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77화 (177/183)

85. 킹 (2)

파주 균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균열이다.

인접한 곳에 적국이 있고 수도가 가까이 있고 무엇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어떤 균열보다 강도가 강했으니까.

이 균열을 막기 위해 대규모 방어시설이 세워졌고 전장이 될 균열 앞엔 킬존이라 불리는 몬스터 살상지대가 만들어졌다.

파주 균열을 처음 본 사람은 균열이라는 이질적인 차원의 통로를 보고 놀라고 그 균열 앞에 자리 잡은 방어시설의 규모를 보고 다시 놀란다.

균열 앞을 직접 겨누고 있는 고정 화기만 2천 기를 넘고 후방에선 수백 문에 달하는 야포와 다연장포가 언제라도 쏠 수 있게 대기했다.

공군 전력도 있지만 이쪽은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전차도 100여기나 배치됐는데 주포의 성능을 다운그레이드하여 반사역장을 펼치더라도 자신이 관통되지 않도록 설계한, 이른바 멍텅구리 전차라 불리는 타입이다.

멍텅구리라는 별명과 달리 일선이 뚫릴 경우 즉시 출동해 2선을 만들어주는 든든한 친구들이었다.

소형종 같은 경우에 전차포 두 방이면 반사역장이 부하를 일으켰고 중형종도 정타로 다섯 발 정도 얻어 맞으면 역장 자체가 무력화됐으니까.

이 드넓은 전장엔 8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상시 배치되어 있었는데 몬스터가 전자전 장비를 무력화하는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증원되더니 내가 전장을 떠날 무렵엔 1만 2천 명까지 늘어났다.

핵심 방어구역답게 거기에 배치되는 병사는 일반 징집병이 아닌, 직접 국가와 계약해 보수를 받고 싸우는 계약병이었다.

어웨이큰 전력도 있었다.

5레벨 이상 어웨이큰 8명이 로테이션을 돌며 근무했고 존재 자체가 기밀사항이었던 10레벨 이상 어웨이큰 -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 도 한 명 있었던 것으로 안다.

우리 올드스쿨 헌터도 그곳에 있었는데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전투는 대부분 포병이 담당했고 포병만으로 버거운 분출은 어웨이큰 헌터가 개입해 반사역장을 지우고 고정 화기를 동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했으니.

병사들은 우리보고 퇴물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 우리 올드스쿨 헌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제로 계약서에 명시된 우리의 주임무는 계약병의 지도와 인솔,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였다.

내가 파주에 있는 동안 딱 두 번 몬스터가 일반병 구역에 난입한 적이 있다.

한 번은 파견 헌터와 같이 처리했지만 한 번은 상황이 급박해 총기를 든 병사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후 두 자루 도끼만으로 몬스터를 처치했었다.

전자는 수백 명의 병사가 봤지만 후자를 본 건 열 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파주를 떠나 멸망주의자의 길을 걷게 됐지만 당시 있었던 병사는 꽤 많이 살아남은 모양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남아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당신이 몬스터를 잡는 걸 봤지.”

아마 전자가 아닐까.

뭐, 균열지대 계약병이라면 일반인보다 전투력이나 생존술이 훨씬 뛰어날 것이고 수백 명이나 있었으니 한두 명이 깡패 부하가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래서 킹이 당신을 부른 건가?”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고 해서 득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는 킹의 손님이니까.

전직 파주 군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킹의 처소로 안내했다.

킹이 사는 곳은 전쟁 전에 건설한 거대한 핵방공호였다.

“1호 방공호라고 불리는 곳이지.”

전직 군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과 정부 대가리가 지내게끔 설계한 곳이야. 원래라면 개전 동시에 피난을 갔어야 하는데 대통령이라는 놈이 당신도 알다시피 게으른 놈이잖아? 지하로는 가기 싫다고 차일피일 미루며 관망했는데 중국 놈들은 여기에 당연히 대통령이 있을 거라고 보고 아주 이 주변을 아작을 내놓은 거지.”

방공호로 통하는 경사로는 길게 이어졌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파편이 쌓인 도로는 장갑차 두 대가 나란히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경사가 끝날 무렵엔 탁 트인 거대한 홀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마도 중국군의 벙커버스터가 뚫어버렸을 구멍 위로 밤의 하늘과 별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방공호의 규모를 보고 왜 킹이라는 자가 왕을 의미하는 영어를 자신의 별칭으로 삼았는지 알 것 같다.

왕의 처소다.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죽어 없어졌고 그를 호위하던 세력도 소멸했지만 그 빈자리를 깡패와 약탈자가 채워 넣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많은 사람이 보였다.

대부분은 깡패지만 얼굴에 분칠을 한 여성도 다수가 보였고 어두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추레한 노동자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쪽이다.”

전진 군인은 마치 금고문을 방불케 하는 육중한 철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철문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라.”

고개를 끄덕이고 철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문 너머엔 몸매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걸친 여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매 자체는 대단히 매력적이었으나 다들 얼굴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놈의 인형탈이다.

한 여자는 토끼탈을 썼고 한 여자는 여우탈을 썼다.

“무기는 여기에 놔두세요.”

토끼탈이 말했다.

시키는 대로 무기를 모두 맡겼다.

도끼를 맡길 땐 조금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오기로 결정했다.

도끼를 맡기고 복도를 보았다.

사치스럽다기보다는 조잡한 느낌의 싸구려 양탄자가 안으로 길게 깔려 있다.

조명은 어둡고 침침했고 기이한 향냄새가 복도 안에 감돌고 있었다.

두 인형탈은 나를 복도 끝에 있는 방에 데려다주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 안에 킹이 있다.

이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그만의 왕국을 구축한 깡패 두목이 말이다.

이런 인간을 만나는 건 원래 내 계획에 없었지만 막상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걸 보면 말이다.

방 안엔 한 사내가 있었다.

178cm 정도 됐을까, 균형 잡힌 몸에 자세가 곧은 사내였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는데 이쪽을 보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남자도 인형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켈톤이냐?”

킹이 날 돌아보았다.

사자탈이다.

다른 여성이 쓴 탈과 다르게 그가 쓴 탈은 눈구멍이 커서 눈의 윤곽은 물론 안와 주변의 형태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소문대로다.

어웨이큰이다.

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그 증거다.

다만 눈 주변엔 아마도 검은색 계통의 화장품을 바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그외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냄새다.

방 안엔 좋은 향이 나는 방향제가 있지만 그 인공적인 향기 안에 감춰진 썩어가는 살점의 악취를 맡지 못할 정도로 내 코는 둔해지지 않았으니까.

내 시선은 넓고 화려한 킹의 방구석에 있는 모로 세워놓은 원통을 향했다.

사람이 들어갈만 한 크기.

저 안에 뭔가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앉아. 스켈톤.”

킹이 날 자리에 앉혔다.

그가 직접 찬장에서 술을 꺼내 한 잔 따라 내게 내밀었다.

꽤 괜찮은 위스키다.

“내가 지금까지 게시판 애들 여럿을 초대했는데 직접 온 건 네가 처음이다.”

킹이 사자탈의 눈구멍 너머로 날 뚫어지듯이 쳐다보았다.

“멀쩡하게 생겼네. 생각보다 젊고. 난 40 후반이나 50대 정도 되는 인간으로 생각했는데. 아니, 씨발 내가 어릴 때 본 낳낫 드립을 치고 인터넷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안 보이겠어?”

“······.”

“긴장 풀어. 스켈톤. 내가 평판은 안 좋지만 게시판 친구들에게 해코지 가하는 성격은 아니야. 그 뭐냐. 사람 죽이는 걸로 위세 떨던 그 물로켓 새끼. 디펜더였나. 그 새끼도 우리 게시판 친구들한텐 손 안 대잖아? 깡패 새끼 하나 실시간으로 죽이긴 했지만 뭐 그건 그 새끼가 잘못한 거고.”

다른 건 몰라도 킹이라는 녀석.

우리 게시판 친구가 맞다.

나름 오래 전 일도 술술 꿰고 있는 걸 보면.

“혹시 비바! 아포칼립스! 서비스 직접 계약한 거냐?”

해서 물어보았다.

“어. 직접 계약했다.”

이 새끼, 100% 오리지날 유저네.

더욱 호감이 간다.

“근본 유저였네.”

나답지 않게 칭찬의 말을 건네고 말았다.

사자탈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예전엔 글을 안 썼지?”

“딱히 인터넷에 글 쓰는 타입은 아니라서 말이야. 어릴 때 워낙 많이 하기도 했고.”

킹이 고개를 돌리더니 사자탈을 살짝 벗고 자신의 위스키잔을 들이켰다.

주도를 지키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은 것이겠지.

“그래도 자리 잡고부터는 메시지로 여러 놈들 불렀어. 존내논, 드래곤씨, 폭스게임, 그리고 뭐였더라. 아, 카일도스 같은 호감 가는 친구들을 말이야. 아이엠지저스도 불렀지. 그런데 아무도 안 오더라고. 직접 온 건 네가 처음이다.”

갑자기 킹이 고소를 흘렸다.

“그런데 왜 하필 와도 네가 오냐.”

그가 눈만으로도 어이없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목덜미를 잡았다.

“그 많은 네임드는 하나도 안 오고 하필 온 게 왜 너 같은 애냐고.”

아무리 이 새끼가 깡패 두목이라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나도 네임드 아니냐?”

킹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니가 무슨 네임드야.”

“네임드 맞을 텐데.”

“아니, 누가 자기 입으로 네임드라고 말하냐? 진짜 이 새끼 이거, 인터넷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때 원통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

무슨 악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철제 원통 안에 사람을 가둬 놓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원통을 긁는 소리가 방안에 소름 끼치는 형태로 울려 퍼졌다.

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그가 원통으로 다가가더니 원통 옆에 있는 붉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원통 안에서 들려오던 긁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내게 돌아왔다.

“아, 안에 사람이 있어서. 잠시 조용히 시켰어.”

“사람······?”

“전임자야.”

“전임자?”

“전임 두목 정도 되려나? 사정이 있어. 오해는 하지 마. 나쁜 뜻으로 저렇게 한 건 절대 아니니. 본인이 원한 거야.”

“······.”

뭔 헛소리인지.

굳이 깡패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싶진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온 진정한 목적이다.

전시훈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던 원래 그림은 세종에 들어가 잠시 시간을 보내면서 전시훈과 만날 기회를 잡는 것인데 도시의 분위기나 지하로 끝도 없이 파고 들어간 폐쇄적인 방공호의 형태로 볼 때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너 헌터라며?”

킹이 불쑥 물었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겠지.

깡패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지만 정작 자신이 거짓말을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족속들이니.

“예전에 잠깐 올드스쿨 헌터로 활동을 했지. 그리 유명한 건 아니고.”

“역시, 그래도 헌터 정도 되니 혼자 내 영역으로 들어올 깡이 있었겠지.”

킹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내 부하가 그러는데 말이야······.”

놈의 눈빛이 끈적해진다.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드는 가운데 킹의 말이 이어졌다.

“너 혼자서 몬스터 도끼로 때려잡았다며?”

설마 그거까지 본 건가.

파주에서 있었던 두 번째 전투를 본 건 11명에 불과한데.

그중에 킹의 부하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가지고 온 무기 중에 도끼도 있었고.”

킹이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야, 나 몬스터 한 마리만 잡아주라.”

아무래도 이 깡패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사례할게. 여자 하나 줄 테니 마음에 드는 애로 골라가. 하나 같이 연예인급이야. 내가 고르고 고른 애지.”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몬스터를 잡으라는 게 어디 있냐?”

“게시판 친구끼리 부탁인데 뭐 어때?”

“대체 무슨 일이길래?”

킹이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옆 동네 뭐 있는지 봤지?”

“침식된 도시?”

“그래. 거기에 애새끼 하나가 들어갔어.”

“어떤 애지?”

“어웨이큰.”

“어웨이큰?”

“어. 좆같이 강한 애새끼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삐쳐서 뛰쳐 나가더니 저 안에 처박혔어. 하여간 고등급 어웨이큰은 다 정신병자라고 하더니만.”

누구를 말하는 지 알 것 같다.

전시훈.

설마 짓다 만 도시로 들어간 건가.

하긴 우민희 말로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니 이런 동물탈 쓴 정신병자와 조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겠지.

“음, 아이 구출이라.”

“애새끼긴 한데 나보다 키가 커. 덩치는 다 컸지.”

“굳이 몬스터 잡을 거 없이 애만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지?”

“어? 진짜?”

킹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진짜 가 주는 거냐? 스켈톤?!”

반응을 보니 이 친구도 내가 진짜 자기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자탈 너머로 보이는 시커멓게 칠한 눈구멍을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친구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스켈톤 이 새끼······.”

킹이 감동의 눈웃음을 짓는가 싶더니 갑자기 기침을 했다.

“커억! 컥!”

온몸이 떨릴 정도로 격렬한 기침.

슬슬 걱정이 될 무렵 킹은 가까스로 기침을 멈추고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 또 이러네······.”

그가 방을 나섰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몸이 안 좋네. 일단 하룻밤 쉬어. 약속대로 여자 하나 붙여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그 여자한테 말하고.”

사자탈을 쓴 남자는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자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그에게서 악취가 났다.

죽은 사람의 냄새다.

아니, 그 악취는 좀비의 그것과 더 닮아 있으리라.

아주 잠깐 내 은사 장기영의 얼굴이 눈앞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

설마.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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