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73. 완장 (1)>
유니콘 18의 라이브는 명쾌한 해결보다는 수많은 논란과 의문을 낳았을 뿐이다.
애당초 영상 자체가 워낙에 불안정했고 단편적인 암시의 연속이라 내용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어느 정도냐면 해묵은 CG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중간에 흐릿하게 나온 한라산조차 그것이 한라산이니 백두산이니, 유니콘18이 남자니 여자 목소리를 냈니 하는 갑론을박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제주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거기가 제주도라는 걸 알아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감귤이 있고 돌하르방이 있고 푸르디푸른 숲과 산과 바다가 있는 따뜻한 남국의 섬 풍경 대신, 콘크리트 장벽과 토치카와 요새, 시커멓게 타버린 대지가 펼쳐졌을 때 거기가 제주도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으니까.
결정적으로 영상을 공개한 유니콘18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언제나처럼 댓글 비 20:1 유저답게 벽만 보고 뻘글을 양산해대고 있었다.
unicorn 18: 카노 조니~ 나앗~떼아게루~
unicorn 18: 코노 땡겨
unicorn18: 기분 좋은 거 했어....
unicorn18 : 레드 아카이브 베스트 픽.five
···
···
아무튼 유니콘18이 라이브! 아포칼립스!에 선정될 정도로 중요한 영상을 올린 건 사실이다.
비바봇의 말에 의하면 라이브! 소재 최종 채택은 멜론 마스크가 컨펌 한다고 하니 멜론 마스크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 유니콘 18이 라이브 영상을 올린 이유는 하나다.
도저히 게시판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걸글과 칭얼거리는 글을 써대는 페일넷 유저와 우리를 분리해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비바봇이 라이브! 소재를 올리면 페일넷 쪽을 차단해준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그런데 유니콘이 라이브를 한 이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인천에선 날마다 수천 명이 추위와 영양실조로 얼어 죽고 그 비슷한 숫자가 피난 캠프 간의 총격전으로 죽는다고 하는데 그걸 솔직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 멸망주의자를 위한 안온한 쉼터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비바봇에게 이 문제를 문의해보았다.
나 말고도 문의가 많았는지 비바봇은 관리자용 채팅창에 글을 올렸다.
VIVA_BOT014: 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한국어 게시판과 페일넷이라는 외부 사이트 사이에 열린 구멍을 막을 방법은 당장엔 없어요.
여기 사정도 수월치가 않고 인력도 부족하니까요. 미국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아시죠?
우리의 비바봇이 그다지 성실한 알바가 아니라는 건 1분만 채팅을 섞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대신 그녀가 방법이라고 내놓은 건,
VIVA_BOT014: 하지만 한국어 게시판 상태가 지금처럼 도저히 게시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건 저도 동의하는 바예요. 그래서 생각한 게 게시판 유저 중에서 소정의 절차를 거쳐 게시판 지기를 선임할 생각이에요.
게시판 지기가 직접 게시판을 관 리하며 악성 글을 쓰는 외부 유저를 차단하거나 그 글을 삭제하는 거죠.
몇 명을 어떻게 선임할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한국 어 게시판의 일은 한국어 게시판 유저가 해결하는 게 맞다고 봐요.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다.
그런데 이 비바봇의 답변엔 한국 사람이라면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게시판 지기?"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강한 울림이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 법이다.
나 이외의 다른 유저도 게시판 지기라는 생소한 개념에 관심을 보였다.
익명 424: 게시판 지기?
RkkaRa : 흐음······
ㅇㅇ: 오잉?
gijayangban : ㅋ
익명 458 뭐야? 게시판에 관리자가 생기는 거야?
Berkut_break: 요약하자면 게시판 유저를 무급 게시판 관리자로 부려먹겠다 이 말씀이네?
ㅇㅇ: 뭐야? 이거? 걍 완장이잖아?
Foxgames : 조금 불편하긴 한데 이런 방법으로라도 게시판 관리를 해줬으면 하네.
RokaGG: 호오. 시켜주면 할 애들 많을 거 같은데.
-차단한 유저의 글입니다 -
dongtanmom 냠냠...
mmmmmmmmm: (불끈)
···
···
이건 문제가 된다.
아니, 이 게시판 지기라는 제도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 게시판에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게시판 관리자라니.
게시판 유저 중에 관리자를 뽑는다는 발상은 베르쿠트 말마따나 무급으로 게시판 유저를 부려먹겠다는 아주 치졸하고 비열한 발 상이긴 한데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완장만 채워주면 똥이라도 받아먹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당장 게시판만 봐도 몇 놈 보인다.
mmmmmmmmm:저를 게시판 지기로 뽑아주시면 악성 어그로 유저, 구걸 유저, 낚시 유저, 노잼 유저 모조리 개작두를 대령해 목을 쳐서 클린한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겠읍니다!
dongtanmom 냠냠... 나 게시판 지기로 뽑아주면 냠냠.... 중국썰 좀 풀어줄 수 있는데 냠냠... 솔직히 인천애들 아우성치는데... 진 짜 지옥에 있는 내가 볼땐.... 냠... 우습거든... 냠...
keystone : 완장 차면 재밌겠네~ 나도 시켜줘~ㅋㅋ
-차단한 유저의 글입니다 -
<차단한 유저의 글을 클릭하여 열람하시겠습니까?>
Dies_irae69(차단한 유저) : 모두들 나 잘 알지? 덕분에 더 큰 집단을 이루었어. 그 경험으로 우리 게시판도 보다 체계적이고 기율이 잡힌, 관리를 하려 해. 다들 힘을 실어 줘. 내년에도 우리 모두 이 게시판에서 웃으며 만날 수 있도록.
난리가 났다.
진짜 개난리가 났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완장을 찰 경우, 나타날 지옥도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중에 게시판 지기가 탄생한다면 선량한 올드비 유저 스켈톤이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차단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내 영혼의 오아시스에서 추방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존내논이나 디펜더마냥 여론을 이기지 못해 게시판을 떠나는 건 오케이다.
내 잘못을 내가 감당하는 거니.
그러나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인간의 악의로 게시판에서 쫓겨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내 시선은 자연히 비바봇의 손가락 끝을 향했다.
곧 도입될 게시판 지기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선정될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았다.
VIVA_BOT014: 이건에 관해서는 오후에 공지하도록 할게요~
과연 반나절이 지난 뒤 비바봇이 새로운 공지를 올렸다.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신규 게시판 지기 모집 요강>
정원 : 1명
권한 : 악성 유저 차단(최대 72시간), 악성 게시글의 수정 및 삭제, 좋아요 수가 부족한 게시글의 인기글 선정 등등
선정 방식: 입후보 후, 투표를 실시, 최대 득표자를 게시판 지기로 선정
···
···
"······"
역시 완벽한 관리자의 권한이다.
삭제와 수정이라니.
심지어 비인기글을 인기글로 올려 놓는 생각지도 못한 권한까지 있다.
모니터에 흐릿하게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해야겠지?"
그리고 답했다.
"물론."
딱히 완장이라는 걸 차는데 흥미는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에 반장 선거에 나간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학생회 같은 학생 간부 쪽에 아무런 흥미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완장을 찬다는 건 귀찮은 일이고 불필요한 책임과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학교에 다니던 시기 내 목적은 오로지 몬스터를 죽일 기술과 기량의 연마였기에 다른 부차적인 건 일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완장이 있고 없고가, 앞으로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을 수밖에.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 게시판 지기에 지원한 후보는 현재 시점으로 8명.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1. berkut_break
2. 익명 424
3. Dies_irae69
4. dongtanmom
5. Dolsingman
6. mmmmmmmmm
7. 익명 1031
8. SKELTON
입후보는 자유이기에 듣도 보도 못한 친구도 보인다.
이를테면 익명 1031 이라거나 돌싱맨이라거나, 익명 424 같은.
이중 돌싱맨과 익명 424는 한 번 이상 대화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인, 별 위협이 되지 않는 친구들이다.
berkut_break도 듣보잡이긴 매한가지지만 이 친구는 예전부터 게시판 구석에서 비슷한 스놉끼리 뭉쳐 되지도 않은 담론을 펼치며 패거리를 형성했다.
위협적인 건 디에스이라에다.
내가 그를 차단한 기간에도 그는 물자가 떨어지거나 외로움을 버티지 못한 게시판 유저를 꾸준히 흡수했다.
이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전직 군인은 최소 30명에 달하는 패거리를 형성했다.
어떻게 보면 최대의 세력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그는 집단의 리더로 유명한 유저지, 자신의 이름값 자체에 브랜드가 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그가 얻을 수 있는 투표수는 그가 패거리로 거느린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후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는 역시 m9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떤 의미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군단파가 서울을 장악하고 있을 땐 그에게 응원인지 공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량과 물자까지 공급해줬다고.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이상한 놈인긴 맞지만 그가 인기가 많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m9.
강적이다.
일개 어그로 유저였던 동탄맘도 중국에 간 이후 일약 지구적인 스타로 거듭났다.
아마 비바! 아포칼립스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내 선배 백승현 말고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컨텐츠 제작에 그토록 뛰어난 자질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백승현 마누라가 전직 유튜버라는 소문도 일각에선 돌긴 하는데 그 중국 컨텐츠를 소화해내는 본인은 백승현이니 공은 그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동탄맘. 이 친구도 요주의 인물이다.
이에 맞서는 스켈톤은 진지하게,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다 합쳐도 깜냥이 안 될정도로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사람이다.
내 말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정체를 쉬이 드러낼 순 없다.
우민희도 있고, 강한민 혹은 나혜인일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같은 게시판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프로페서를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스켈톤이라는 브랜드 하나만으로 이 만만치 않은 적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스켈톤이라는 브랜드가 뭐랄까 대중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동네 쌈마이 분식집과 코르동 블랑 출신 쉐프가 운영하는 원 테이블 레스토랑의 차이라고 할까.
내 진가를 알아주는 미식가도 간혹 있지만 확실히 나라는 브랜드는 취향을 탄다.
"뭐? 너도 완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다정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가 이사 가면 많이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서운함을 감추며 그녀의 의견을 구했다.
"솔직하게. 솔직하게 말해 줘. 될 거 같냐?"
"절대 안 돼."
"왜?"
"왜냐니. 스켈톤 인기 없잖아. 객관적으로 비호감에 가깝고."
그녀가 이사를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교신을 종료하고 게시판의 분위기를 보았다.
여전히 게시판 다수는 "ㅇㅇ"로 대변되는 페일넷 구걸맨들이 차지하고 있다.
살려달라느니, 도와달라느니.
일부러 그러는 건가.
이중 대부분은 약탈자일 것이다.
진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이런 데서 도움을 구할 여유도 없겠지.
인천 상황이 진짜로 끝장날 거 같으니 힘 있는 갱단과 집단을 이룬 사람들이 방공호라는 표지를 찾아 집단 이동을 꾀하려는 게 아닐까.
양상길의 실각 이후 인천 정부 쪽에선 아예 손을 놓은 느낌이고.
우민희도 그 이후엔 연락이 없다.
게시판엔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쪽도 손 쓸 방법이 없다는 소리겠지.
유니콘18은 봄이 되면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는데, 글쎄 나는 이 겨울이 끝날 것 같지 않다.
아직도 크리스마스가 지나지 않았다.
이제 12월 초입이다.
"‧‧‧‧‧‧"
뭔가 방법이 없을까.
불리한 열세를 딛고 한 번에 스켈톤이 여러 유저의 선택을 받을 방법이.
여기가 현실이라면 식량과 술을 돌려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겠지만 여긴 인터넷 세계다.
VIVA_BOT014: 투표는 투표 시스템을 준비해야 하므로 3일 뒤에 할 게요.
그동안 불편해도 참으시고, 게시판 지기가 되고 싶은 분은 많은 분에게 지지를 얻도록, 네. 라이브! 특히 라이브! 쪽에 신경을 써주세요.
설상가상으로 완장 투표는 라이브! 아포칼립스!가 끝난 직후에 실시된다.
이건 라이브 소재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뭐, 그게 우리 게시판 유저 모두를 위한 길인 건 맞지만 라이브라‧‧‧‧‧‧.
쉽지 않다.
애당초 나는 나를 드러낼 수 없으니까.
강한민, 혹은 나혜인과의 접촉 때문에 더욱 어려워졌다.
뭐랄까, 나를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금기가 마음 속에 심겨진 기분이랄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라이브 소재는 뮤테이션 사냥 정도가 고작인데.
사냥을 하자니 박규라는 정체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뇌의 나날 속에서 갑작스러운 사고가 터졌다.
페일넷이 멈췄다.
<73. 완장 (1)> 끝
ⓒ 로드워리어#dp8g
<주요댓글>
(추위조***) -추천64-
사이트 망하는 루트 순조롭게 밟는 거 봐라...
(아래***) -추천36-
페일넷이 멈추고 연재도 멈추었다(휴재 ㅠ)
(루****) -추천20-
(***요거트) -추천18-
완장을 뽑을 이유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네.
(둥글***) -추천15-
세상이 멸망에 더 한 걸음 가까워지네요
존내논의 엽적마저 스러져가는건가 싶어 슬프네요
(초열**) -추천11-
페일넷 폭파된거면 이제 정부에서 설립한 사이트 활동량이 높아질려나?
(반물질***) -추천9-
페일넷 서버가 터진건지 아니면 하던 애들이 일순간에 다 죽은건진 모르겠지만
생각못한 방법으로 페일넷 분탕충들은 사라지게 될 거 같은 느낌이다
(lee***) -추천8-
솔직히 존내논이 방사능 전지 폭주 시키고 죽었을 때부터 페일넷은 시한부 행이였지
(열혈**) -추천5-
독자들의 심장도 멈췄다
(아스트**) -추천2-
그녀가 이사가도 괜찮을 거 같닼ㅋㅋㅋㅋㅋ 태세전환 오지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