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73. 완장 (5) >
지원을 가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아예 안 가느니만 못한 일이다.
고로 지원을 갈 때에는 언제나 과할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아군을 돕기는커녕 발목만 잡게 될 테니까.
현재 상황에서 충분한 전력을 갖추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손오공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분신술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 혼자 뿐,
발렌타인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대 몬스터 전투에서 숙련되지 않은 전투원은 없느니만 못하다.
차선책으로 교신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들으려고 노력했다.
"신종 다섯 마리, 다수의 좀비가 있습니다. 좀비는 문제 되지 않지만 신종은 총알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금세 시커먼 연기를 내 뿜으며 일어납니다."
"장소는 옛 예식장입니다. 스카이템플 예식장 아세요?"
"팀장은 다리를 크게 물렸습니다. 다리가 절단되진 않았지만 대퇴부를 물려 출혈이 대단히 심합니다. 급한 대로 지혈은 했지만 온도가 낮아 체온 이 빠르게 저하되고 있습니다. 헬기를 부르긴 했습니다만 워낙에 낮은 기온이라 출발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현재 상황은 그나마 안정적입니다. 경사를 못 올라온다는 정보를 듣고 계단에 간이 경사를 만들어 농성 중입니다."
수색대 쪽에서 교신을 담당하는 사람은 어웨이큰이 아니라 김상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군인이었다.
총성과 아우성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전선 쪽에서 활동한 군인이리라.
그가 덧붙였다.
"아, 그리고 그 하얀 굼벵이. 그 놈에게 죽임당한 사람은 좀비로 변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지금도 제 동료가 저 아래서 몬스터와 함께 우리를 죽이려 드네요."
교신을 주고받는 사이 총성과 가까워졌다.
창백한 거리 너머에 우뚝 솟은 예식장 건물이 보인다.
부자들이 많이 찾던 고급 예식장이었다.
그 이름을 기억하는 건 김다람이 그 예식장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해서다.
결과적으로는 거기보다 살짝 떨어지는 호텔 예식장에서 결혼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예식장 주변을 지켜보며 상황을 재확인했다.
"그대롭니다. 여전히 포위당해 있고 놈들이 우리를 죽이려 드는군요."
"탄약은 얼마나 남았죠?"
"저는 탄창 하나가 남았네요. 나머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지금 어디십니까?"
"예식장 앞에 있긴 한데, 짚이는 게 있어서요."
"하지만 지금 상황이......."
"저 혼자 가서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다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요?"
그때 스피커 너머로 송유진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째서인지 마음속에 약간의 기운이 북돋는 느낌이다.
죽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교신을 종료하고 주변을 살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덮였고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얼어붙은 거리다.
예식장에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총성이 없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평범한 풍경이다. 건물들을 보았다.
일단 높아야 하고 상태가 양호하고 옥상에서 관측이 용이하면서도 10층 이하인 건물을 찾았다.
재수종합반이니 의대반이니 하는 누렇게 변색된 간판이 덕지덕지 붙은 10층 짜리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활짝 열린 문안에 들어가자 고약한 시체의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확실히 사람이 썩는 냄새는 지독하다.
죽은 지 꽤 오래됐고 여간한 감각은 가볍게 마비시키는 이 추위 속에서도 그 잔향이 진하게 감도는 걸 보면 말이다.
비상구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한달음에 뛰어 올라갔다.
중간에 방화셔터가 닫힌 구역도 있었지만,
탕!
총이라는 열쇠를 가진 내 앞길을 막을 순 없다.
8층 쯤에서 시체 악취가 극도로 진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린 복도에서 미라화된 시체의 팔이 떡하니 비상구 통로 앞에 삐져나와 있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이 이들을 죽게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쿵!
굳게 닫힌 마지막 문을 박차자 영하 25도의 칼바람이 내 몸을 덮쳐왔다.
심장 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핫팩의 온도가 떨어졌다.
새로운 핫팩을 까서 교체한 후 옥상 난간에 서서 주변을 조망했다.
확실히 보이는 게 많다.
높이만 놓고 보면 뒤쪽에 있는 25층 짜리 오피스텔 건물이 가장 높겠지만 그건 높이가 너무 높다.
내가 10층 짜리 건물을 찾은 건 10층 이하의 건물엔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이 건물엔 옥상에도 하나가 있다.
아마 학원 건물이다 보니 건물주가 좀 더 신경을 쓴 모양.
가볍게 매달려 보았다.
튼튼하다.
뒤편을 보니 "made in korea"라는 믿을 수 있는 마크도 붙어 있다.
내가 찾는 걸 발견했을 때 즉시 대응해야 한다.
그런 전장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번 만큼은 m9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몬스터가 경사에 약하다는 정보가 없었다면 나도, 수색대도 더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니.
"놈들이 다시 온다!"
"젠장! 좀비가 판자를 건드리고 있어!"
"좀비를 쏴! 몬스터는 쏘지 말고!"
"아아아악!"
무전기는 켜 놓은 상태다.
평상시라면 모든 일을 덮어놓고 달려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는 게 생생히 느껴지지만 지금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
아군의 상황을 공유받되,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만 한다.
정적에 잠긴 이 죽어버린 혹한의 도시 속에서 내가 찾으려 하는 건 단 하나.
쿵!
내 증오의 원천인 몬스터의 고동이다.
250m 거리, 좁은 골목 쪽에서 파동을 감지했다.
즉시 아래 층으로 내려가 완강기 박스를 열어 로프를 고정하고 완강기를 건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한 후 그대로 로프를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역할 수 없는 중력의 부름에 발이 저릿한 감각과 더불어 풍경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걸 느낄 때 어째서인지 익숙한 졸음을 느꼈지만 땅에 닿기 직전 로프를 잡고 속도를 늦춰 안전하게 두 발을 대지에 디뎠다.
모터사이클은 지척에 있다.
부아아아아앙---
충격파가 발생한 곳을 향해 질주했다.
쿵!
그 와중에도 충격파가 발생했다.
무전기 안에서는 절망에 찬 아우성이 울려 퍼졌고 곧 김상사의 다급한 부름이 들려 왔다.
"어디십니까?! 지금 놈들이 경사를 부수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합판이 놈들의 무게를 못 버티고······"
"내가 신호하면 총격을 가하세요."
"네?!"
"곧 신호가 갈 겁니다."
골목에 도착했다.
"더는 못 버팁니다!"
쿵!쿵!쿵!
총성이 울리는 만큼 파동 또한 그 빈도를 늘려간다.
내 가설이 맞았다.
저 골목 안에 도사리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몬스터는 파동을 일으키는 힘으로 열등한 괴물들을 살려낸다.
이제 그 녀석을 내 눈으로 확인할 때다.
총기를 든 채 골목으로 진입했다.
"키이이이익!!"
신종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날 급습한다.
내 얼굴을 물어뜯으려는 걸 뒷걸음으로 피해낸 후 총기를 던지며 도끼를 들었다.
스걱!
쩍!
바이저의 박리, 그로 인해 드러난 중요 기관의 강타.
두 번의 공격으로 몬스터는 빛의 입자로 화하기 시작했다.
낙하하는 총을 도끼 자루로 받아낸 후 도끼 하나를 도끼집에 넣고 다시 골목으로 진입했다.
"키이이이익!!!"
좁은 골목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신종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숫자는 모두 여덟 마리.
수적으로는 불리하지만 좁은 골목이라는 전장은 일 대 일이라는 내겐 한없이 유리한 환경이다.
총기를 내려 놓고 처음부터 두 자루 도끼를 들었다.
쉭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첫 번째 놈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뮤테이션 개와 이 녀석을 비교한다면, 뮤테이션 개가 이 괴물보다 수십 배는 까다롭다고 말할 것이다.
느리고, 굼뜨고 패턴도 몸을 뒤로 젖혔다 빠르게 앞으로 이빨로 물려는 행동이 전부.
타점도 목이나 얼굴이 아닌 몸통을 노리는 것도 짧은 시간 파악한 신종의 특성이다.
아래를 노린다는 건 필연적으로 녀석의 급소인 두부 쪽을 노출하는 걸 의미한다.
무의미한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내고 마치 생선 상인이 생선을 손질하는 것처럼 놈의 바이저를 박리하고 씨앗처럼 생긴 급소를 강타했다.
"키에에에엑!!"
한 마리.
두 번째 놈이 연달아 덮쳐온다.
본능은 있지만 지능의 결핍이 눈에 보인다.
어떠한 학습 효과도 보이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말이다.
스걱!
쩍!
두 마리.
"키에에에엑!!!"
굳이 숫자는 셀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사냥이 아닌 작업에 더 가까운 걸 감안해보면 말이다.
모처럼 나의 도끼가 신나게 춤을 췄다.
내 도끼는 평범한 도끼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도끼는 티타늄제 도끼라고들 이야기하지만 실은 "슈퍼 스틸"이라고 불리는 최상급 강재로 만든 살육의 도구다.
내 실적에 강한 인상을 받은 국위원에서 날 위한 무기를 제작해주겠다고 말했고 그에 응해서 탄생한, 커스텀 장비라고 할까.
제조사는 오스트리아 쪽으로 아는데 제작에 착수하기 전에 절삭력을 우선할 것인지 내구성을 우선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내 은사 장기영은 절삭력을 추천했지만 나는 내구성을 택했다.
왜냐면 그쪽이 더 많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꺽!
탁월한 선택이었다.
남은 건 단 하나.
쿵!
바로 앞에서 충격파를 일으키는 놈들의 대장이다.
총을 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보면 이미 반사 역장 최소거리 안에 진입한 것으로 보이니까.
"박규 헌터님!"
김상사가 다시금 도움을 청해왔다.
과할 정도로 날 찾는 것 같지만 들려오는 소리를 보면 진짜 급한 게 맞다.
함락 직전, 이른바 "오버런 (over run)" 상황이 아닐까.
"이제 탄환이 없습니다!"
내가 볼 때 그들에게 없는 건 탄환이 아니라 희망일 것이다.
차분하게 모서리를 돌며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놈들의 대장을 찾았습니다."
"대장요?"
"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 제자가 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요?"
"······"
그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탄약이 떨어졌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총성이 뒤를 채웠다.
스피커와 예식장에서 동시에 울리는 총성을 들으며 남은 모퉁이를 마저 돌았다.
쿵!쿵!쿵!
눈앞에 몬스터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전체를 놓고 보면 구형을 이루고 있다.
다른 어떠한 기관도 구조도 보이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치 네크로맨서처럼 하늘 위에 떠 있지만 그게 전부.
내 눈에 들어온 저 새로운 몬스터는 회백색을 띤, 추악한 살점으로 이루어진 구체다.
그리고.
쿵!
충격파를 발생할 때마다 녀석의 회백색 살점 일부분이 허공에 빨려든 것처럼 사라진다.
"......이런 매커니즘이었나."
놈을 노려보았다.
어떠한 적의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옆에 인간이 있건만 녀석은 그 흔한 방어행동 하나 취하지 않는다.
단지 파동을 일으키며 자신의 살점을 검은 안개의 형태로 다른 녀석의 몸에 대신 공급할 뿐이다.
수많은 몬스터를 봤지만 처음 보는 유형이다.
사람을 흉내 낸 네크로맨서 타입, 곤충이나 짐승을 흉내 낸 스파이더, 댄서 타입을 보면 알 수 있듯 몬스터는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의 어설프고, 악의적인 모방이다.
그러나 이 신종은 그러한 모방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충격파를 일으키며 자신의 살점을 열등한 동족에게 공급할 뿐이다.
전투력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지능조차 없다.
그 소름 끼칠 정도로 하나의 기능에 충실한 그 모습은 실로 오랜만에 나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적이다.
우리를 죽이고 우리 세계를 파멸하려는 인류의 적의 본모습이다.
인터넷용이 아닌, 후배를 위한 교보재로 남기기 위해 휴대폰으로 녀석의 모습을 짧게 촬영한 후 도끼를 들었다.
-작가의 말-
금일은 연참입니다!
<73. 완장 (5)> 끝
ⓒ 로드워리어#dp8g
<주요댓글>
-작가는 연참이라는 칼춤을 춘다-
(반물질**) -추천23-
인류멸망 직전 맞네, 저런게 수만마리씩 탱딜힐 조합이라도 맞춰서 온다 생각하면...
(동글**) -추천2-
몬스터들도 점점 진화하나 보네요
기계 수준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모습이 섬뜩하네요
진짜 멸망을 극복할 수 있을 지 걱정되요
(토이**) -추천1-
와 진짜 연참이다아
작가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