이 부적, 직접 쓴 게 아니라 프린터로 찍어낸 것이다.

싸구려 잉크젯 프린터에서 보이는 계단 현상을 보면 확실하다.

그런데 이 엉터리 부적에 대해 광신도 여자는 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일 없습니다. 사자의 수하들이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선생님은 모르세요?”

이 부적이 효과가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스파이더링이 더 이상 우리를 쫓지 않는 건 확실하다.

창밖을 보았다.

우리에게 몰려들던 수백 마리의 스파이더링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가고 있다.

“보세요. 마종사의 부적 효과가 얼마나 신통한지 이제는 아셨죠?”

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지켜보았다.

아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현상은 부적의 효과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전시훈을 보았다.

우리를 경계하면서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이곳의 삶에 질린 것일까.

소위 마원갑의 부적에 의해 보호받는 집이라는 걸 보았다.

텐트가 하나뿐이고 옆에 통조림, 포대 같은 식량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불을 피운 흔적도 곳곳에 있었다.

위생상태는 썩 좋은 것 같지만 비누가 있고 수건과 속옷, 그리고 말리고 있는 콘돔이 보인다.

아무래도 전시훈은 이 북한 억양의 여자와 함께 사는 것으로 보인다.

“뭐야. 전시훈. 이 애랑 같이 사는 거냐? 응?”

킹이 빨랫 줄에 걸린 세척한 콘돔을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노려보았다.

전시훈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 은은히 서린 광채가 진해졌다.

순간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이 느껴진다.

역시 오버 10레벨 어웨이큰.

감정의 변화만으로 이 정도 압박감이다.

진짜 힘을 드러내면 글자 그대로 전장을 지배하는 것도 문학적 수사만은 아니겠지.

그런데 자신이 명백히 전시훈의 하위호환이라는 걸 알고서도 킹은 당당했다.

“언제까지 이런 데서 살 거냐? 이런 거지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 거냐?”

“당신 알 바 아니잖아요.”

전시훈이 으르렁거렸다.

확실히 그는 킹을 싫어한다.

최소한 좋아하지는 않는다.

킹이 날 돌아보았다.

“자. 그럼. 스켈톤. 시작할까?”

“······.”

주변을 보았다.

스파이더링도 없고 스파이더 타입도 없다.

전설처럼 전하는 중형종도 보이지 않는다.

안전을 확인한 후에 킹을 보았다.

“내가 먼저?”

킹이 빙그레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먼저 해야지. 내가 너 스파이인 거 눈감아 줬잖아? 그러니 네가 먼저 손 패 보이는 정성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흠······.”

마음엔 안 들지만 맞는 말이다.

내가 만약 킹이었다면 스켈톤을 죽였겠지.

다른 방법이 없는 한 1%의 위험도 부담하지 않으려는 게 이 박규의 속성이니.

“우민희가 보낸 사람이야.”

킹이 불쑥 내 소개를 했다.

“우소장님이요?”

날 바라보는 전시훈의 표정이 킹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경계심을 띄어간다.

확실히 우민희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

전시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우민희가 한마디만 전해달래.”

“어떤 말요?”

전시훈과 이름 모를 소녀, 그리고 킹의 시선이 느껴진다.

침식지대 특유의 무겁고 끈적한 정적이 내 정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통지받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네 아버지 돌아가셨다.”

“아, 그래요?”

부친의 부고를 듣고도 전시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전시훈 쪽을 보았다.

“시훈 형제.”

“괜찮아요. 어차피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킹이 한마디 했다.

“네 가족을 버리고 딴 집 살림 차렸다는 그 인간 말이냐?”

“네.”

전시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 보았다.

“어떻게 죽었나요? 그리고 그 인간의 진짜 가족은요?”

“내가 들은 건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뿐이야. 다른 건 아는 바가 없어.”

“제가 우민희 소장님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말씀 안 하셨죠?”

전시훈이 날 유심히 노려보며 물었다.

“싫어한다는 말은 하더라고.”

“전 그 사람이 정말로 싫어요.”

“왜?”

“사람이 아닌 뱀 같아요. 피도 눈물도 없고. 타인이 고통받고 죽는 걸 즐기고. 옆에서 사람들 수천 명이 죽어가는데 자기 생일 파티 걱정이나 하고 있고. 어떻게 그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뭐. 반쯤은 인정한다만.”

전시훈이 고개를 돌렸다.

“전, 그 여자에게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던 킹이 히죽 웃었다.

“이제 내 차롄가.”

“잠깐.”

“뭐? 아직 할 말이 남았냐? 다 끝난 거 같은데.”

하나가 남긴 했다.

너무나도 위험한 비기라 여간해서는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 친구.

보기보다 순수하고 선한 친구다.

마치 과거의 강한민처럼.

어쩌면 그는 강한민처럼 이 나라의, 아니 인간의 생존을 위해 싸워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전장에서 도태가 된 몸이지만 이런 젊은 피가 전장에 합류한다면 강한민과 나혜인의 부담도 조금은 줄지 않을까.

뭐, 기분이다.

“시훈아.”

전시훈을 똑바로 보았다.

그가 다시 나를, 경계심 어린 얼굴로 응시했다.

그 얼굴을 똑똑히 보며 금단의 이름을 꺼냈다.

“······내가 엄창이다.”

“네······?”

전시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엄창이라고.”

“그, 그게 무슨······.”

“페일넷에서 우민희 놀렸던 엄창이의 정체가 바로 나다. 못 믿겠으면 우리 집에 와라. 로그 보여주지.”

전시훈이 뒷걸음질 쳤다.

“아, 아저씨가 그 엄창이라고요···? 전설의 레드마스크 상대로 장난을 실시한······!!”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은 건 전시훈만이 아니었다.

킹 또한 아우라처럼 두르고 있던 오만함과 여유를 벗어던지고 충격에 빠진 얼굴로 날 쳐다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스켈톤······!!”

“······이건 인터넷에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진짜냐? 스켈톤. 네가 그······ 엄창이였냐?”

“그래. 내가 엄창이다. 우민희의 행동에 반감을 품었고 장난을 쳤지. 하지만 말이야. 시훈아.”

충격의 커밍아웃을 했지만 내 표정은 무덤덤했다.

“지금도 강한민과 나혜인은 균열을 닫고 있어. 상상할 수도 없는 위험과 희생을 바탕으로.”

그럴 수밖에.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

“······그 친구들 옆에 네가 있어 준다면 강한민의 어깨에 실린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시종일관 내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전시훈은 고개를 떨군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먹힌 모양이다.

엄창이라는 꽃놀이패가.

여전히 킹도 나를 놀라운 눈으로 보고 있다.

“스켈톤. 이 새끼.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알려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만플 넘게 받았으니 기분은 좋았겠네?”

“당연하지.”

킹이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한 방 먹었네. 씨발.”

“왜? 이제와서라도 무력 행사하게?”

“아니. 그런 짓은 안 해.”

잠시 충격에 젖어 들었던 킹의 얼굴에 특유의 오만과 여유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가 전시훈을 보았다.

“어이. 전시훈.”

전시훈이 킹을 보았다.

“내 아버지 보고 가지 않을래?”

“네? 킹의 아버지요? 안 계신 거 아니에요? 다들 죽었다고 하는데.”

“살아 있어. 아주 잘 살아있지.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는지 방해는 안 하겠어. 어차피 네가 나보다 훨씬 강하니. 니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좆만한 도시 박살 내는 거 일도 아니잖아?”

“······.”

“우리 아버지 보고 가. 너도 아버지 때문에 고민이 많잖아? 같은 이야기야. 스켈톤은 안 그런 거 같지만.”

“나 아버지 없는데?”

킹은 내 말을 무시했다.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도 전에 전시훈 옆에 있던 작고 삐쩍 마른 소녀가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시훈이를 어디로 데려가려고요? 시훈이는 여기에 있어야 해요!”

“뭔 개소리야?”

킹이 짜증을 드러냈다.

“선택받은 신의 아이인 시훈이는 신의 땅에서 살아가야 한다고요!”

킹이 전시훈을 보았다.

“야. 니가 스켈톤을 따라가든 날 따라가든 뭐든 니 마음인데. 니가 이년 옆에 남는 것만은 못 보겠다. 니가 원한다면 더 예쁜 애 붙여줄게. 연상이 싫으면 한 번 찾아볼게. 도시에 3만 명이나 있으니 얘보다 귀여운 애 하나 없겠냐?”

“왜요?”

소녀가 거칠게 물었다.

“사기꾼 사이비교도잖아!”

“이 부적의 힘 안 보여요?!”

소녀가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나는 이미 문가에 가 있었다.

찌익-

부적을 뜯어냈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거기서는 킹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 어이. 스켈톤. 무슨 짓이야?”

“이 부적.”

뜯어낸 부적을 가만히 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었다.

“그냥 붙여놓은 거야. 보라고.”

창밖을 보았다.

스파이더링 몇 마리가 경계를 돌지만 우리에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부적 따위가 아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전장에서 있었던 기묘한 경험들이.

거점을 구축한 소형종의 하수인들이 밀어 붙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갑자기 무시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였다.

당시 우리 위기는 하수인만이 아니라 광신도나 반군과 엮인 복합적인 경우가 많았기에 깊게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횟수도 적어 가설로 만들 데이터까진 마련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소형종의 영역엔 어째서인지 소형종은 물론 그 하수인도 얼씬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오랫동안 몬스터 주변에서 살았던(아마 다수가 죽임당하면서) 광신도들은 나름의 데이터가 있었을 것이다.

그 데이터를 기초로 안전영역을 알아내고 거기에 사기꾼의 부적을 붙인 것이다.

마치 그 부적이 효험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겐 통했겠지만 내겐 어림도 없다.

내가 광신도보다는 몬스터 옆에 산 기간은 적을지라도 어떤 광신도보다 많은 몬스터를 죽인 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킹의 말이 맞다. 니가 킹을 따라가도 이 엄창이는 불만이 없어. 하지만 네가 여기에 남는 건 엄창이도 강하게 반대한다.”

“혹시 성함이 진짜 엄창이세요······?”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자신을 엄창이라고 부르시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위대한 인물은 자신을 3인칭 화해서 종종 부르지 않던가.

페일넷 댓글 만 개 정도 받으면 그게 위인이지.

달리 위인이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광신도는 순순히 전시훈을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마종사의 부적을 뗀 대가를 톡톡히 치를 거 같네요. 마원갑 종사가 균열 너머에서 여러분의 죄를 보신 거 같아요.”

광신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세요! 분노한 신의 사자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려주려고 오셨어요!”

깨진 유리창을 걷어내고 실리콘 자국이 덕지덕지 남은 휑한 콘크리트 틀 너머에 뭔가 거대한 게 움직이고 있다.

여덟 개의 다리를 교차하며 걷는, 마치 거대한 완보동물을 연상케 하는 무언가다.

그걸 본 순간 나는 기억 속에 있는 몬스터의 타입 하나를 입 밖에 내었다.

“······애니힐레이터.”

킹 또한 불길한 예감을 감지했는지 가볍게 몸을 떨며 가스마스크를 뒤집어쓰며 내게 물었다.

“스켈톤 그게 뭐냐? 애니뭐시기라는 게.”

“전쟁 몬스터.”

통칭 절멸자.

어떤 중형종보다 인마살상에 특화된 전쟁 몬스터가 회백색으로 변한 폐허의 중심에서 음울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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