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20화 (120/183)

64. 방문 (1)

우민희가 우리 집에 오기로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궁금하단다.

더는 묻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숨기는 게 있냐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

내일 정오경에 온단다.

16시간이 남았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충분히 짧은 시간.

숨겨야 할 건 크게 두 가지다.

노트북과 위성 장비다.

노트북은 상대적으로 숨기기가 편하다.

크기가 작고 가벼워 약간의 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숨길 수 있으니.

방수 비닐에 꽁꽁 포장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을 생각이다.

문제는 위성 장비.

이 녀석은 현재 내 방공호 상부, 언덕으로 향하는 급경사에 돌과 돌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땅속에 살짝 튀어나온 죽순 정도의 크기라고 할까.

천재적 사업가 멜론 마스크는 기존의 접시형 위성 수신 장치가 드론이 널리 퍼진 현재 시점에서는 생존은커녕 약탈자를 부르는 죽음의 함정이라고 봤기 때문에 숨기기 편한 첨탑형 위성 장치를 개발했다.

다들 위성 장치라 부르지만 이 녀석의 정식 명칭은 오벨리스크다.

무게는 8.9kg.

높이는 1.2m, 폭은 32cm.

크기와 성능에 비해 전기는 많이 먹지 않으며 외부 전원이 끊겨도 내부 축전지로 트래핑이 어지간히 많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2시간 이상은 거뜬히 쓸 수 있다.

멜론 마스크의 기적이라고 할까.

대여료만 한 달에 110달러 정도였는데 실제 이 기계의 가치는 2천 달러가 족히 넘는다고 한다.

문제는 역시 크기.

무게도 무게지만 특징적인 생김새 때문에 비바! 아포칼립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생김새다.

이 녀석을 어떻게 감춰야 할까?

우민희는 집요한 여자다.

이 무고한 박규를 일단 엄창이라고 의심하자 그토록 지독하게 달라붙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여자를 속이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내가 중국에 파견에 나갔고 그녀가 대기발령 중에 있을 때 있었던 일화를 들어보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 수 있다.

당시 그녀가 3일간 실종된 일이 있는데 그녀는 남자친구의 트렁크 안에서 발견됐다.

남자친구가 납치한 게 아니라 남자친구의 바람을 의심한 그 여자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트렁크 문을 열고 스스로 탑승해 3일간 스스로 트렁크 안에 갇혀 있기를 자초한 것이다.

남자친구는 무고한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이 일을 기화로 둘이 헤어졌다는 건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속이려면 그만큼의 각오와 기술이 필요하다.

“······.”

그 여자가 내 영역 전체를 들쑤시고 특히 위성장비가 있을 법한 장소를 이 잡듯이 뒤진다는 건 프로페서로 불리던 이 박규의 날카로운 예감에 의하면 100% 확률로 일어날 일이다.

어쩌면 이 분야의 전문가를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

해서, 나도 우리 게시판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SKELTON : (스켈톤 위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우리 위성 장비 말이지. 외부에서 찾을 수 있냐? 그러니까 가스 검침기 같은 가까이 있으면 삑삑거리는 기계로 위치를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자문을 구한 건 우리 게시판에서 가장 컴퓨터를 잘하는 게임 개발자 폭스게임이다.

Foxgames : 그런 방법으로 위성장비를 찾는다는 방법은 금시초문인데?

SKELTON : (스켈톤 안도) 그, 그렇겠지?

Foxgames : 글쎄. 세상엔 반드시 라는 게 없으니. 어쩌면 멜론 마스크 본사와 친한 녀석이 있다면 네가 말한 가스 검침기 같은 거 들고 다니는 녀석이 나타날지도?

SKELTON :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거지?

Foxgames : 그렇지. 아, 그리고 이제 몬스터 파크 슬슬 런칭을 하려고 하는데 메시지로 링크 코드 보내줄게.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로얄 계정이야.

폭스게임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로 통하는 링크였는데 여기로 접속하면 나를 위해 만든 특별 계정으로 자연스럽게 접속할 수 있는 모양이다.

SKELTON : (스켈톤 정중하게 꾸벅) 고맙다.

폭스 게임 덕분에 내가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확률이 낮다는 걸 확인했다.

다시 말해 위성 장비를 굳이 옮길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사실 위성 장비를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완벽하게 위장된 녀석을 옮기려면 기껏 작업한 위장을 모두 철거해야 하고 땅까지 꽤 깊게 파헤쳐야 하니까.

공사를 하는 게 귀찮은 건 아니지만 흔적이 남고 냄새가 남을 수도 있다.

갓 판 땅은 특유의 냄새와 색깔을 갖는 법이니 말이다.

제일 중요한 두 가지, 노트북과 위성 장비가 해결됐다.

그러나 우민희 같은 의심 많은 여자를 속이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지.

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한가한 시간엔 무엇을 하느냐.

어떤 취미 생활을 하느냐.

컴퓨터는 하는가?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답을 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자연스러운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나름의 시나리오는 꾸며 놓은 상태다.

컴퓨터만 해도 거의 쓰지 않는 거치형 컴퓨터를 노트북이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았고 컴퓨터 안의 내용물도 우민희의 방문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의 코스프레를 시전했다.

집안의 소품을 정리하고 그녀가 싫어하는 장기영의 액자 - 그가 내게 강제로 준 것 - 도 정면에 걸어 놓았다.

그렇게 내 방공호는 “인간 박규”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실험적인 무대로 변해갔다.

“······후.”

청소가 끝났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남은 건 나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에 맡기는 수밖에.

가장 중요한 건 평정심이다.

내일 내가 상대할 것이 인간이기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운 녀석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극히 타당한 판단이리라.

*

“선배. 우리 곧 도착할 거 같아.”

멀리서부터 헬리콥터의 굉음이 들려왔다.

접선 장소는 미군 비행장이었다.

트럭을 끌고 그곳에 있다 그녀를 방공호에 데려온다는 게 사전에 합의한 계획이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태풍급의 바람을 일으키며 흙먼지와 쓰레기를 날려 보내는 가운데 헬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우민희가 내렸다.

금속으로 만든 팔과 다리, 흉터가 새겨진,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우아함이 남은 얼굴.

연구소장이라는 직함답게 하얀 가운을 걸친 그녀는 격렬한 바람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헬기에서 내려 나를 향해 금속의 의수를 흔들어 보였다.

“민희. 잘 왔다!”

마음에 없는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군복처럼 생긴 헌터 제복을 입은 여성이 우민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헬기에서 내려 우민희의 뒤에 따라붙었다.

누구일까.

이십대 초중반의 얼굴.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이 박규의 얼굴에 여자의 얼굴이란 고만고만하기에 잘 모르겠고 실제로도 잘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저 신형 헌터 제복은 그녀가 새로운 학교 출신이며 아울러 어웨이큰이라는 걸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겠지.

“저거야? 우리를 마중 나온 리무진이?”

우민희가 나의 트럭을 속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응시했다.

“응. 변변치는 않지만.”

“아니야. 선배가 직접 마중까지 나와줬는데 나한테는 리무진이지.”

그녀가 먼저 트럭을 향해 걸어갔고 그녀의 뒤를 따라 어웨이큰 헌터가 날 힐끔힐끔 쳐다보며 우민희의 뒤를 따랐다.

“······.”

우민희의 꼬봉 같은데 험난한 꼴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민희가 한마디 하지 않아도 알아서 짐칸에 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와 함께 트럭을 타고 운전대를 잡았다.

“별일이네. 네가 다 내 방공호를 구경하겠다고 나서고.”

“아, 그래도 명색이 선밴데 사는 꼴은 구경해야 하지 않겠어?”

“그럼 출발해볼까?”

“잠깐만.”

그녀가 창밖에 의수를 내밀고 손짓했다.

그러자 헬기에서 두 명의 군인이 내리더니 헬기에서 뭔가를 내렸다.

자세히 보니 합성유를 담은 기름통이다.

“저건 뭐냐?”

“선물.”

“선물?”

“나 빈손으로 오는 사람 아닌 거라는 거 잘 알잖아?”

그런 말을 하는 것 치고 그녀는 김다람의 결혼식에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내가 군인을 도와 기름통을 옮기려고 하자 그녀가 날 제지했다.

“가만있어. 저 사람들에게도 할 일을 줘야지.”

짧은 말에서 나는 그녀가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꽤 많은, 솔직하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합성유가 짐칸에 실렸다.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니. 그렇게 오히려 부족할지도?”

“왜 이렇게 많은 걸 주는 거지?”

“이번 겨울, 추운 거 알지?”

“그, 그래?”

“응. 엄청 춥다고 하더라고.”

화물을 전부 싣자 군인들이 손을 흔들었다.

우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수로 창틀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가볼까?”

뒤편의 여성이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우민희도 말이 없고 여성도 말이 없으니 모른 척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

우리는 공항을 떠나 익숙한 도로를 타고 나의 영역으로 그대로 직행했다.

“여기야?”

차를 세우자 우민희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흐음.”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 영역 주변을 감상하듯 돌아보았다.

“선배. 이런데 살았구나.”

“황량하지?”

“방공호는 어디야? 저기?”

평소와 달리 차고 문은 닫지 않았다.

어차피 바로 손님만 모시고 올 것이고 또 내 옆엔 우민희라는 괴물이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지금 군단파가 들이닥쳤으면 했다.

그녀가 있는 이상, 군단파가 몇 명을 데리고 오든, 어떤 장비를 끌고 오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지난 몇 개월간 코빼기도 안 비춘 친구들이다.

내가 기대했던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차고로 들어갔다.

“여기고 차고고 내 방공호는 여기야.”

“와.”

우민희가 내 차고를 돌아보았다.

“꽤 크고 잘 만들었네. 장비도 엄청 많고. 돈 많이 안 들었어?”

“많이 들긴 했지.”

“유진씨는 어떻게 생각해?”

우민희가 내가 모르는 여성을 향해 넌지시 놀아보았다.

“그, 그게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스물둘 셋? 그 정도 됐을까.

우리보다 명백히 뒷세대로 보이는 이 여성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민희 앞에서는 잔뜩 주눅이 든 채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우민희가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공호는 어디야?”

“여기.”

둘을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나의 공간에 초대했다.

“여기가······.”

상대방이 상대방이니만큼 내 방공호의 진짜 이름인 스켈톤 로얄 하우스라는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

“내 방공호야.”

평범하고 지루하게.

그것이 오늘 내가 우민희를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비장의 스탠스다.

“여기가 내 침대고, 여기가 내 무기고. 보다시피 탄약이 참 많지? 정비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해주고 있어.”

“흐음. 저거 뭐야? 변기?”

“응.”

“아~. 환풍구가 저기에 있네? 선배 다운 배치야.”

한바탕 감상을 늘어놓은 뒤 우민희가 곧장 내 영역 안으로 쇳소리를 내며 빠르게 걸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 앞이었다.

그녀는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컴퓨터를 켰다.

“민희야?”

“응?”

“뭐 하는 짓이니?”

“컴퓨터.”

“아니, 남의 컴퓨터 왜 하냐고? 갑자기······.”

“어머.”

우민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바탕화면을 본 모양이다.

아마 그녀의 망막에 비친 건 열대의 남국을 배경으로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걸친 쭉쭉빵빵 서양 미녀의 사진일 것이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엄선해서 갖다 놓았다.

이 박규에게 “자연스러운 인간미”가 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선배, 이런 타입 좋아했어?”

“아, 참. 이거 갑자기 컴퓨터 켜는 게 어디 있어. 부끄럽게시리. 하하.”

“응? 이건 또 뭐야?”

그녀가 또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어머.”

뭘 보는지 화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직박구리 폴더” 내의 서양 미녀 비키니 사진집이다.

이른바 은꼴사라고 불리는 관능적인 사진들.

지나칠 정도로 원색적인 내용은 반감을 살 수 있기에 적당한 선에서 수위를 타협한, 앞선 바탕화면과 더불어 이 박규의 “자연스러운 인간미”를 보여주기 위한 고도로 준비된 장치다.

참고로 이 많은 사진은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의 2년 전 게시글에서 다운받았다.

그러니까 기자 양반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말이다.

우민희는 알 방법도 없고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 큰 외로운 아저씨들이 야한 사진과 동영상을 교환하던 풍습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시절의 유물이니까.

드르륵- 드르륵-

우민희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걸 찾을 수 없으니 성질이 뻗친 모양이다.

“······.”

그녀의 얼굴에 점점 차오르는 짜증을 보며 승리가 점점 가까워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하나가 남았다.

“유진씨.”

우민희가 병풍처럼 서 있던 어웨이큰 헌터를 불렀다.

우민희가 의문의 여성을 부르는 순간 나는 엄창이와 민희(18)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추격전이 이제 클라이맥스를 맞는 감각을 느꼈다.

“네. 소, 소장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봐줄래요? 당신의 어웨이큰 능력을 사용해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유진이라는 여성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굽신거리더니 이윽고 내 영역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나는 발견했다.

유진씨라고 불린 여성의 눈동자에 서린 은은한 광휘를.

우민희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기양양하게말했다.

“유진씨는 투시 능력자야.”

“······.”

“유진씨~. 벽 말고 머리 위 좀 봐줄래요? 위성장비 거기에 있을 거 같은데~ 위성장비 어떻게 생긴 줄 알죠? 아까 보여줬잖아요?”

“······.”

평정심.

우민희는 사람을 쥐고 흔드는 걸 즐기는 여자다.

지금 이 순간도 뱀 같은 시선이 내 얼굴 구석구석을 핥고 있다.

“선배. 진짜 인터넷 안 하지?”

“응. 안해. 어떻게 해? 이런데서?”

“정말?”

“아니, 왜 자꾸 인터넷 이야기를 해? 내가 안 한다는데?”

그때 유진씨가 갑자기 허공을 보며 외마디 비명을 불렀다.

“우, 우소장님! 저기 뭔가 있어요!”

“······.”

“어~? 위성 장비랑 똑같이 생겼네~?”

“······.”

우민희가 날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내 표정을 살핀다.

“선배. 찔리는 거 없어?”

“아니, 뭘?”

난 프로페서다.

“뭐가 찔려?”

내게 프로페서라는 이름을 준 이유가 수천 개도 넘겠지만 장기영이 내게 가장 감탄한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다.

“그리고 무슨 놈의 위성 장비?”

물론 이 부동심은 우둔함으로 이루어진 인내와는 거리가 멀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미묘한 반응과 변화만으로 본질을 읽어내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내게 확신을 줬다.

하나는 유진씨라고 불린 여성의 시선의 방향.

비슷했지만 거기가 아니다.

내 장비는 좀 더 뒤편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진씨라는 여성의 어색한 연기력.

국어책을 읽는 듯한 톤과 발음은 시선과 더불어 내 침착함에 확신을 심어줬다.

“흐음.”

우민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그녀는 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의수가 아닌 진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부분엔 잘 보이지 않던 과거의 끔찍한 상처가 보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파편을 맞은 모양이다.

실명을 면한 것만 해도 천운일 정도로.

한 차례 한숨을 털어낸 후 그녀가 텅 빈 방공호 건너편을 멍하니 응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선배는 양상길씨 어떻게 생각해?”

아마 이쪽이 그녀가 날 찾아온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그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무게만을 놓고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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