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67.영웅 (2)
최근 라디오 방송 하나를 듣고 있다
인천 쪽에서 송출하는 건 아니다.
동쪽, 군단파의 장악지대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다들 마음의 양식은 채우고 계신가요?
이상 위성 관측 결과 시베리아 쪽 고기압이 예년보다 더욱 발달하여
예년보다 이른 한파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리준비하시어 다가올 한파에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요청곡은 속초에 사시는 이호영님이 리퀘스트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딥니다.
라흐마니노프.저도 참 좋아하지요."
방송 속의 화자는 마치 전쟁 전에 버스 안에서 혹은 택시 안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목소리가 좋은 여성이었다.
군단파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 방송이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건 사실이다.
약탈자의 시체에서 뺏은 라디오에서 이 방송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평소에 이 라디오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고 방송을 청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방송을 듣는 건 과거의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방송 말미에 여성 캐스터는 아마 군단파가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위험 정보를 이야기해줬다.
"동서울 쪽에 다수의 뮤테이션이 목격됐습니다. 정확한 종은 판명나지 않았지만 동서울에 가실 분은 이점 유념하시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주시 길 바랍니다."
"원주시에서 발견된 대량의 캡슐은 대한민국 국군의 활약으로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일대엔 잔존 몬스터가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시민 들은 이점 유념하시어 외부 활동 등을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균열 쪽에서는 별다른 분출 현상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오늘 날씨는 흐린 후 맑음. 최고 기온은 12도, 최저 기온은 영상 2도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시간은 오전 7시 2분. 이상, 대한민국 국군 종합 방송이었습니다."
현재시간 아침 7시.
전쟁 전 기준으로는 이른 시간이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모두가 깨어 있는 시간이다.
과거처럼 전등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없는 시대다 보니 결국 생활 리듬이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맞춰지게 된 결과다.
적당히 세수를 했다.
냉수 밸브를 들었을 때 손끝에 와 닿는 물의 온도만큼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게 있을까?
미지근한 온수가 나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온은 몸을 가볍게 움찔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수은주를 확인했다.
영상 6도.
싸늘한 날씨다.
잠망경을 통해 골프장을 관측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음.
오늘은 양상길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몇 가지 준비물을 챙겼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과 적당히 정수한 물, 간신히 몸을 데울 만한 연료.
우민희가 사전에 정해 준 정량에 맞게끔 계량하여 준비한다.
중요한 건 양상길 가족이 물자를 비축할 정도의 여유분이 없게 하는 것이다.
우민희가 일일 배급 정량을 정해줄 때 그녀가 한 말이 있다.
"지난 정부 말이야. 의외로 유능했던 거 알아? 아마 세계를 통틀어 가장 잘 준비했을걸? 대통령이 마지막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면 길이길이 칭송될 수 있는 영웅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식량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남아돌았어. 그런데 왜 그때는 그렇게 적게 배급했을까?"
그 답은 아마 양상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전부입니까?"
내가 가지고 온 물품의 양을 보고 양상길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어요. 저도 부족한걸요."
"저기."
양상길이 내 눈치를 살폈다.
"대단히 죄송한데 어제, 제 무전 들으셨어요?"
"네."
무표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혹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나요?"
"무전 함부로 하시는 게 신경이 쓰이네요.
이 주변엔 피난민들이 몇 명이나 있어요. 밤이 됐을 때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불빛 못 보셨나요?
그 사람들은 언제든 어제 온 사람들처럼 약탈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선을 돌려 저 아래 구덩이 쪽을 보았다.
과거에 골프장 벙커라고 불리던 우묵한 부분에 어제 죽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 얇은 흙만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매장을 한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먼 곳에 갖다 놓은 것도 아니오, 집 앞에 있던 걸 바로 옆에 내다 버린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 칠칠치 못한 어중간함이 이 가족이 공유하는 정체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에 들르겠습니다."
모터사이클에 올라타자 양상길이 따라오는 게 보인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대로 액셀을 들어 자리를 떠났다.
이 사람과는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해서도 안 되고.
그 이유엔 이 사람이 교활한 것도 있겠지만,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마다않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진실이 얼마나 있을까?
*
"선선했던 바람이 싸늘하게 식어가네요.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카페라떼가 생각이 나요.
언젠가는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배들이 바다를 오가 며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교환하는 날이 돌아오겠지요?
오늘의 신청곡은 인천에 사시는 K씨가 요청하신 돌아오라 소렌토로입니다."
군단파의 아침 방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라디오를 듣는 취미는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텅 비어버린 방공호 안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감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목소리야 컴퓨터에 저장된 영화 한 편 재생하면 언제든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거지만 라디오 방송의 목소리는 뭐랄까, 살아 있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생방송이라는 게 그래서 수요가 있나 보다.
그나저나 인천이라.
인천에서도 곡을 신청할 수 있는 건가.
군단파의 공작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성 들인, 적어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공작이라면 넘어 가주는 게 인지상정일지도.
물론 내가 이 방송을 듣는 가장 큰 이유는 방송 말미를 장식하는 위험 및 재난 요소 공지다.
음악이 끝나자 낮고 조곤조곤하면서도 우아한 춤사위를 느끼게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휘감아온다.
"원주 쪽에 출현한 몬스터는 국군 소속 헌터 부대의 활약으로 모두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국군 측에서는 최소 일주일 정도 관망을 한 후 주변을 여행할 걸 권고드리고 있네요."
"동서울 쪽에 출현한 뮤테이션 무리는 수달 계열로 확인됐는데 강을 따라 이동 중이며 인간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지만 가까이 접근한 인간을 또 용서하는 것도 아니기에, 강 쪽에 수상한 것이 어슬렁거리면 즉시 달아나는 게 좋겠네요."
여기까지는 일상적인 방송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쿠데타 세력 국위원이 장악한 인천 일대에서 자칭 대통령 권한 대리라고 칭하던 양상길씨가 실종되어 외딴 지역에 유폐됐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그 방송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느긋하게 기대고 있던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대통령 암살 주모자 중 하나인 양상길은 대한민국 국군 임시정부가 수배 중인 1급 범죄자로서 국위원이 현재 저지르고 있는 반역과 국가적 규모 범죄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요, 빨리 그가 잡혀서 진상이 파악됐으면 좋겠네요."
이 방송의 진정한 목적이 프로파간다라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양상길이 이 방송에 나오게 된 건 순전히 자업자득이다.
제 한 몸 살겠다고 여기저기 무전을 뿌려댄 결과가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침 정기 연락 때 우민희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 그래? 군단파 방송에서 양상길을 언급했다고?"
나는 여전히 우민희가 누구 편인지 알 수가 없다.
"별일이야 있겠어? 전에 흠씬 두들겨 맞았잖아? 지상전력은 좀 있다지만 공군이 우리편인데, 자기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녀가 국회파, 아니 국위원의 편인지 아니면 군단파의 편인지.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혼돈 그 자체인 그녀가 한 세력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야겠다.
"만약에 군단파가 양상길을 체포하려 특공대를 보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울지도 몰라."
"그대로 잡혀가는 것도 괜찮은데, 아니다. 사람을 좀 보낼게. 나름 정예를 보내겠지만 위험하면 선배가 좀 도와줘."
"내가?"
"선배가 맡은 일이잖아. 선배가 한 말 기억 안 나?"
"알겠다."
하겠다고 떠맡은 일이다.
일단 떠맡은 이상 상황의 악화는 일을 그만두는 변명이 되지 못 한다.
팀장 시절 입버릇처럼 팀원에게 한 말이다.
자기의 말이 자기를 묶는 족쇄가 된 것이다.
자업자득이지만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당장 펼쳐질 미래가 불 보듯 보인다.
김다람이 나 같은 퇴물이야 그냥 놔뒀지만 양상길을 그냥 둘까?
절대 아니다.
양상길은 그녀가 제주도에 가는 걸 막은 사람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복수를 할 것이다.
양상길의 발버둥이 이 모든 재난을 만든 것이다.
치지직-
정적을 깨고 무전기가 울렸다.
순간 나는 짜증이 치밀어오를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cacg! 여기는....."
아니나 다를까, 양상길이다.
"하, 이 씨발새끼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을 내뱉으며 그대로 골프장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텐트 안에서 양상길이 슬그머니 기어 나오며 내 눈치를 보는 게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뭐 하는 거냐고!"
고함을 지르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하물며 양상길의 가족은 얼마나 놀랬을까.
겁에 질린 채 날 바라보는 양상길의 처와 딸, 그리고 텐트의 틈새로 눈 하나만을 내민 채 슬그머니 날 쳐다보는 양현수의 시선을 외면하고 대뜸 양 상길에게 다가가 그 앞에 똑바로 섰다.
"내가 무전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양상길이 눈알을 혼란하게 굴리는 게 보인다.
룰을 지키지 않는 인간에게 존중은 필요 없다.
"했어! 안했어!"
날선 고함이 골프장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그게..."
"다 죽게 생겼다고.”
"왜 죽나요?"
양상길이 눈치를 살피면서도 뻔뻔하게 묻는다.
"라디오 없어요?"
"라디오요, 아니오. 못 받았어요."
"군단파가 당신 무전을 들었어."
"군단파......?"
"김다람 알지?"
"김다람?"
양상길의 표정에서 그가 김 다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똑똑히 느꼈다.
경멸도 분노도 두려움도 아니다.
그는 김다람이라는 인간 자체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당신이 제주도에 못 가게 막은 여자, 기억 안 나?"
"아."
양상길이 입을 벌렸다.
"김다람 위원"
양상길은 김다람의 결혼식에 10만 원을 부조했고 가볍게 참석도 했다. 식사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김다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금액의 문제가 아니다.
주말마다 경조사에 참석하는 그에게 김다람은 수백 개의 사소한 일정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그 사람이 날 죽인다고요....?"
양상길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웨이큰도 아닌 사람이?"
문득 텐트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날 보는 양현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양현수가 넷상에서 내게 한 말이 있다.
놀아주니 같은 급으로 보이냐고.
제법 이 박규의 심기를 긁은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해야 할 대상은 자신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자신과 어웨이큰을 동일시하는 걸 보면.
"겨우 깡패 셋한테 죽을 뻔했잖아요?"
"......그래도 여자 아닌가요?"
"100m 11초대 터치하는 여자야. 3층 건물을 계단 없이 벽을 타고 올라가 자리 잡는 여자야. 125m 거리 표적을 다이렉트로 25발 전탄 명중시킨 여
자야."
"괴물이라 불린 여자지, 어웨이큰이 나타나기 전엔 "
"그, 그런 사람이었나요? 김다람 위원이?"
"그 여자가 올지 안 올지는 나도 모릅니다"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녀석이 오면 죽을 각오 하세요."
순간, 나는 양상길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재확인했다.
잠시 내게 위축됐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김다람이 오건, 오지 않든 결과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양상길이 씨익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속삭였다.
"우리 가족이 죽는 거......."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가족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한 발자국 걸어왔다.
"저는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살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살아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21세기에,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고 해도 연좌제는 아니 지 않나요? 저도 제 가족이 못난 건 알아요. 평균 이하죠. 와이프는 사치하고 아들놈은 개망나니에 딸년은 어휴 말해서 뭐합니까? 가끔은 저도 환멸해요. 하지만 그 수많은 죽음을 결정한 건 이 양상길이지, 제 가족이 아니잖습니까?"
"가족만이라도 살려줄 수 없을까요?"
이제야 양상길이 무의미한 무전을 계속해서 시도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의 가족을 살리려 했다.
그날 정오경 장갑차 한 대가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민희가 보낸 지원군이다.
장갑차엔 다섯 명의 병사와 한 명의 지인이 있었다.
"샘!"
부쩍 커버린, 잘 알지도 못하는 제자가 날 찾아왔다.
"샘! 문 좀 열어줘요!"
그런데 어째, 우민희와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틀리다?
"우민희한테 이른다?"
문을 열며 나오자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젊은 여성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송유진이라고 했던가.
어웨이큰 하나가 온 건 환영할 일이지만, 겨우 이 정도 전력으로 김다람의 복수를 막아낼 수 있을까? 지켜 볼 일이다.
우민희가 판을 깔고 양상길이 본격적으로 장작을 쌓은 이 불판이 어찌될 지는 말이다.
< 67. 영웅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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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댓글>
(g501**) -추천71-
송유진 우민희 앞이라 쫄아서 친한 척 안한 거였구나...
(이팔삼****) -추천60-
아니 다람쥐 그 자체인 김다람보다 더 날래고 쌘 스켈톤은 그냥 괴물인가?
(드림**) -추천58-
와중에 준비는 엄청나게 빡세게 해놓고 운영을 똥같이 해서 망한 거였냐고,대한민국(..)
(pro***) -추천54-
송유진 저 여자가 박규를 좋아하는 이유는?
송유진은 투시능력자
스켈톤은 22
혹시 그래서?
(qoer***) -추천18-
권력자가 죽으면 그 가족이 무사할 수 있을까. 권력을 함께 누렸으면 몰락도 함께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