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17화 (117/183)

62. 동문회 (2)

음식물 쓰레기라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전쟁 전엔 나도 곧잘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었다.

싱크대에 부착된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과거 풍족하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할까.

맛없는 것도 꾸역꾸역 먹으려고 어떻게든 남겨두는 시대다.

천영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알 것 같다.

“먹으려고 샀는데 맛이 없어져 버려진 거지. 그런데 음식물 쓰레기라는 게 처치가 곤란하잖아? 전용 봉투도 있어야 하고. 아파트 단지라면 기계가 있어서 편하겠지만. 박 선배만 해도 이런 곳에 살았다면 음식물 쓰레기 제대로 처리하기 힘들지 않아?”

“처리기를 썼지.”

“처리기라. 그거 불법 아니냐?”

“뭔.”

“아무튼 느낌이 싸하더라고. 처리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 이 세상에 좋은 자리는 몇 개 없잖아? 그런 건 꼭 귀신같이 채가는 놈들이 있더라고. 어쩌겠어? 내가 박 선배 동기나 1년 후배라면 모를까, 나와 박 선배 사이에 잡웨이큰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데. 견적이 서잖아?”

“저레벨 애들 어떻게 된 지 아는 모양이네.”

내 물음에 천영재는 비릿한 냉소를 머금으며 말끝을 흐렸다.

“나도 몰라. 난 거기 없었으니. 하지만 내가 알던 여자애가 있었는데, 죽었더라고. 전장이 아닌 한국에서.”

“그건 안 됐지만 우연의 일치 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내가 좋아한 애가 좀 많아. 조금이라도 반반한 후배는 다 눈도장을 찍어뒀거든. 다 죽었어. 실종되거나.”

“몇 명인데?”

“32명. 아니, 33명인가.”

“······”

“내가 옳았던 거지.”

이 친구에게 선견지명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본인 주관도 뚜렷하고.

그런데 그렇게 날카로운 식견이 있는 사람이 왜 멸망주의자가 되지 않은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돈 문제겠지만 이 친구라면 충분히 알뜰하게나마 방공호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뭐 했냐? 방공호나 짓지.”

“그게, 판단을 잘못했지. 내가 볼 땐 여전히 올드스쿨 헌터의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파동을 일으키는 애들 숫자가 워낙 적으니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연명할 수 있지는 않을까. 예상을 했지.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나오더라고······.”

천영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방공호에 큰 대짜로 뻗었다.

“좆망한 거지.”

큰 대짜로 뻗어있던 천영재가 날 향해 고개만을 돌렸다.

“나도 방공호를 지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그런데 그거 너무 패배주의자 같더라고. 거 뭐냐? 숏충이들? 나라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애들 있잖아.”

“······내 집에서 나가.”

빗자루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천영재가 갑자기 정색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백가 죽었잖아?”

“죽진 않았지.”

“죽은 거지. 거기서 어디서 살아남겠어?”

“기울어진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아, 그 더 호프에 산다는 인간?”

천영재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어, 아냐?”

“더 호프 - 클리프 행어.”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네······.”

“그 인간 모르는 사람 없지. 군단파조차 손 안 대. 그 새끼들도 내기했다고 하더라고. 그 아파트 언제 무너질지.”

천영재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백가가 죽었던 살았던,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어서.”

“뭘 느꼈는데?”

“그 인간도 말년엔 추했지만 현역 시절엔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열심히 싸우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 저런 식으로 가는 거 보고 가슴이 욱하더라고.”

천영재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한 무리의 사람이 우민희의 연구소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거기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일전에 뮤테이션을 사냥할 때 함께 한 사람들, 헌터 거리에서 지나친 사람들, 흐릿한 기억 너머 중국이라는 전장에서 꿈처럼 스쳐 간 사람들이.

“뭐냐? 이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1열에 무릎 앉아 자세로 앉은 사람들이 조잡한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 특종 군사 교육 기관 “가드” 동문회 >

“동문회?”

글자 쪽이 마치 합성을 한 것 마냥 되게 어색했는데 인쇄품질 자체가 조악해서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응.”

천영재가 사진을 바라보며 쓸쓸히 미소지었다.

“백가도 있었으면 좌우 대칭이 맞을 텐데 말이야.”

“너, 사실은 백가 좋아하는 거 아니냐?”

“그 마누라를 좋아했지. 나한텐 철벽을 치더라고. 아니, 그 백가놈 어디가 좋아서.”

“진짜 나쁜 놈이네.”

“농담이야. 좌우지간, 우리 말이야. 우리가 희생한 것에 비해 너무 푸대접을 받는 거 같지 않아?”

천영재의 시선을 보며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는 솔직해져도 되겠지.

“뭐, 어쩌겠냐. 나라에서 우리가 쓸모 없으시다는 데.”

“나라에서 안 챙겨주면 우리끼리라도 챙겨야지. 군단파건 국회파건, 양파건 다 같은 학교 출신 아니야? 다 몬스터와 싸우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왔고.”

그가 내게 다가와 또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 가드 동문회 입회 신청서 >

“이건?”

나의 물음에 천영재는 윙크를 하며 내게 종이를 강권했다.

“박 선배가 우리 중에 제일 잘난 사람이잖아. 나름 전설적이기도 하고. 이렇게 나라 망해라고 고사 지내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

“해서, 힘 좀 보태주십사 하고. 아무래도 명색이 동문횐데 유명 인사 하나 정도는 있어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겠어?”

“······흠.”

“딱히 하는 일은 없어. 그냥 정기 연락이나 하고. 여건이 되면 단체 사진 및 회식도 하고. 부산에도 한 명 모집했어. 동문의 밤 행사에 온다고 하더라고.”

“그런 먼 곳에서?”

“그러니 가입 좀 해주쇼. 다 같은 꿈을 꿨던 사람이잖아?”

딱히 내키지는 않는다.

과거에 연연한다는 게.

당장 저 너머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데 뒤를 돌아봐서 어쩌자는 건지.

하지만 천영재의 열의에 찬 눈과 그가 말한 같은 꿈이라는 말이 내 심금을 조금은 울린 모양이다.

신청서를 받아들고 서명을 했다.

헌터답게 서명란엔 이름 옆에 콜사인을 적게 되어 있었다.

박규 - 프로페서

“그나저나 동문회장은 누구냐?”

“나.”

천영재가 싱글벙글 웃으며 신청서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동문회 숫자는?”

“이제 두 명이야.”

“뭐?”

“나와 박 선배 둘이라는 이야기지.”

“아까 그 사진은 뭐냐?”

“아, 그거. 포샵한 거. 원래는 헌터 거리 족구회 단체 모임 사진이야.”

“······포샵이었나.”

한 방 먹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이 친구가 동문회를 통해 하려는 게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나와 같은 꿈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지를.

내 동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조금 껄렁하긴 하지만 대견한 후배가 말로만 떠들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프로페서 이름이 딱 들어갔으니 커지지 않겠어? 우리 동문회도?”

“그냥 헌터 거리에 신청서 돌리면 되는 일 아니냐?”

“거기 사람들은 당연히 다 가입할 거고 지방이나 군단파로 넘어간 애들에게도 연락해 볼 생각이야.”

“군단파?”

천영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연락을 하냐? 장치 같은 거라도 있냐?”

“우리가 쓰는 전용 주파수가 있어.”

“뭐지?”

“아, 그건 우리 동기끼리만 쓰는 거라서. 일종의 단톡방 같은 거지.”

“18기는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

“저주 받은 기수잖아? 저주 받은 놈끼리 뭉쳐야 하지 않겠어? 막말로 누가 우리를 보듬어 주겠어?”

“동기 중에 정호라는 놈 아냐?”

디펜더의 이름이다.

성은 모르지만.

“정호? 홍정호? 아니면 유정호?”

“몰라. 잘 생긴 놈.”

“둘 다 잘 생겼는데.”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여동생도 있어.”

“몰라. 둘 다 안 친해서. 게다가 한 놈은 죽었고.”

천영재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바쁘냐?”

“어. 다른 데도 가봐야 하거든.”

“그래?”

“이 주변에 동기가 하나 살아.”

“정호냐?”

“어떻게 알았지?”

“······뭐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

“홍정호야.”

천영재가 씨익 웃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걔한테 내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천영재가 짐을 챙겼다.

잠자코 그가 떠날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처음엔 이 녀석이 내 방공호에 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레베카 모녀가 내 영역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그나저나 내가 까탈스러운 사람인 건 확실한 모양이다.

천영재가 총기를 챙길 때 나도 모르게 권총의 위치를 떠올린 걸 보면 말이다.

“······양상길이 온 거 알지?”

총을 어깨에 매며 천영재가 입을 열었다.

“어.”

“걔, 별명이 뭔 줄 알아?”

“양상추 아니었냐.”

“그건 나라 망하기 전이고.”

철컥

천영재가 탄창을 끼우고 조종간 위치를 확인하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도살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앞에 떠오른 건 양복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쓴 앙상한 체구의 사내였다.

“······소돼지 한 마리 못 잡는 그 인간이?”

“서울권역 인구 줄이기 대책을 그 인간이 고안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이번 백가가 탄 선단도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지?”

“제주도에 있던 후배가 있어.”

“어웨이큰?”

“응.”

천영재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랑 비슷한 친구지. 아무튼 그 도살자 양상길이 인천에 왔다는 건······ 뭐, 뻔한 거 아니겠어?”

“그나마 남은 사람 숨통 끊으러 왔다는 건가.”

“어쩌면 자기도 포함해서 일지도 모르지. 가족도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고.”

출구 앞에서 천영재가 잠시 멈춰섰다.

“어쩌면, 이 주변에 신세를 질지도 모르겠어.”

“······.”

“방공호를 같이 쓰자는 게 아니라 이 주변에 터를 잡는다는 이야기지. 박 선배도 엄한 놈보다 동문이 주변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

“마을이라도 만들자는 거냐?”

“마을? 그거 좋네.”

무슨 재밌는 생각을 했는지 천영재는 재기 넘치는 눈을 반짝이며 씨익 웃고는 올 때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내 영역을 나섰다.

떠나려던 천영재를 향해 한마디 했다.

“지금 실세가 누군지 아냐?”

“실세?”

“제주도.”

천영재는 잠시 날 바라보며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날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박 선배 동기야.”

“강한민?”

“그 인간? 그 사람은 의외로 나사가 빠졌다는 평판이던데.”

“원래 그런 놈이었지.”

“아무튼, 나도 건너서 들은 거라 루머에 불과해. 게다가 선배 지인일 수도 있으니 내가 나쁘게 말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고. 뭐, 본인이 알아서 생각해. 가장 그럴듯한 녀석을. 동기잖아?”

천영재가 손을 흔들었다.

같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서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를 언덕 위에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동기가 실세라니.

누구지?

강한민? 나혜인?

나혜인인가?

강한민보다는 나혜인이 보스 기질이 있으니.

하지만 제주도에 있는 내 동기는 그들만이 아니다.

내 절친이었던 사내, 공경민도 있다.

그는 내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왜 그가 내게 없는 사람이냐면 더 이상 우리는 인연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연했다.

100% 나의 잘못이다.

공경민은 내가 헌터를 그만두는 걸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이다.

“너 같은 놈이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해. 너 말고 헌터를 대표하는 놈이 누가 있겠냐? 이상훈? 김다람? 걔들은 자격이 없어.”

공경민은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보직을 주었다.

헌터 무기 품질 심사관이니, 어디 기억도 안 나는 과 과장이니.

한 번은 교관을 맡기기도 했는데 하필 그때 이 박규의 마음이 가장 약했던 시기인지라 박규 교관의 경력은 보름 만에 막을 내렸다.

아무튼 이렇게 수 차례 내 마음을 돌리려던 공경민은 결국 최후통첩을 했다.

헌터를 그만두면 연을 끊자고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잘못된 행동이지만 당시의 박규는 과거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헌터를 그만뒀다.

그 이후엔 당연히 그와 연락을 하는 일은 없었다.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국위원에 들락날락할 때도 그를 몇 번 만났지만 서로가 무시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몰랐던 타인처럼.

그런데 동문회라.

“어이. 박규. 우리도 동문회 같은 거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동문회 이야기를 꺼낸 건 공경민이었다.

그는 지금 제주도에 있다.

참고로 공경민은 김다람의 결혼식에 5만 원을 부조했고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진 않았다.

금액을 아는 건 내가 그의 봉투를 대신 가지고 갔고 봉투 안을 열어봤기 때문이다.

*

딱히 동문회가 생겼다고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천천히, 시나브로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침식이 의외로 느리고 몬스터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최근에 알았는데, 비바! 아포칼립스! 미국어 게시판에서는 그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는 글이 나왔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 호주 등 건재한 나라의 분출 빈도가 전쟁 전보다 무려 다섯 배나 급증했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몬스터는 다 잡아 놓은 물고기 대신, 상대적으로 건재한 나라를 향해 전력을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나라가 망하는 게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

레베카에겐 중요한 문제긴 하겠지만 최근 나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익명1523 : ㅋㅋㅋㅋ 여기가 뭍 거지들 논다는 사이트냐?

게시판에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기존 유저도 아니고 활동 경력도 제로인 이른바 “신삥” 유저다.

그런데 이 자식.

좀 이상하다.

익명1523 : 거지 동네 드라이브 인증

그가 공개한 영상 속엔 명백히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쓰러져가는 도시를 배경으로 손목에 번쩍이는 명품 시계를 찬 얇은 팔의 사내가 고급 승용차 엠블렘이 떡하니 박힌 차를 모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이 거지새끼들아!”

영상 속의 사내는 얄팍한 목소리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자와 낄낄 웃기도 했다.

그의 정체가 누군지는 내가 아주 잘 아는 게시판 유저가 그에게 직접 묻는 방식으로 확인해주었다.

gijayangban : 너, 양상길이 아들이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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