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판결 (4)
“아니오. 거절하겠습니다.”
“왜요?”
“소리도 없이 오는 녀석이 언제 올지 알고 저 불쾌한 사람만 보고 있어야 합니까?”
만석이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며 한 템포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시죠.”
만석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지나쳤다.
툭
어깨를 부딪친 건 심기가 불편하다는 나름의 암시겠지.
어차피 저 친구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당장 오늘이나 내일 찾아올 죽음의 사신을 상대하려면 내 도움은 절대적이니까.
그가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깡패들이 가진 총기와 장비를 재점검했다.
딱히 눈에 띄는 장비는 없다.
조명탄도 없고 야간투시경도 없다.
조잡한 LED 전등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빛이라고 할만한데 그 LED 전등 대부분이 컨테이너 위에 우뚝 솟은 장대에 매달린 사내를 비추는 데 쓰였다.
그의 계획 - 부엉이가 판사를 덮치고 그때 죽음의 칼날을 발사하는 장치를 쏴서 부엉이와 판사를 동시에 죽이거나 이미 죽은 판사와 부엉이를 다진 고기로 만드는 작전 -은 겉만 보면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인류가 아마 최초로 새를 잡았을 함정도 미끼를 써서 새를 유인하고 새가 미끼를 물면 그 미끼가 새를 무는 구조로 설계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상대하는 적이 우리와 닮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두 번 이상 알려줬지만 만석이란 깡패는 그 의미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밤이 왔다.
하필이면 그믐달에 가까운 칠흑처럼 어두운 시기다.
심지어 하늘마저 깡패를 도와주기 싫다는 듯 구름이 가득해 안 그래도 어두운 밤이 더욱 진한 어둠으로 덮였다.
우리의 전장도 어둠에 덮여 있긴 매한가지지만 만석이가 손짓하자 LED 조명이 일제히 켜지며 컨테이너 위로 우뚝 솟은 장대 위에 묶인 알몸의 사내를 마치 오늘의 상품처럼 밝게 비추었다.
만석이가 버둥거리는 남성을 보며 희게 웃었다.
“어이. 판사 양반! 기분 좋겠네? 높은 자리 좋아하잖아. 응? 어이! 거기 있으니 우리가 다 네 밑으로 보여?”
만석이는 가시 말뚝을 촘촘하게 박은 개인 참호에 블레이더를 든 채 숨어 있었다.
“좀 더 갖고 놀고 싶었는데, 내 사정이 어려우니. 거, 개새끼 키우는 애들도 힘들면 버리잖아? 같은 거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나도 요즘 힘들어.”
장대에 묶인 판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기운도 없다는 게 맞겠지.
그가 오늘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에 대한 만석이의 증오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이. 판사 양반. 혹시 이 시대에 경찰과 검찰이 있고 이 몸이 잡혀서 재판을 받는다고 치자고. 이제 높은 곳에 있으니 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어떻게 판결할 거야? 응? 사형?! 무기징역?!”
끝도 없이 날 선 조롱을 늘어놓는 걸 보면 말이다.
다만 헌터로서 내 입장을 밝히자면, 그가 떠드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지로 보이지 않는다.
이 박규가 소년 박규였던 시절, 나의 은사 장기영은 독특한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뮤테이션이 됐을 때 상대하기 까다로운 짐승들을 생각해서 선정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준 것이다.
당연한 일지만 1등은 박규 소년의 차지였다.
뒤통수가 뜨거워질 정도의 이상훈의 시선을 받으며 장기영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박규. 너 완전 파브르네!”
당시 장기영이 내게 했던 칭찬은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을 깨는데 일조했다.
시튼도 아니고 파브르라니.
그때부터 사람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아무튼, 이 박규가 당시 조사해서 칭찬을 받은 동물 - 수리부엉이는 사냥을 위해 태어난 포식자다.
커다란 눈에 가려 드러나지 않지만 부엉이의 귀는 양쪽의 높낮이가 다르다.
그 차이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이 내는 소리를 통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만석이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건, 글쎄다.
잡아먹으라고 밥상 위에 올려 놓은 판사 양반보다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무식한 인간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판사다.
묶여 있던 판사가 갑자기 입을 연 것이다.
“이 저열한 인간아.”
마치 태어나려는 생명처럼 온몸을 버둥거리면서.
“판사가 조선시대 사똔 줄 아나. 법과 규정 무시하고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줄 아냐고? 거기서 내가 그 녀석을 구속하려고 얼마나 고심하고 고뇌한 줄 알아? 구속을 할 수 없는 사유가 너무 명백하니까 풀어준 거라고. 당신도 몰랐잖아? 그 사람이 당신 딸 죽일 거? 당신이 알았으면 당신이 가서 지켜주던가? 안 그랬잖아? 그래? 안 그래?”
뜻밖의 일이다.
끝없는 학대 속에서 영혼마저 파괴된 것처럼 보이는 이 사내에게 아직도 이런 말을 할 저력이 남아 있다는 게.
옷이 없어도 깡패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조롱을 받아도 그는 여전히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죽을 운명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 사내는 인내의 가면을 벗고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당당하게 이 무자비한 깡패에게 밝힌 것이다.
만석이 말마따나 그가 좋아하는 높은 위치에서 말이다.
“이, 이, 이 새끼가?!”
판사를 올려다보는 만석이의 얼굴은 LED의 역광 때문인지 악귀야차처럼 보였다.
그가 가시 말뚝을 박은 개인호에서 나와 블레이더를 판사에게 겨누었다.
“이 씨발놈이 지금까지 주둥아리 처닫고 있다가 진짜 뒤질 거 같으니 아가리를 여네?”
툭
만석이가 블레이더를 땅에 떨궜다.
악귀야차 같은 얼굴에 진한 미소가 암운처럼 스며들었다.
“야, 접어.”
그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 사냥 안 해. 그래. 사냥이고 나발이고. 너 이 새끼 두 번 다시 주둥아리 못 열게 해주지. 야! 총 가지고 와. 볼때기에 바람구멍을 내주지.”
살벌하기 짝이 없는 협박.
하지만 판사도 이제 돌이킬 수 없는지 쉬지 않고 말을 토해냈다.
“너 같은 짐승을 위해 법과 제도가 만들어진 거야. 쉽게 흥분하고 무조건 사형만 외쳐대는 저열한 짐승을 위해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만들어졌고 삼심제가 만들어진 거라고.”
“이 새끼가?!”
만석이의 눈이 뒤집혔다.
그가 마치 성난 원숭이처럼 사다리를 올랐다.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깡패가 불길한 눈으로 사다리를 오르는 만석이를 지켜보았다.
“······.”
바람이 불었다.
동에서 서로.
문득 지평선을 응시했다.
“?”
뭔가 있다.
어둠보다 짙은 무언가가.
“뮤테이션!”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소리를 질렀다.
“뮤테이션!!!”
타타타타탕!
시커먼 물체를 향해 탄환을 날렸다.
그것은 이내 옆으로 미끄러지듯 선회하더니 이내 어둠 속에 묻혀 사라졌다.
“뭐야?!”
사다리를 오르던 만석이가 벙찐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뮤테이션!”
“없잖아?”
그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갑자기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내려보았다.
“설마, 저 판사 살리려고? 응? 저 판사가 죽는 게 보기 싫어서 거짓말 한 거지?”
“······.”
깡패는 깡패인 모양이다.
모든 걸 자의적으로, 지랄맞게 해석하는 재주가 있는 걸 보면.
“꺼져.”
그가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맘 변하기 전에. 지금 가면 살려는 드릴게.”
“형님. 아닙니다. 진짜 시커먼 거 하나가 있었어요!”
나와 함께 작업했던 깡패가 말했다.
“넌 조용히 해! 새끼야!”
그 순간 우리는 보았다.
벌거벗은 판사를 부각하기 위해 아래에 늘여놓은 LED 조명이 미치는 희미한 커튼 같은 끝자락에 시커멓고 거대한 존재가 침범한 사실을.
“이런.”
뮤테이션, 훗이다.
놈이 내 경계사격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우리 인간들을 덮치려고 나타난 것이다.
그 괴물이 덮치려고 한 건 판사가 아닌 만석이었다.
가장 시끄럽게 떠드니까 먹이로 판단하고 사람을 콜라캔처럼 찌그러뜨리는 발톱을 앞세운 것이다.
탕!
한 발의 탄환이 허공을 갈랐다.
논스톱 사격.
학교에서 익히고 실전에서 수백 번은 더했던 생존 기술이다.
그 탄환은 만석이를 덮치려는 뮤테이션의 몸통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끼이이익!”
푸드득!
통했다.
놈이 날갯짓을 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만석이 놀란 눈으로 날 보았다.
“빨리 아래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제멋대로인 깡패도 목숨이 달리니 그제야 말을 듣는다.
“고, 고맙습니다!”
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둠을 주시하며 답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놀라운 사격이었습니다.”
만석이가 쭈뼛거리며 가시 말뚝을 박은 개인호로 들어갔다.
“진짜 헌터 다운 사격이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둔탁한 뭔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이익!!!”
뮤테이션의 소리다.
“허억!”
뒤이어 사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가시 말뚝을 잔뜩 박아 넣은 컨테이너 위에 소름 끼치도록 거대한 부엉이가 발톱으로 자신의 몸을 찌를 뻔했던 가시 말뚝을 쥐고 있었다.
비장의 함정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이름 모를 나름 성실한 깡패를 살렸고, 거기다가.
타타타타타탕!
탄창 하나 분의 탄환이 시커먼 몸뚱이에 고스란히 박을 정도의 시간을 벌었다.
아무리 뮤테이션이라고 해도 총알 30발쯤 몸에 박히면 반응이 온다.
“끼이이이이······.”
놈이 고개를 거의 180도 뒤로 돌려 섬뜩한 큰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더니 비칠거리며 컨테이너 아래로 추락했다.
“죽였다!”
“죽였어!”
깡패들이 신이나 저마다 가시 말뚝 진지에서 뛰쳐 나와 바깥쪽에 떨어진 뮤테이션을 구경하러 몰려갔다.
컨테이너 안에 숨죽이고 있던 여자들도 컨테이너로 나와 깡패들의 뒤를 따랐다.
호기심은 아무리 궁벽한 상황이라도 못 참는 모양이다.
“드디어! 죽였다! 이 부엉이 새끼!”
“진짜 헌터가 오니 쭉도 못 쓰네.”
“형님! 부엉이 죽었습니다! 꿈쩍도 안 해요!”
가게 떠나갈 것 같은 환호 속에서 만석이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깐 미안했어요.”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는 저 위에, 여전히 홀로 모든 불빛을 받으며 매달려 있는 판사 쪽을 보았다.
“그냥 편하게 보내주면 안 될까요?”
오지랍인 건 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더라도 복수를 갚는다고 하더라도 너무 가혹한 건 아닌 것 같다.
“원한 있는 건 알겠는데. 죽으면 다 끝 아니겠습니까?”
“저 새끼요?”
만석이가 코웃음을 쳤다.
“하나도 안 변했어요. 저 새끼는. 저 모양 저 꼴이 되고도 자기가 남들과는 다른 줄 알아요. 뼛속까지 선민의식에 물든 새낀데.”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그건 댁이 저 인간을 잘 모르니 하는 소리겠지.”
만석이가 판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아쉽긴 하네요.”
툴툴거리긴 하지만 만석이는 내 요청을 받아준 모양이다.
판사에게 깨끗한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 총을 겨눈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방아쇠에 넣은 손가락엔 주저함이 엿보였다.
“저 새끼가 뒤집어쓴 고고한 가면 뒤에 가려진 추악한 민낯을 보고 싶었는데······.”
그가 자조했다.
“좆같은 새끼.”
그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권총을 판사에게 조준했다.
쿵!
느닷없이 컨테이너 너머에서 굉음이 들렸다.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다.
뒤이어 뼈가 끊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으아아아악!!!”
“부, 부엉이!”
“하나가 더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고 시커먼 물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LED 조명이 희미하게 밝히는 미명 속에 활짝 펼친 날개는 그것의 정체를 오롯이 드러냈다.
“······.”
한 가지 가능성을 간과했다.
부엉이는 짝을 짓는다는 걸.
녀석이 아래로 하강해 또 한 번의 굉음을 냈다.
“아아아아악!”
“용기가 죽었어! 용기가 당했다고!”
“꺄아아아아악!!!”
“도망 쳐! 아아아악!!!”
만석이와 함께 총을 겨눴지만 놈은 다시 날아오르지 않았다.
날아오르지 않고 두 다리만으로 인간에게 다가가 발톱과 부리로 자신의 짝을 해친 인간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한 것이다.
컨테이너 너머에선 바야흐로 끔찍한 교향곡의 향연이 펼쳐졌다.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 발톱과 부리로 살점을 찢고 뼈를 부러뜨리는 소리, 공포에 질린 인간의 비명과 죽어가는 자가 흘리는 마지막 한숨 소리가 저 강철 너머에서 들려온다.
만석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바닥에 있는 블레이더를 주워 내게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손짓했다.
안전한 곳에 숨으라고.
그 직후 컨테이너 너머로 시커먼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나의 조준과 격발.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실전에서도 유용했던 몇 안 되는 가르침이다.
총은 내가 가장 많이 쓰고 다뤘던 무기다.
나머지 헌터 장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칼날으로 이루어진 산탄총만큼은 그 궤적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방아쇠를 당기는 수밖에.
컨테이너를 넘어 우리를 덮치려던 놈을 향해 18개의 티타늄 칼날이 폭사됐다.
그 무수한 칼날은 놈의 깃과 날개와 몸통, 커다란 눈과 부리마저 절단 내며 녀석을 일격에 도륙냈다.
하지만 녀석에게 닿지 않은 칼날이 판사가 묶인 기둥 아래를 잘라버렸고 또 하나의 눈먼 칼날이 컨테이너 하나를 찢고 들어가 맞은편 모서리를 맞고 튕겨나 파편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파편 하나가 만석이의 측두부를 강타했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만석이가 쓰러졌고 그 위로 판사가 묶인 장대가 엎어졌다.
*
“그 가게 괜찮았는데. 나도 살 게 하나 있었는데.”
디펜더가 그답지 않게 상점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가게의 최후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 판사.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그 깡패에게 개처럼 끌려다닐까?”
글쎄다.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결국 그 판사는 그 깡패에게 끌려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
만석이는 쓰러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판사는 기적적으로 장대 끝이 맞은편 컨테이너 끝에 걸려 목숨을 건진 것도 모자라 충격의 반작용으로 결박까지 풀렸다.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판사는 자유를 얻었고 만석이는 장대에 깔린 채 – 아마 두 다리가 부러졌으리라 – 움직이지 못했다.
거기까지는 완벽한 판사의 승리였다.
초인적인 인내라는 미덕으로 변덕쟁이 신의 인정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하지만 상황은 다시 한번 반전됐다.
판사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줍더니 움직이지 못하는 만석이에게 다가갔다.
그 얼굴은 오싹하리만치 만석이를 닮아 있었다.
틀림없다.
만석이가 보고 싶다던 그 얼굴이다.
고고한 가면 뒤에 숨겨 두었던 증오와 복수에 물든 그 민낯이다.
만석이는 살짝 눈을 크게 뜨고 그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그가 내게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끼.어.들.지.마.”
그 얼굴은 판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증오라는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
만석이가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드디어 판결을 내려주시려고?”
판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사형!”
만석이도 웃었다.
오히려 판사보다 더 호쾌하고 후련하게.
총성이 그 웃음을 지워버렸을 때 나는 누가 누구에게 판결을 내렸는지 한동안 구분하지 못했다.
죽인 자와 죽은 자의 얼굴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