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20시간 30분 (2)
dongtanmom : 31번 부두 창고 뒤에 산다.
mmmmmmmmm : 내일 11시경 7번 부두 앞에서 보자. 피난선단 출입 게이트 있는 쪽에서. 뭐, 긴말은 필요 없고 남자의 대화를 좀 하려고 하는데. 자신 있냐?
dongtanmom : ㅇㅇ 와라.
설마 이거, 현피 각인가.
느낌이 안 좋다.
특히 저 냠냠거리는 백승현이 냠냠을 뺀 거 보니 뭐랄까, 귀기가 흐른다.
m9가 내 말을 절대 안 듣는 인간이란 건 잘 알고 있지만 이제는 진짜 개입할 때가 왔다.
SKELTON : 어이 엠구. 너 무슨 생각으로 동탄맘 같은 미친 놈하고 현피 할 생각 하는 거냐? 그런 인간 쓰레기는 상종하지 않는 게 답이야.
SKELTON : 소문에 의하면, 동탄맘 그 새끼 인터넷과 달리 무시무시한 남자고 전직 헌터라는 이야기도 있어. 프로 살인자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두 개나 보냈다.
그러나 m9는 아무 반응이 없다.
설마 그새 또 차단을 한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m9, 이 자식 진심이다.
진심으로 백승현과 현피를 뜰 작정이다.
mmmmmmmmm : 신비의 살인 무술 “마가크라브”란 무엇인가?
mmmmmmmmm : (12라운드 복서) 복싱 쉰 지도 꽤 오래 됐네···.
mmmmmmmmm : 오전 11시. 내가 가장 잔인해지는 시간.
마가크라브는 개뿔, 마가 낀 거 같은데.
그런데 m9녀석 운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모레 11시라니.
모레는 내가 2대 드래곤씨를 데리고 인천으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출발해 아침까지는 도착할 예정이니 11시에는 내가 인천에 있다.
우리 게시판이 배출한 최대의 기인이 동탄맘 같은 악성 유저에게 잃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만난 필크럼88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그 방공호의 옛 주인인 드래곤씨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술보다는 걱정으로 보였다.
“여기, 살기 어렵나요?”
이에 필크럼88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자조적으로 답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는 법이죠.”
중국군이 문제란다.
대체 뭘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밤이면 밤마다 해안가에 등불을 밝히고 이상한 신호음을 송출한다고.
가끔은 모스 부호처럼 등불을 깜빡깜빡 거린 적도 있다고.
“잠수함 같은 것도 있었어요.”
필크럼의 아내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그녀의 표정도 말이 아니었다.
아마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서 보낸 모양이다.
나라도 그럴 거 같다.
약탈자보다 수천 배나 위험한 중국군이 바로 옆에서 작당질을 하는 걸 매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남아나지 않겠지.
“뭐, 고생도 오늘까지네요.”
오래 이야기 할 사이도 아닌지라 바로 이삿짐을 실었다.
이사라고 하지만 딱히 짐은 없다.
멸망기답게 옷가지와 생필품이 전부.
그런데 필크럼88은 특별한 화물을 하나 더 실으려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위성 장비다.
“이거 들고 가려고요?”
“네. 제주도에 들고 가려고요.”
“정부에서 허락해 준답니까?”
“네. 문의하니 들고 와도 된다고 하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굳이 그 무거운 걸 들고 가려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제주도에서는 인터넷 깔린 집 제공한다는 거 같던데.”
나의 질문에 필크럼88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양심이 있어서 드래곤형님 명의로 글은 못 쓰지만 눈팅은 다 하고 있었거든요. 페일넷도 당연히 하고요. 무슨 소문 돌고 있는지 다 알죠. 제주도 선단이 중국에서 발견됐다면서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생존 확인용으로?”
“네. 만약 제가 안전하게 제주도에 간다면 게시판에 글을 올릴게요. 하지만 아무 연락이 없으면 음. 끔찍한 가정이지만 중국이나 아니면 용궁에 갔다고 생각해주세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있는 행동이다.
설령 제주도행이 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험으로 가득 찬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필크럼88은 제주행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안색이나 가족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 말이다.
당장 중국보다 중국놈들이 더 가까이 있는데 중국행이 대수겠냐만은.
“뭐, 그렇게 하시죠.”
“저기 죄송한데.”
“네.”
“혹시 제가 돌아가면 원래 닉네임으로 글을 써도 될까요?”
“제주도 가시면 제 눈치 안 봐도 될 거 같은데.”
“아니오.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필크럼이 초췌한 가운데서도 오롯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
그의 눈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뉘우치는 동물이구나 하는.
한마디 말로 담기 어려운 감정이 그의 젖은 눈에 담겨 있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필크럼이 고개를 숙였다.
“제주도로 가면······. 제 명의로 저의 어리석은 행동과 드래곤씨 형님의 마지막 이야기도 렘넌트의 외전격으로 내보려 합니다.”
“······.”
달리 할 말은 없다.
이건 드래곤씨와 필크럼88 두 사내의 이야기니까.
그 중간에 내가 더 이상 간섭할 자격은 없으리라.
저마다의 우여곡절과 사연을 안고 트럭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은 방공호를 뒤로 하고 인천을 향해 나아갔다.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웃고 있는 필크럼88 가족 너머로 멀어지는, 묘지 같은 방공호를 보며 나는 조용히 한 사내를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기렸다.
부디 영면하길.
게시판의 벗이여.
*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신 것도 모자라 이런 위험한 시기에 데려다주신걸.”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부둣가.
우리는 성공적인 여정을 끝냈고 필크럼 가족과 작별했다.
저 위로 거대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유조선이 보인다.
피난민을 싣고 갈 선단의 기함이란다.
공교롭게도 그 선박은 m9의 스위트 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희망호.
그것이 저 큰 배의 이름이다.
“저 배에 타나요?”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배에 타는 모양입니다.”
“살펴가세요.”
“네. 스켈톤님도 부디 오래오래 사시길. 제가 드래곤형님의 작품을 완성하는 그날까지는 사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인연이 정리된다.
그가 죽음의 땅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제주라는 낙원에 갈 것인지 그건 지켜볼 문제겠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30분.
다행이다.
아직 현피 전이다.
천천히 연구소 뒤편의 헌터 거리로 향했다.
“······.”
다시 봐도 을씨년스럽고 비참한 풍경.
곳곳에서 생활감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게 안 그래도 비참한 곳을 더욱 적나라하게 강조하는 느낌이다.
거리 앞에 못 보던 노인이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레이저를 쏠 것 같은 눈빛을 가진, 보기만 해도 깐깐해보이는 관상이다.
그가 날 빤히 쳐다봤지만 모르는 얼굴이고 엮이고 싶지도 않은지라 무시하고 익숙해지기 싫은 거리를 따라 기억에 남은 집을 찾았다.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승현씨 있습니까?”
어린 아내가 아기를 안고 꿉꿉한 악취가 날 것 같은 좁은 집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소시지?”
“?”
“소시지 갖고 오신 분!”
“네. 맞아요. 백승현씨 계신가요?”
“잠깐만요.”
그녀가 휴대폰으로 무언가 두드렸다.
내 영역에서 휴대폰은 휴대용 카메라, 랜턴, 메모장 정도 기능밖에 안 되지만 인천 권역에선 휴대폰이 잘 터진다고 한다.
나라에서 제공하는 몇 안 되는 복지다.
“어. 전에 소시지. 그 사람 왔어.”
이 여자는 왜 자꾸 나를 소시지라 부르지?
이 스켈톤이 먹을 건가.
구워도 별로 맛 없을 거 같은데.
그나저나 주변을 보니 아는 얼굴들도 있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다.
그중 한 녀석이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방재혁이라고 했었나.
S급에 준한다는 실력을 가진 친구.
“여긴 무슨 일이야?”
그가 나에게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뭐, 볼 사람이 있어서.”
“누구? 설마 백가?”
“어떻게 알았지?”
“백가랑 친한 거 같더라고. 유유상종인가?”
“그건 아닌 거 같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 법이다.
멀리 백승현이 다가오고 있다.
어디서 구했는지 여름 느낌 물씬 나는 원색 반팔 남방에 선글라스를 이마에 턱 걸친 채.
방재혁은 백승현이 나타나자 어슬렁거리며 내 주변을 떠났다.
“여긴 무슨 일이신가? 박 후배님.”
이 인간, 그야말로 살판이 났다.
아주 웃음꽃이 피었다.
“설마, 나 배웅하러 온 거야? 하, 이거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작별 선물 준비할 걸 그랬네! 박 후배 안 올 줄 알고 가진 거 다 주변 사람 이미 나눠줬는데.”
“괜찮아요.”
“아니, 내가 마음이 안 편해서.”
“그보다 이야기 좀 합시다.”
그를 부두 쪽으로 불러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본론을 꺼냈다.
“비바! 아포칼립스! 하시죠?”
“아. 박 후배가 줬잖아. 마침 잘됐네. 그거 때문에 고민이 하나 있거든.”
백승현의 눈초리에 비릿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역시.
이 자식, 떠나가는 날에 기어코 m9에게 해코지를 할 셈이었나.
노파심이 아닌가 회의를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는데 잘 온 거 같다.
m9가 고마워할 일은 없겠지만 그는 우리 게시판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마스코트적 존재.
그 친구를 이런 불쾌한 유저 손에 죽게 할 순 없지.
백승현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백선배. mmmmmmmmm이라는 친구랑 오늘 현피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건 일종의 경고다.
그가 m9를 해칠 생각을 품는다면, 나로서도 그에게 교훈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거니와.
그런데.
“음?”
백승현의 반응이 이상하다.
“뭔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고민하고 있다는 거, 그 문제 아닙니까?”
일이 틀어졌다는 걸 느꼈지만 기호지세라고, 다시 한번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백승현은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내가 무엇 하러 그딴 놈을 만나. 가만 놔둬도 집 무너져서 뒤질 놈을······.”
오늘 백승현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진솔한 얼굴을 하고 있다.
“······.”
흔한 오지랖이었나보다.
하긴, 우리 헌터들은 허투루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거의 모든 행동엔 목적이 있다.
심지어 백승현의 “냠냠”에도 목적이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하려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새끼, 아니 그 친구랑 만나기로 했었지. 그런데 박 후배는 어떻게 그걸 아는 거지?”
“아는 인맥 중에 그거 하는 사람이 있어서 현피를 꼭 막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m9의 지인이라고.”
“안 해요. 안 해. 그런 거. 현피라고 하나?”
“안 하신다고요?”
“당연하지! 자랑은 아니지만 예전에 하던 게임에서 현피 요청 여러 번 받았는데 한 번도 나가본 적 없어.”
백승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 새끼들이 나보고 겁쟁이라고 하던데, 뭐 지들이 어쩔건데? 욕하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게 더 있어?”
“······흠.”
이 새끼 이거.
뼛속까지 썩은 놈이네.
“아무튼, 내 부탁은 별 게 아니고, 그 위성 장비 말이야. 그걸 배 안에 반입하고 싶은데.”
“안 되나요?”
“그게 안 된다고 하더라고. 뭐 보안이니 뭐니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면서. 그런데 박 후배. 우민희하고 친분 있잖아?”
“······.”
진짜 끝까지 사람 귀찮게 하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다.
헌터 거리 입구 쪽에 서 있던 까무잡잡한 노인.
아까부터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백승현이 힐끗 눈짓했다.
“아, 저 영감탱이?”
“누구죠? 헌터 가족 입니까?”
“아니, 갑자기 나타난 영감이야. 개척단이 없어지니 또 슬그머니 노인들이 기어 나온 거지. 진짜 음식만 축내고 도움은 안 되고 어휴. 내가 제주도만 안 갔어도······.”
“늙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아니, 저 영감쟁이. 불길한 소리 자꾸 하잖아. 저 배에 타면 다 죽는다고. m9? 그 새끼는 웃기기라도 하지 저 영감쟁이는 그냥 짜증만 나.”
말을 하면서 화를 내는 타입이 있다.
백승현은 그런 타입으로 보인다.
노인 이야기를 하면서 백승현은 점점 선명해지는 살기를 드러냈다.
“······몇 번이고 바다에 밀어버리려고 싶었는데. 우리 애를 생각해서 참았다고.”
아마 그 노인이 심기를 긁은 모양이다.
아무튼, 이 흉흉한 살기를 보니 역시 현피 장소까지 가봐야겠다.
이 개자식이 또 언제 마음을 바꿔 m9를 그가 죽였던 사람처럼 내몰지 모르니까.
“그거 알아?”
약속 장소.
백승현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제주도까지 가는데 20시간 30분이 걸린다는 거.”
“오래 걸리네요.”
시계를 보며 답했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55분.
“배가 예전만 하지 않으니.”
백승현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우리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선박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박 후배 덕분에 갈 수 있었던 거지.”
“······시간이네요.”
이제 약속 시간이다.
m9와 동탄맘.
게시판 두 흉물이 운명의 만남을 가지게 되는.
“씨발. 내가 바람을 맞는 날도 생기네.”
백승현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꽁초만 남은 담배를 비로소 바닥에 떨구고 발로 문질러 껐다.
현재 시간 11시 30분.
12라운드 복서 경력과 신비의 무술 마가크라브를 익혔다는 m9는 자신이 가장 잔인해진다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자 백승현은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니, 나 아무것도 안 했다고!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박 후배.”
“아니. 그게.”
“인터넷 보면 될 거 아냐?!”
과연 백승현의 말 그대로였다.
mmmmmmmmm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의 m9는 수치심도 명예도 뭔지 모른 채 당당하게 게시판에서 똥글을 싸고 있었다.
순간 드는 생각 하나.
m9 이 새끼.
나보다 오래 사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