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변절자 (2)
군인의 상태는 생각보다 양호했다.
대체 어디를 기어왔는지 곳곳에 풀씨니 흙이니 덩굴이 덕지덕지 달라붙긴 했지만 큰 외상도 없었고 병도 없었다.
흔히 보이는 알콜 중독의 병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심문을 시작했다.
내 영역이 알려지길 원치 않기에 심문 장소는 그를 체포한 개울가 옆에서 진행했다.
“관등 성명.”
심문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우리는 몬스터를 상대하지 군인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몬스터를 상대로 심문을 하는 날이 온다면 모를까.
그래도 옆에서 중국군과 용병들이 민간인을 잡고 심문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가락을 살려 심문을 시도해보았다.
그 중국인의 이름은 내가 발음할 수 없는 성조를 품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단순하게 마씨라고 칭하기로 했다.
마씨의 계급은 소교, 우리나라로 치면 소령이다.
나이는 많아 봐야 이십대 후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멸망한 나라의 계급이란 건 멸망해가는 나라의 화폐 가치만큼이나 무가치한 것이기에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추측대로 그는 당진 쪽에 자리 잡은 중국 상륙군 부대 소속이었다.
조선성 방면군 해방 저쩌구저쩌구 자질구레한 지휘체계를 언급했는데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가 궁금한 건 그가 내게 말한 내용이다.
서울과 핵폭발.
“서울은 없어졌는데. 소수는 살겠지만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
이에 마씨는 목표를 정정했다.
“서울 옆에. 사람 많이 사는 바다 도시.”
“인천?”
마씨가 강하게 긍정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모인 그 도시를 파괴할 겁니다. 전부 다 죽여버릴 생각으로요.”
“막을 방법이 없잖아?”
막말로 지금 핵미사일을 날리면 막을 여력이 있을까?
전쟁 당시 미국이 제공한 최신예 탄도 미사일 요격 체제가 훌륭하게 작동한 건 맞는데 중국도 그만큼 어마무시한 양의 탄도 미사일을 날리는 것으로 대응했기에 결국 서울에서 몇 발 떨어지고 인근도 쑥대밭이 됐다.
게다가 전쟁 발발 후 3년이 지났다.
방위 시스템이 남아 있더라도 과연 가동할까?
정부가 온전하면 모르겠다만 군단파와 내전까지 벌인 이 상황에서 말이다.
“우리도 이제 하나밖에 없어요. 혹시라도 막히면 그게 끝이기에 신중하게 쓸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씨의 한국어는 처음엔 어눌했지만 이야기를 할 수록 혀가 풀린 모양인지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의 호흡과 어휘를 구사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벌써 인천 쪽의 접선인이 핵폭탄을 수령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인천 쪽의 접선인?”
배신자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마씨의 이야기가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접선인은 인천의 중심가까지 큰 화물을 싣고도 의심받지 않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에 잠수함에 실렸던 핵미사일에서 분리한 핵탄두를 제공, 인천 중심에서 그걸 터뜨릴 계획입니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왜 중국군 소속인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가짜 정보를 퍼뜨리는 건 흔한 공작이다.
당장 페일넷에서만 해도 정부 쪽 끄나풀로 보이는 인간들이 저 동탄맘의 최후를 조작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유가 뭐지?”
내 시선의 차가움을 그제야 눈치챘는지 마씨가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 군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죽는 게 싫었습니다. 이미 끝났잖아요? 전쟁도 그렇고 나의 나라도 그렇고. 다 끝난 마당에 굳이 이 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다.
나도 중국인 앞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떠들 수 있다.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혹시, 조선족?”
한국말을 저렇게 잘한다면 99% 아닐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씨는 고개를 저었다.
“한족입니다.”
“한국말 잘하시네.”
“이 나라에서 학교를 나와서요.”
“어떤 학교?”
“한국인들이 지잡대학이라고 말하는 곳입니다. 경상북도에 있었죠. 하지만 좋았어요. 봄이면 벚꽃도 피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친구도 많이 만들었어요.”
“몇 년 있었지?”
“5년? 아니 6년은 된 거 같네요. 아버지가 그만 돌아오라고 성화를 부릴 때 6년이라는 이야기가 서로의 입에서 오간 게 기억이 나요.”
6년이라.
이 사람 말이 진실이라면 열심히 공부를 했던 모양이다.
나도 중국에 그 정도 있었던 거 같은데 제대로 된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걸 보면.
“그보다, 시간이 없습니다! 진짜 없어요. 선발대가 접선책을 만나면 끝입니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한국 쪽의 군사책임자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고위층에 저를 연결해주세요.”
소개는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소개를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의 말을 그 사람들이 믿어줄까?
나조차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애당초 그에겐 아무런 증거가 없다.
과할 정도로 능숙한 한국어와 그럴듯한 사연은 어떤 사람에겐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의 설득력을 부여해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사전에 잘 꾸민 스파이의 상용구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어디서 오셨는지?”
마씨는 서쪽에 치우친 남쪽을 가리켰다.
“올 때 뭐 마주친 거 없습니까?”
그가 서남쪽의 중국군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그 방면의 지배자, 골드를 말이다.
“아니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마씨가 엉거주춤하게 선 채 날 보며 불쑥 말했다.
“저는 그 개들의 영역을 피해 왔어요.”
“우회로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네. 우회로로 갔죠. 그래서 몸이 만신창이가 됐어요. 길 같지도 않은 곳을 간다고. 그래서 탈진했죠.”
“······.”
“저랑 같이 탈영했던 친구들은 어리석게도 그 개들의 영역으로 향했어요. 소리가 엄청 나더라고요. 아마 살아남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씨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그 친구들이 한국 군인을 만난다고 해도 사정을 잘 전달하지 못하겠죠.”
“핵탄두를 육로로 실어나를 생각입니까?”
나의 물음에 마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겁니다. 잠수함이 갈 수 없어요. 가까이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이 알고 폭뢰를 던져대니까요.”
“육로엔 그쪽도 아는 뮤테이션이 있을 텐데.”
핵탄두는 대단히 무겁고 부피가 큰 물건이다.
육상으로 운반한다면 1톤 트럭은 버겁고 최소 2.5톤 트럭 정도는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군 주둔지에서 인천으로 향하려면 골드의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
쉽지 않다.
골드 패거리는 높은 확률로 영역에 진입한 인간들을 공격한다.
뭐, 가끔은 배가 불러 안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런데 마씨 말에 의하면 이번 작전은 사활이 걸릴 일인데 그 중요한 일을 뮤테이션 개의 변덕에 맡기는 게 가당키나 할까?
“······뮤테이션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왜요?”
약간의 반감이 담긴 건 내가 골드를 벗으로 생각한다는 간접적인 증거겠지.
내 뜨거운 눈길을 그대로 받으며 마씨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수함에서 본토에서 활동하던 헌터가 올 예정이랍니다. 엄청난 실력자라고 하더군요.”
“본토요?”
“정확히는 하이난일 겁니다. 중국 남쪽 끝에 있는 섬요. 거기는 아직 침식이 안 됐다고 들었거든요.”
제주도 같은 곳인가.
하긴 그 큰 나라에 제주도 같은 섬 하나둘 정도는 있겠지.
“그 잠수함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어제, 아니 그제쯤 도착했겠네요.”
잠시 생각했다.
이 친구.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의 동기는 분명 의심스럽지만, 어제 뮤테이션 개들이 포효를 내지른 건 사실이다.
“······잠시만 있어 보세요.”
내가 팀장 시절이었다면 겨우 이 정도 단서와 가능성만으로 상부에 보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심증이 있지만 증언뿐, 내가 믿어줘야 할 가치가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민희가 나이를 먹어 나름 둥글어진 것처럼 나 또한 걱정이 많아졌다.
어쩌면, 비슷한 시도를 내 집 앞에서 목격해서일지도 모른다.
우민희에게 교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두 번을 더 연락하자 그제야 부하로 보이는 여성이 무전기를 받았는데 그 무전기를 받고 한다는 말이,
“죄송한데 우소장님은 제주도에 가셨어요. 연락이 안 되요. 돌아오시면 연락을 할게요.”
“아니, 그게 중요한 일입니다.”
“저한테 말씀하지 마세요.”
“중국군이 인천에 핵공격을 시도······.”
“끊을 게요.”
교신이 끊겼다.
다시 교신을 시도했지만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
어떻게 해야 하나.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솔직하게 할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막상 교신이 연결 됐어도 우민희는 내 말을 안 믿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 없는 사안이니.
오히려 짜증냈을지도.
그나저나 이 박규의 인상이 썩 좋진 않았던 모양이다.
우민희와 교신을 시도하는 동안, 문제의 중국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흔적을 보고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내버려 두었다.
*
간밤에 느닷없는 포성에 눈을 떴다.
남서쪽, 골드의 영역이다.
개 짖는 소리도 났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눈을 뜬 이후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포성은 물론 뮤테이션 개들의 포효도.
“음.”
헛것을 들은 건가.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지만 가끔 꾸는 악몽 중 하나는 내 방공호 출입문을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열고 들어와 내게 총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 총성이 너무나도 실감이 나는지라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비슷한 악몽인가.
악몽치고는 본 게 없는데.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니 디펜더의 교신기가 울렸다.
“방금 소리 들었냐?”
디펜더다.
“폭음이 들린 거 같은데.”
“너하고 친하다는 뮤테이션 개 영역 쪽에서 들렸는데, 내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중국애들 쓰는 헌터 무기 소리로 보여.”
“중국 헌터 무기?”
졸음으로 몽롱한 정신이 싹 달아나는 걸 느끼며 어제 홀로 떠나보냈던 중국 군인의 뒷모습이 불길하게 떠올랐다.
“추코누.”
“?”
“연노(連弩)이라 불리는 무기야. 팔목에 차는, 시야 조준형 3연발 폭발 볼트 발사 장치. 말 그대로 착용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3발의 폭발성 볼트를 꽂아 넣는 무기야. 볼트 하나하나가 유사 드론이라 유도성도 있어.”
“내가 모르는 무기다.”
“한국과 갈라서기 전에 막 실전투입 된 무기니까. 그래도 특징적인 발사음은 확실히 기억해. 공기 그 자체를 잡아 찢는 소리가 연달아 나거든. 추코누야. 그건.”
중국군.
그것은 전쟁 전에 가정한 수많은 위협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던 위협이다.
내 영역 전체를 중국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중국군이 우연히 날 발견해 소탕하는 시나리오는 박규의 배드 엔딩 중 하나였으니.
그 해묵은 위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제 중국군을 발견했어.”
디펜더가 요즘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인터넷에서 조금 과할 짓을 한다고 해도 그는 나의 이웃이다.
솔직하게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거. 진짜냐? 특히, 인천에 접선책이 있다는 거.”
“응.”
“······씨발.”
순간 당황했다.
디펜더가 사람을 잘 죽여도 욕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진심을 담은 욕설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할 거까지야.”
“아. 그 중국인한테 접선책 이름은 물어봤어?”
“아니.”
“한 번 찾아봐 줄래? 나는 동생과 함께 주변을 한 번 탐색해볼게.”
“알겠다.”
간단히 세수만을 하고 영역을 나섰다.
모처럼 자전거를 꺼내 들었다.
이제는 모터사이클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자전거가 모터사이클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
다행히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있었고 만월을 향해 점점 차오르는 커다란 달이 어두운 대지를 밝혀주고 있었다.
별을 이정표 삼아 북쪽으로 향한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씨를 발견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퉁퉁 부은 그를 일으켜 의식을 확인했다.
“다, 당신은?”
다행히 그는 날 알아보았다.
누구의 짓인지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판국이다.
“접선책의 이름을 아나?”
“접선책? 위치는 아는데. 아. 그게.”
마씨가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크게 떴다.
“허씨. 허씨였어.”
“허씨?”
디펜더의 욕설이 무심코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울러 디펜더와 연관이 있고 나 또한 직접 본 적이 있는 인물을.
“허종철?”
그 이름을 말했다.
마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사람이었어!”
허종철.
전직 헌터이자 마이너 어웨이큰.
그는 이 나라를, 같은 민족을 증오했다.
그렇기에 핵폭탄으로 인천 시민 전체를 날려버리자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그 사내가 중국군과 손을 잡았다.
그것도 핵을 가진 중국군과.
디펜더의 교신기가 희미하게 울렸다.
“뮤테이션 개 세 마리의 시체를 확인.”
아주 잠깐, 내 동공이 흔들렸으리라.
하지만,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시체 중에 골드의 것도 있나?”
“그건 알 수 없어. 야간이고 고고도에서 확인한 거니.”
아무튼 이것으로 모든 건 확실해졌다.
마씨의 말은 진실이다.
중국군은 인천의 한국인과 손을 잡았고 핵폭탄을 수송할 육로를 뚫기 위해 헌터를 데리고 와 골드 패거리를 짓이겨놓았다.
“······.”
잠시 생각이란 걸 했다.
돌이켜보자.
나는 구원자도 아니고, 전장에 설 자격도 없다.
스스로 은둔자를 택한, 구시대의 사냥꾼이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의 재앙을 보고 넘어갈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천 명, 만 명도 아니다.
삼백만 명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적거나 많겠지만.
그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이 내 손에 달렸다.
“도와줄 수 있겠나?”
교신기 너머로 진한 한숨이 들려왔다.
“······따라가면 어째선지 녀석의 편을 들 거 같아.”
그 말에 난 그다지 실망을 하거나 충격을 받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질문을 추가했다.
“한 팀이었냐?”
“응.”
고개를 끄덕였다.
한 팀이었다면 어쩔 수가 없겠지.
나조차도 망설였을 것이다.
아무리 싫은 팀원이라고 해도 그 팀원이 타인의 공격을 받는다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법을 학교에서 익혔으니까.
그것이 우리, 올드스쿨 헌터다.
“알겠다. 그렇다면 나 혼자······.”
조금 씁쓸한 마음을 느끼며 단념을 결정지으려 할 때였다.
“스켈톤!”
교신기 너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하는 거야?”
다정이의 목소리다.
지금 상황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밝은 분위기.
의아함을 느끼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단어를 고르고 있자니 그녀가 대뜸 날 몰아세우듯이 말했다.
“소환권 안 쓰고!”
“소환권?”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한 우리 멍청한 오라버니가 준 거 있잖아?”
맞다.
그게 있었지.
디펜더가 직접 그려준, 조잡한 디펜더 소환권이란 것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환권엔 진솔한 색채가 있었다.
어느새 색안경을 껴버린 지금에서는 볼 수 없는 색깔이 말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스며드는 걸 느끼며 교신기에 대고 말했다.
“소환권 콜.”
교신기 너머에서 약간은 체념하는 듯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곧 그 웃음의 주인공이 내 앞에 트럭을 끌고 나타났다.
“디펜더, 등장.”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초딩이냐?”
“비트박스보다는 낳는다고 생각하는데?”
디펜더가 주먹을 내밀었다.
조금은 내키진 않았지만 두 주먹이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혔을 때 그 내키지 않았던 감정은 내 안에서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