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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대통령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1분 남짓 짧은 영상 속에서는 눈에 띄게 수척해진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통감하고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가 하야를 하건 말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인천에 자신을 대리할 직무대리를 보낼 예정이란다.
전쟁 이후 혼란기에 아무런 책임자가 없었던 정부 쪽에 처음으로 책임을 질만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직무대리는 내년 봄에 실시될 새로운 대통령 선거 전까지 인천 임시수도 일대와 나머지 지역 쪽의 혼란과 안정을 수습할 것이란다.
그런데 그 직무대리라는 인간,
내가 아는 놈이다.
gijayangban : 정부수단 직무대리로 “양상길”씨 선임
-양상길이 누구냐? ㅋ
국위원 원장 맡던 사람이야 ㅋ
뭐, 잘 하겠지? ㅋ
우민희가 양상길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녀가 말끝마다 붙인 “ㅋ”라는 초성에서 그녀가 양상길에 가진 증오가 바다보다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과연 엄창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긴 하지만 무덤까지 들고 가야 할 문제다.
아무튼, 정부 쪽이 어수선해지자 우민희의 스토킹 행각도 자연스레 멈췄다.
그녀가 계속 바쁘기를 바라며 나도 그동안 소홀히 하던 게시판 활동에 힘썼다.
솔직히 요즘 게시판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워낙에 많은 일도 있었고 겨울 준비를 하랴, 레베카 이사 준비를 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됐으니까.
하지만 겨울 준비도 얼추 되고 여유가 생기다 보니 결국 우리 게시판은 물론이고 페일넷을 다시 기웃거리게 됐다.
최근 페일넷에 눈에 띄는 글이 자주 있다.
좌고우면 : 중국 정부의 만류귀종교 탄압의 실체
극락열반 : (대화의 힘) 만류귀종교는 인간이 몬스터라 부르는 이성인과의 화합을 추구합니다.
우치(愚痴) : 몬스터 옆에서 태연하게 차를 지어 마시는 마원갑 종사와 신도의 모습
행복한바보 : 침식? NO! 조화? YES!
...
...
사이비 종교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이비 교도들이 존내논의 신성한 페일넷에 똥물을 끼얹고 있다.
뭐랄까, 이들의 행동은 누가 봐도 조직적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인기 순위가 높은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벽 보고 광고질을 해대는 그 모습은 인간적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까워 보였다.
전에 들은 이야기로 광신도 중 다수가 북한 생존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완전 침식된 북한에서 몬스터와 함께 살아가는 “평화주의자”들이 전선이 뚫리면서 대거 남하했고 그들 중 일부가 빠르게 대한민국의 잔존 도시에 달라붙어 그들의 광신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단파는 이 사이비 종교와 손을 잡은 정황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페일넷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ㅇㅇ : 꺼져 믿을 게 없어서 중국 껄 처 믿고 자빠졌네
ㅇㅇ : 너나 믿으세요
ㅇㅇ : 느금마 몬스터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맞다.
나도 댓글을 달았다.
SKELTON : 꺄아아아악~! 몬스터!
“······.”
요즘 드는 생각인데 수치심을 버리니 이상한 글을 적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마치 불장난을 하는 아이의 심경 같다고는 할까.
지금은 구원자 취급받으시는 강한민도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 시절, 유일한 취미인 비트박스 영상을 보려고 모처럼 카페테리아 공용 컴퓨터에 자리에 앉았는데 누가 인터넷창을 띄워 놓은 채 자리를 비웠다.
인터넷 창을 보니 누군가 글을 작성해놓았다.
강한남 : 형아~ 거긴 오줌싸는 곳이잖아?!
(코끼리가 양변기에 코를 집어넣고 있는 그림)
이 기괴한 글은 강한민이 쓴 것이었다.
뒤늦게 자리에 온 강한민은 얼굴을 붉히며 묻지도 않은 이유를 황급히 설명했다.
“그, 그게 말이야. PTSD 방지용이라고 할까? 사람이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꺾이잖아? 발산해주는 거지.”
그가 쓸쓸히 웃으면서 먼 곳을 보며 덧붙이던 게 기억에 떠오른다.
“사람이든 기계든, 한 번 망가지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기 어렵잖아?”
당시 나는 장기영을 혐오하고 있었지만 이미 뇌수까지 장기영식 정신론에 경도됐기에 부러지는 자는 약한 자고 망가지는 기계는 형편없는 거라 생각하던 사람이라 강한민의 의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당시의 기억이 무심코 떠오른 건 아마 겨울 전에 있었던 약간의 해프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명84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켈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중요한 일이야.
익명848이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
익명848은 게시판의 오랜 터줏대감이다.
지금은 사라진 카일도스, 익명 458과 함께 활동하는 3인조 친목 패거리로 카일도스가 사라진 후에도 갖가지 글에 감초처럼 등장해 정적이던 우리 게시판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유쾌한 친구들이다.
실제로 현실에서 본 적도 있다.
제2 선비 사건 때 디에스이라에와 함께 청소년들을 혼내주러 갔을 때 익명848도 거기에 있었다.
당시 그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40대 이상이라는 나이를 숨길 순 없었다.
나이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SKELTON : 무슨 일이야? 어디야? 지금?
일전에 그가 평택에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평택 쪽에 있었다.
정확히는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고.
위치가 멀지도 않고 남쪽으로는 큰 위협도 없어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니 일손이 필요하단다.
딱히 물건이나 식량을 요구하진 않았다.
우리 게시판 유저 중에서도 식량이 떨어져서 게시판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고려하면 양호한 조건이다.
“······흠.”
가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내게 메시지를 던지는 녀석이 익명848이 맞냐는 거다.
피난민이 익명848을 죽이고 그 인터넷 가죽을 뒤집어쓰고 무고한 게시판 유저를 유인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사망 시나리오니까.
잠시 고민을 하고 한 번 떠보기로 했다.
SKELTON : 우리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은데,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지?
곧 익명848에게 답장이 왔다.
익명84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뭔 소리야. 선비 사건 때 만난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SKELTON : (스켈톤 깜빡)
“······흠.”
진짜 본인이 맞는 모양이다.
다시 뭐가 필요한 지 본격적으로 물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교통수단이 없단다.
혼자 갈 자신도 없고.
익명84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대신 스켈톤이 쓰는 글마다 추천 달아줄게.
타닥타닥
SKELTON : 정확한 위치가 어디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익명848의 영역으로 향했다.
골드의 영역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걸친 황야를 지나 폐허가 된 도시를 왼쪽을 두고 강가로 향했다.
예전에 전쟁 전에 이곳에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어 운동 삼아 트래킹을 한 기억이 있는데 이제 그 산책로는 억새와 잡풀에 가려져 어디 있는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억새 위로 녹슨 채 솟은 노변 운동기구가 그곳에 산책로가 있었다는 걸 쓸쓸하게 말해주는 듯했다.
인적이 확실히 드물다는 건 나무에 목매단 시체가 백골이 된 채 아직도 회수되지 않고 있다는 걸 보고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버려진 폐공장을 표지 삼아 익명848의 영역을 찾았다.
그는 강변에 살고 있었다.
여느 멸망주의자처럼 물가에 생활오수를 고스란히 강물에 배출하는 편하지만 위험한 방식을 선택한 모양이다.
저 너머에 옛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모터사이클을 바로 세우는 대신 꽤 빠른 속도를 한 바퀴 돌아 주변을 정찰했다.
특별한 매복이나 공격의 징후는 없었다.
옛 정류장에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경적을 가볍게 4번 울렸다.
이게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신호다.
총기를 든 채 엄폐물이 될 만한 나무 뒤에 숨어 주변을 경계하며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곧 누군가 숲 쪽에서 어른거리며 나타났다.
중키에 깡마른 체구.
양 볼이 움푹 들어가고 눈빛이 음산한 사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나는 이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익명848이다.
“스켈톤.”
그가 먼저 내 닉네임을 말했다.
“848.”
같은 닉네임으로 화답했다.
그와 마주 섰다.
그가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쳐 인사했다.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
“게시판 친구가 부르면 와야지.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날 찾고.”
그의 건강 상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옷도 깔끔했다.
다만, 그의 얼굴에 서린 치열한 갈등이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게 했다.
곧 익명848이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카일도스. 기억 나?”
“어. 알지.”
“그 친구랑 내가 좀 친해. 익명458도 우리 팸이긴 한데, 사적으로는 내가 더 친하거든.”
서두가 긴 걸 보니 내 예감이 맞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익명848이 전형적인 부탁하는 사람의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캡슐.”
역시나.
“스켈톤. 네가 카일도스네 나타난 캡슐 치워줬다며?”
“카일도스한테 들은 거냐?”
“둘만의 비밀 이야기야. 다른 애들은 몰라. 익명458도 몰라.”
“······그래?”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방공호는 고사하고 방공호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다.
“물 좀 마시자. 낮엔 좀 덥네.”
“잠깐만. 음료수 남은 게 있어.”
“뭐?”
“테자와.”
“딴 거 없어?”
“소나무의눈이 있는데.”
“다른 건? 콜라라든가, 사이다든가.”
“없어. 전쟁 초에 창고 쪽을 털었는데 그것만 남았더라고.”
“테자와로 줘. 얼음은 없지?”
“그런 사치스러운 게 있을 리가 있나. 아직 9월 촌데.”
음료수를 가지러 가는 그를 따라가 보았다.
익명848이 기겁을 한다.
“아니, 따라오지말고 여기 있어! 여기!”
“왜? 방공호 한 번 구경하려 하는데.”
“아, 그게. 내 방공호가 좀 그래······.”
익명848이 시선을 피했다.
그를 슬그머니 보며 넌지시 물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냐?”
“으, 응! 그런 게 좀 있어. 남에게 보여주기 힘든.”
“괜찮아. 신경 안 써. 리얼돌이 있건 시체가 있건. 여자가 있건. 그냥 남의 방공호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진짜 미안한데 그건 다음에 하면 안 될까?”
그때 나는 직감했다.
이 과할 정도로 미안하면서도 단호하게 방공호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이 사내가 역시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여자나 시체인가.
뭐, 아무래도 좋은 것이겠지.
뭐든 일어날 수 있는 시대다.
“여기에 있을게.”
“정말 고마워! 진짜 미안하다. 스켈톤. 부탁하는 주제에 이거저거 요구하는 게 많아서.”
“천천히 다녀와.”
그가 음료수를 가지러 간 동안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캡슐이라.”
귀찮고 위험한 일이다.
이런 후방까지 캡슐이 나타났다는 것 또한 미래가 어둡다는 걸 노골적으로 암시했다.
하지만 이 캡슐.
잘만 쓰면 괜찮을지도?
그러니까 군단파가 올만 한 경로에 캡슐을 놔두면 그들이 좀 더 나를 덜 노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부 지방이 박살 난 마당에 몬스터 한 마리 소굴을 덜 만드고 더 만드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물론 캡슐의 위험성은 확실히 체크해야겠지.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흠.”
익명848이 안 온다.
10분이 지났는데.
음료수를 만들기라도 하는 건가.
부스럭-
관목이 우거진 숲쪽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명848이 사라진 방향이 아니다.
혹시나 싶어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슬그머니 권총을 빼들고 그쪽을 주시했다.
곧 사람 하나가 숲에서 튀어 나왔다.
“음?”
익명848이 아니다.
여자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
무기는 없었다.
영양상태가 나쁘지 않은 얼굴에 옷도 깨끗한 걸 입었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눈치였다.
그녀가 사방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메마른 외침을 내었다.
“스켈톤? 스켈톤?”
나?
나를 찾는 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날 발견했다.
“스켈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진짜 스켈톤?”
두 번이나 날 아는 체를 하는 여성을 노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누구냐?”
다른 건 몰라도 이 여자의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날 보고 환하게 웃던 그녀는 이내 다급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꾸고 내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초면에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요. 저, 익명848이라는 사람한테 납치당했어요!”
“······납치?”
“네. 2년 넘게 붙잡혀 있었어요. 매일 같이 원치 않는 관계를 요구받고요. 더는 이대로 못 살겠어요. 부탁인데 제발, 저를 여기서 빼내 주지 않겠어요? 뭐든 할게요! 여기서 나가게만 해주면!”
“······.”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하루에 몇 번을 요구하는 줄 몰라요.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종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말 지옥 같은 삶이에요. 이러다 저 자살할지도 몰라······.”
그녀의 말문이 멈췄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내 등 뒤, 그러니까 그녀의 시야에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예진아.”
익명848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는 나와 예진이라 불린 여성을 번갈아보다 여성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안타까운, 동시에 분노가 응어리진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뭐 하는 거야. 거기서?”
예진이라 불린 여성이 나에게 매달렸다.
“스켈톤님.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요!”
“뭐 하는 거냐고!”
양쪽에서 터져나오는 고성에 나도 모르게 뒷목을 잡았다.
“······하.”
불현듯 오늘은 캡슐이 최약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