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05화 (105/183)

57. 판결 (1)

판사라는 집단을 마주한 건 다중 채무자 시절이었다.

기억나는 건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옷을 입고 높은 단상에 앉았고 그들이 들어오면 일어서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직 근거 없는 오기를 지닌 남은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사람도 항소심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결과에 의하면 판사가 입장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판사에 대한 경의가 아닌, 대한민국 사법 자체에 대한 경의와 존중의 뜻을 표하는 행위라고들 한다.

잘 모르겠다.

대부분은 남들이 하니까, 판사의 눈 밖에 나면 불이익을 당할까 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자기를 보면 지레 일어서는 모습을 높은 연단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한 명이라도 억울한 이가 없게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할까, 아니면 법원 앞에 으레 서 있는 여신의 저울을 떠올리며 그 저울에 자신을 대입시킬까.

그것도 아니면 별 대단한 사명감이나 생각 없이 자리에서 안 일어난 놈의 사건번호를 떠올릴까.

아무튼, 힘든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단순히 업무량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무언가를 판단하는 건 언제나 무거운 일이니까.

그래서 그토록 엄격하게 선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건 남들보다 많은 책임을 요구받기 마련이니.

전쟁 이후 법복을 입은 판사라는 집단은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상대할 일도 없고 소식을 들을 일도 없어서다.

우연한 기회가 나를 예전에 서 있던 법정으로 돌려놓았다.

*

2차 피난민은 1차 피난민과는 전혀 다른 족속이다.

무작정 바깥에 나가면 생존의 기회가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던 1차 피난민과 달리 2차 피난민은 냉정하게 바깥은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고,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와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치지지직--

“총알 삽니다~ 기름이랑 교환합니다. 넉넉하게 쳐 드릴게요. 기름 좋아요. 롯트 번호 4로 시작합니다.”

최근 K-워키토키가 부쩍 자주 메시지를 토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차 피난민 전부가 우리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유저를 찾아내 죽이려는 살인마는 아니다.

우리가 한 줌인 것처럼 우리를 죽이려는 자들도 한 줌이다.

대부분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뭐,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방공호를 방공하면 기꺼이 우리를 털어먹겠지만 말이다.

피난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서 그런지 순수한 피난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장사의 민족 아니랄까봐, 일부는 피난민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했다.

“아, 여자도 있습니다. 적적하신 형님들 속는 셈 치고 와서 회포라도 한 번씩 풀고 가세요. 개포 만석이 아시는 분은 특별히 할인해 드립니다~.”

최근 내 영역에서 주파수가 닿는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한 정체불명의 상인도 그중 하나다.

주력 상품은 합성유지만 타이어 땜질도 하고 간단한 수리는 물론이고 매춘까지 알선하는, 그러니까 대기업이다.

그 규모와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전파가 닿긴 하지만 내 영역에서 관측할 수 없는 지점에 있으니.

K-워키토키는 공용 주파수 수신 범위를 제한하는 기능이 있는데 나는 최대 수신 전파를 15km 이내로 조정했다.

멀어도 15km 안팎에 있다는 이야기다.

“아? 요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놈? 봤어.”

최근 목소리에 생기가 다시 도는 디펜더는 마당발답게 문제의 상인을 직접 본 모양이다.

“옛 고속도로 휴게실 자리에 있어. 제법 큰 놈들이야. 버스 4대에 화물차 한 대. 승용차는 안 세 봤어. 하는 짓거리 보니 갱단이 아닐까 싶은데.”

도시에 갱단이 암약하고 있다는 건 새삼스럽게 지적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이른바 밤의 제왕으로 군림하려는 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모기나 파리처럼 끝없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이번에 시끄럽게 떠드는 상인도 갱단이 멸망해가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그런 부류와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5.56mm 기준 30발 들이 탄창 하나당 드럼통 하나 분 드립니다~.”

조건이 너무 좋다.

탄약이 대단히 귀중한 자원인 건 맞지만 내 방공호 안엔 탄약이 썩어 넘쳐난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 내가 제일 먼저 탄약고를 꿀꺽 했기 때문이다.

반면 내게 부족한 건 기름이다.

특히 합성유는 최근 내가 주목하는 새로운 생명줄이다.

유통기한은 진즉에 지나갔고 남은 수명조차 간당간당한 오래된 경유를 대체해 나의 크고 아름다운 발전기 - 스켈턴 하트 - 를 가동할 새로운 혈액으로서 말이다.

거래의 순수한 형태가 남아도는, 잉여 자원의 교환에서 시작됐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거래다.

당장 올겨울이야 있는 기름과 나무로 버티겠지만, 그 이후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라면 기름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나를 망설이게 할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거래인 건 확실하다.

“······흠.”

솔직하게 디펜더 녀석, 요즘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랄까.

서로의 다름을 확인했다고 해야 하나.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 명백한 차이를 직접 보고 느끼는 건 이해가 아닌 감정의 문제다.

아무리 침입자라고 해도 무력한 일가족을 돼지 잡듯 도살하고 자랑삼아 올려 인터넷 복귀의 수단으로 쓴다는 게,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뭐, 나도 내 영역이 침범당했다면 기꺼이 죽였겠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냐.

손 내밀 게 디펜더밖에 없는데.

“뭐? 걔들이랑 거래하겠다고?”

디펜더는 1초 정도 고민한 후 시원스레 대답했다.

“좋아. 같이 가줄게.”

“······.”

이 세상에 100% 완벽한 놈이 어디 있냐.

그런 친구가 있다면 상상 속에서나 있겠지.

나의 신뢰하는 친구, 디펜더와 약속을 잡고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올 때마다 뭔가를 주워 뚝딱 만드는 디펜더는 이번에는 전기 스쿠터를 끌고 왔다.

기성품이라기보다는 조잡한 제작품으로 보이는 프레임이라든지, 밖으로 나와 대충 묶은 전선을 보니 직접 주워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오. 그거 새로 만든 거냐?”

“응. 네 오토바이 보다 보니 좋아 보여서. 가진 거 뚝딱 해서 하나 만들어봤지.”

하늘을 보았다.

먼 하늘에 드론 한 대가 떠 있다.

내 시선이 닿자 드론은 마치 벌처럼 허공에서 8자로 비행했다.

“요즘은 필수지.”

디펜더가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함께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지.”

휴게소로 가면서 최근 근황에 관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람을 죽이면 또 그놈의 인증을 할 테니.

내가 말을 안 하니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렇지만 디펜더도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니.

필요한 주제가 있을 때는 곧잘 떠드는데 알아서 분위기를 만드는 타입은 아니다.

“스켈톤. 그거 들었어?”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을 깬 건 디펜더 동생이었다.

“뭐?”

거리가 거리인지라 그녀의 목소리엔 잡음이 많이 섞였고 알아듣기 모호했다.

아마 좀 더 가면 전파가 끊기겠지.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네임드 뮤테이션 하나가 나타났나봐.”

“네임드 뮤테이션?”

“몰라? 칠흉물, 다섯 불가사의, 삼신수······ 또 뭐더라. 아무튼. 만화에 나올 법한 애들.”

“아. 그거.”

헌터 거리에 갔을 때 들은 적이 있지.

내가 내 방공호로 돌아온 결정적인 원인이다.

거기에 계속 죽치고 있었으면 갑옷 입은 원숭이보다 더 한 놈들을 상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

“삼신수 중 하나가······ 치지직······ 나타······.”

처음부터 불안하던 디펜더 동생의 목소리가 도중에서 끊겼다.

잠시 고민했다.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후진할 지.

머리 위에 떠 있던 드론이 내려오려는 걸 디펜더가 손짓으로 제지한 후 자신이 직접 나머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강원도서 활동하던 골칫덩어리 하나가 최근 인천 아래까지 나타났다고 하더라고.”

“뭐 때문이지?”

“먹이가 많아져서.”

“흐음. 어떤 놈인데? 고양이? 개?”

“아니, 수리부엉이.”

종을 듣는 것만으로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응. 하필이면.”

시커먼 야밤에 소리도 없이 날아 사람을 낚아채는 괴물이라.

그것도 인간만큼이나 영악한 놈이.

신수라 불릴 만 하다.

말만 들어도 손을 쓸 방법이 안 보이니까.

“훗(hoot)이라고 불리는 놈인데 군단파 쪽에서도 애를 먹인 놈이야. 소리도 없이 오는데 덮치는 순간 즉사거든. 아니면 반병신이 되거나. 군단파 소속 헌터들이 몇 번이나 가서 잡으려고 했는데 못 잡았지.”

“그거 흥미로운 소식인데. 어디서 본 거냐? 나도 시간나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아? 그거. 인터넷에서 본 게 아니라 들은 거야.”

“들은 거?”

“나도 동기 있잖아. 가끔 연락하는 애들 있거든.”

“아.”

더는 묻지 않았다.

피차 불편한 이야기다.

디펜더에게 군단파 연줄이 있다는 건.

그래도 가만히 입 닫고 있는 것보다 주제를 돌리는 게 나은 선택이겠지.

“······그런 놈이 나타나면 여기도 좀 위험해지겠네.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니야?”

“야간엔 출입을 자제하고 있어.”

나도 야간 행동은 당분간은 자제해야겠다.

뮤테이션이 몬스터 하위호환처럼 보이지만 그 정도 되면 총알만 못 튕겨낸다뿐이지 몬스터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무시무시한 놈이니까.

그래도 그 뮤테이션 덕분에 자칫 어색할 수 있었던 여행길이 짧아졌다.

멀리 옛 휴게소 터가 보인다.

거기엔 네 개의 트레일러로 벽을 쌓은, 멸망기의 상점이 초라하지만 나름의 구색을 갖춘 채 영업하고 있었다.

“······아까 거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휴게소가 보이는 바위 아래서 엄폐한 채 무전기로 교신을 시도했다.

“잠깐 들러서 확인 좀 해보고 싶은데.”

거래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기다.

특히 상대방은 도시에 있던 갱단.

조심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오, 손님이신가?”

K-워키토키 너머에서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옵쇼! 개포동 만석이임다!!!!”

*

“아, 무전기 켜 놓은 채 와도 돼요. 걍 우리가 뻘 짓하면 바로 찔러. 최대 출력으로 보내면 반경 20km 안에 있는 애들은 전부 다 들을 거 아냐? 그럼 우리 장사 못하는 거지.”

개포동 만석이라는 자의 첫인상.

평범한 아저씨다.

중키에 크게 도드라지지 않은 인상에 적절하게 세월의 고뇌가 묻은.

옷도 헐렁한 검은 양복바지에 예전엔 하얀색이었을 와이셔츠를 반소매로 걷은 스타일이다.

사실 깡패라는 게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들 떡대에 온몸을 문신 도화지로 쓰고 그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깡패라는 건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문신을 새길 각오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개포동 만석이의 평범한 모습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컨테이너 박스로 성벽처럼 두른 상점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인간이 뼛속까지 악마라는 걸 가볍게 알 수 있었으니까.

컨테이너 안에 여자들이 있다.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한.

갖가지 물건을 늘어놓은 가판대 옆엔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수 있는 문신 깡패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가장 눈길을 잡아 끄는 건 “만석 상점”이라는 조잡한 간판을 들고 서 있는 사슬로 묶인 초로의 남성이었다.

“······.”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앙상한 몸엔 갖가지 학대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엔 마치 개처럼 사슬이 묶여 있었다.

얼핏 본 것만으로 나는 이 사내가 오랫동안 저 만석이라는 깡패에게 영혼마저 깎여나갈 정도의 학대를 받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간판 똑바로 들고 서 있으라고!”

아니나 다를까, 만석이는 책상으로 가면서 알몸의 사내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단지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 그 사내는 덜덜 떨었다.

그런 그가 나에겐 하회탈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탄환을 파신다고요?”

“네. 반 상자 정도?”

“탄통 반 개 분량이면 800발 정도겠네요?”

“네.”

“와. 많이도 가지고 계시네. 요즘 시국에”

만석이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힐끔 나를 쳐다봤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피난민입니다만.”

“800발이면, 드럼통이 몇 개야. 갖고 돌아가시려면 꽤 무거울 텐데.”

“트럭 끌고 오려고요.”

“아, 그렇군요.”

“물건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상점 안에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거래 자체는 원만했다.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만석이라는 깡패는 엄한 짓이 아니라, 진짜 장사를 위해 이 상점을 차렸다는 게.

“일단 우리가 보유한 건 이 정도고요. 내일 정도 오세요. 부족한 분 채워 넣을게요. 아, 합성유는 창원에서 가지고 온 거니까 믿으셔도 좋습니다. 품질 안 좋으면 밤에 오셔서 불 지르셔도 됩니다.”

뭐, 지켜볼 일이지.

이 깡패들이 진짜 거래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나저나 사장님~ 여자 안 필요하세요?”

떠나가려는 날 향해 만석이가 은근히 웃으며 여성들이 있는 컨테이너 쪽을 가리켰다.

“싸게 해 드릴게. 성병은 보장 못하지만.”

“아니, 괜찮아요.”

“왜요? 애들이 별로라서? 아니면 우리를 못 믿어서?”

“아니오. 그런 거 안 해요.”

“아, 개포동 만석이가 누군지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 이 장사한 지 꽤 오래됐어요. 거의 전쟁 직후부터 했으니, 믿음으로 먹고 산 사람이지.”

그는 한사코 내게 매춘을 제안했다.

여성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 현실을 보고 싶지도 않아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간판을 든 알몸의 사내를 떠올리며 만석이에게 물었다.

“그 간판 들고 서 있던 사람은 뭡니까? 직원입니까?”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농담을 섞어서.

만석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가 평범해 보이는, 그러나 셀 수 없는 악의로 꿈틀거리는 눈을 번들거리며 내게 말했다.

“판삽니다.”

“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였으니.

“판사요. 전쟁 전에 높은 단상 위에 올라 거들먹거리던 새끼들 있잖아요.”

숨길 수 없는 증오를 드러내며 만석이가 조소했다.

“나는 남들과 달라~ 구름 위에 있어~ 반성문 좋아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의 증오가 판사라는 집단 자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저 판사 개인을 향한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그 증오 어린 표정엔 하나의 대상에 향하기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음울한 깊이가 느껴졌으니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