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98화 (98/183)

53. 기적

찌는 듯한 여름이다.

작년 같으면 에어컨 펑펑 틀어놓고 럭셔리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만 다가올 한파를 위해서라도 기름을 아껴놓을 필요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주 출입구를 토사로 막아놓은지라 환기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요즘 내 생활의 터전은 메인 방공호가 아닌 더미 방공호 안이다.

4번 방공호라고 이름 붙인 녀석인데 내 영역으로 오르는 느슨한 경사로를 내려다보는 구조에 주변에 잡목이 자라 적당한 그늘을 드리우고 무엇보다 바람길이라 개중에 가장 시원한 곳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날이 더워지면 영역 아래 개울에 가서 몸을 담그고 온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집 앞 개천은 여름이 되면 정체불명의 계곡 상인과 행락객들로 붐비곤 했다.

수심도 적당하고 유속도 완만해서 놀기가 좋았다.

다만 수질은 썩 좋다고 할 수 없는지라 돌멩이마다 긴 이끼 비슷한 녀석들이 늘어졌는데 대충 주변에 사람의 싹이 마른 현재엔 수질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해졌고 돌멩이를 들춰보면 가재도 있다.

우산 하나를 파라솔 삼아 펼쳐놓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이 세상이 멸망 도중의 세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다.

하지만 내 옆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실탄이 장전된 소총은 내가 이 평화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겠지.

가끔 총성이 들리기도 하는데 저격수 모녀 쪽은 아니다.

북쪽, 개척자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군단파는 그 이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 끔찍한 노동에 인천까지 가서 개고생한 것에 비하면 허망한 결과지만, 사실 군단파가 안 오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아직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언제 어떻게 그들이 나를 죽이러 올지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결정되는 일이니까.

쪼르르르륵-

최근 내가 시험하는 건 합성유의 가능성이다.

지하 2층의 메인 발전기에 시험하기 앞서, 소형 경유 발전기에 합성유를 넣고 테스트를 하고 있다.

페일넷 등지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합성유의 수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공 기술을 가진 대한민국이니만큼 대단히 뛰어나다고.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 중에 갖가지 추태를 부린 건 사실이지만 전쟁 이후 3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건 확실하다.

합성유도 그중 하나다.

전쟁 발발 후 해상무역이 끊기는 것에 대비해 석탄을 비롯한 각종 대체품을 이용한 합성유 개발을 지시했는데 그 시제품이 전쟁 전에 나왔다는 모양이다.

실제로 몇 차례 테스트를 해본 결과, 질이 그렇게 떨어진다는 생각을 느낀 적은 없다.

다만 이 합성유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은 있다.

품질의 불안정성이다.

각 제품의 질적 차이의 진폭이 커도 너무 크다.

특정 시기에 제조한 건 휘발유 뺨칠 정도로 고성능이지만 또 어떤 시기엔 등유만도 못하다고.

설상가상으로 그 품질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아지는데 후기 생산분일수록 써먹지 못할 쓰레기라는 평가다.

그래도 일부 공장에선 여전히 양질의 합성유를 만들어내는데 특히 남부 지방에 자리 잡은 대단위 산업단지에서 최상급의 합성유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내 발전기가 합성유를 받아들이고, 그 합성유를 구할 수만 있다면 길어진 이 세상의 수명만큼이나 내 방공호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테스트의 이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쪽이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하는 것에 가깝겠지.

위이이이잉--

간이 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경유를 넣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발전기의 수명과 관계된 문제가 아닐까?

일단 발전기가 합성유를 잘 먹는 건 확인했다.

메인 발전기 쪽도 언젠가 한 번 시험해봐야겠지만 합성유의 양도 부족하고 올겨울은 화목 보일러와 비축된 기름으로 날 예정이다.

본격적인 시운전은 아마 내년에 해야 하지 않을까?

밤이 되면 공사를 한다.

배관 공사다.

8번 더미 방공호는 내 더미 방공호 중 메인 방공호와 가장 가까이 있는 녀석인데 거기를 저격수 모녀가 살 공간으로 개조할 계획을 세웠다.

본격적인 공동체의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변기는 중대사다.

그 모녀는 내 변기만 보면 기겁을 하는데 사실 나도 다른 사람이 내 변기 위에 앉는 걸 원치 않는다.

해서, 공사를 시작했다.

다만 화장실을 더미 방공호 안에 설치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기에 가까운 곳에 아예 새로운 시설을 추가하기로 했다.

조건은 기존 배관 시설을 공유하고 공사의 난이도가 높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거리.

가장 큰 고민은 공사의 난이도 보다는 물 문제다.

내 물탱크가 나 혼자만의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분량이기 때문이다.

두 명이 더 오면 기존의 물탱크로는 엄두가 안 날 것이다.

다른 수원지를 찾거나 아니면 개천의 물을 끌어쓰든가 두 가지 방안으로 해결을 보는 수밖에.

뭐, 그건 나중에 하면 되겠지.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무한한 확장과 개변은 전쟁 전부터 내가 생각한 내 방공호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니까.

내 차고에 있는 중장비와 각종 건설자재와 장비는 그를 위한 것.

슬슬 꺼내서 쓸 때가 되기도 했다.

기본 공사를 마치고 이 사실을 레베카 모녀에게 전했다.

“······하수도 공사했다.”

나름의 희소식.

그런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었다.

“스켈톤! 스켈톤!”

레베카가 울먹였다.

레베카만이 아니다.

옆에서 스우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여간해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스우마저 오열하는 걸 보고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다급히 물었다.

“무, 무슨 일이냐?”

그 답은 만에 하나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의 실현이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살아 있어!”

“데이비드? 그게 누구냐?”

“남편.”

*

레베카의 남편이자 스우의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미국에.

사정은 이러했다.

비바! 아포칼립스! 영어 게시판에서 애타게 남편을 찾던 레베카가 우연히 미국 생존자 그룹과 채팅을 시작했고, 그 생존자 그룹에 속한 사람이 레베카의 남편을 알아차리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전했고 그 남편이 오늘 동영상 메시지를 가족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살아 있었어······.”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니, 남편 쪽에서 생각해보면 레베카 모녀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모른다.

언어, 문화, 국가 어느 하나 접점도 없는 땅에서 2년을 넘게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니.

“······축하한다.”

진심을 담아 모녀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뒤에 거기로 갈게!”

“너희들이 온다고?”

“응! 파티해야지! 파티!”

“뭔 놈의 파티야.”

“데이비드가 여기로 오겠대!”

“스켈톤! 쥬시- 한 거 준비해.”

“뭔,”

너무 과할 정도로 들뜬 것 같지만 그들의 기쁨이 내게 전이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내 사람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이 기적이 해피 엔딩으로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중간 과정까지는 행복이란 감정을 남겨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감시했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들판.

핵무기가 떨어져 죽음의 들판이라고 불렸고 실제로 오랫동안 황무지로 남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무색하게 곳곳에 과할 정도의 생명이 꽃피고 있다.

가을이 되면 황금색으로 익어가든 논밭엔 갖가지 색을 가진 들꽃이 피었고 후폭풍에 깡그리 타버렸던 내 영역의 능선엔 어느새 나무들이 자라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며 능선을 푸른색으로 뒤덮으려 한다.

밤이 되면 지평선 쪽에 불빛들이 보인다.

그 불빛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가까워지는 건 내 눈의 착각만은 아니리라.

그런데.

“······.”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골드가 나타났다.

옆에 자신을 꼭 닮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그 옆엔 새끼를 낳은 것으로 보이는 암컷이 골드 옆에 잔뜩 경계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냐?”

새끼들의 크기를 보았다.

무지막지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여움이 느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역시 똥개였네.”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품종견보다 시골 개를 더 좋아한다.

골드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내 앞에서 새끼를 핥으며 새끼들의 재롱을 받아주다 이내 새끼들과 함께 내 영역을 떠났다.

“뭐냐?”

녀석이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놈은 의기양양하게 새끼와 암컷을 데리고 서쪽을 향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떠나갈 뿐이었다.

“······.”

아무래도 골드 녀석, 그냥 자기 새끼 자랑하러 온 모양이다.

개나 인간이나 자식 자랑은 팔불출인 모양.

그래도 녀석이 건강하게 저쪽에서 잘 살고 새끼까지 낳는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적어도 녀석이 건재하다는 건 남서쪽 방면은 안전하다는 소리니까.

거기엔 중국군 잔당과 좀비 그리고 좀비의 구세주가 있다.

좀비는 그렇다 치고 중국군 잔당은 만나고 싶지 않다.

정오 경에 레베카 모녀가 사이 좋게 자전거를 타고 내 영역에 도착했다.

“우리 뮤테이션 봤어.”

레베카가 고글을 벗으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뮤테이션? 어떤 뮤테이션?”

“개.”

“개?”

“응.”

스우가 끼어들었다.

“아기도 있었어. 귀여웠어.”

“그렇군.”

모녀는 그 경험이 대단히 특별했던 것 같은데 내게는 싸늘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것들이 공격 안 했어?”

“아니, 냄새만 킁킁 맡고 그냥 가던데.”

“아.”

절로 코웃음이 났다.

어느샌가 나의 냄새가 저 이국의 가족에게까지 스며든 모양이다.

“이거. 술.”

레베카가 내게 술병을 들이밀었다.

“아니, 술은 됐어.”

“샴페인. 아껴놓은 거야.”

받아들고 보니 진짜 샴페인이다.

뭐랄까, 문화적 차이라고 할까.

샴페인 터뜨리는 문화는 적어도 내 주변엔 없는 문화다.

소주잔이라면 몇 번 부딪치긴 했지만 말이다.

“샴페인은 아껴 둬.”

소소한 파티를 하기 전에 현재 공사 중인 새로운 화장실을 모녀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배관을 연결 중이야.”

“여기? 여기에?”

“응. 어차피 너희들도 이쪽으로 올 거 아니냐?”

레베카와 스우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말?”

모녀가 동시에 물었다.

그 눈빛이 모녀답게 너무나도 흡사해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둘에게 말해주었다.

“데이비드 여기로 온다며? 그때까지 버텨야 할 거 아니야?”

이건 내 나름의 소극적인 합류 제안이다.

이제는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스켈톤!”

스우는 마냥 기뻐했지만 레베카는 비록 칠칠치 못하다고 해도 엄마는 엄마인 모양이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잠시 그녀를 다른 곳으로 불러냈다.

“······너희들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이번 겨울 춥다잖아? 그리고 물자도 다 떨어진다며?”

“그렇긴 해. 하지만······.”

“마냥 안전한 건 아니야.”

레베카를 똑바로 보고 현재진행중인 나의 위기를 말했다.

“······군단파라는 놈들이 여기를 알아. 나름 위장을 하긴 했지만 군단파 일당 중에 의지가 있는 놈이라면 다시 여기를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휘말릴 수도 있어.”

“스켈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뭐?”

“아니, 우리. 둘 다 여잔데······.”

아무래도 너무 먼 곳을 본 모양이다.

레베카 입장에서 가장 걱정되는 놈은 따로 있는데.

바로 이 스켈톤말이다.

실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보았다.

처음 볼 때 한 마리 야수같던 그녀는 이제는 감정과 이해를 가진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을 한 그녀에게 속으로 칭찬의 말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흔한 이야기는 안 하겠어.”

“걱정 돼. 엄청 돼.”

“아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

“······.”

레베카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오래전 부터 구상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줬다.

“구역을 정할 거야.”

“구역?”

“응. 비록 가까이 있지만 내 영역, 네 영역. 확실히 구분해서 거기를 침범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마주칠 일을 확실히 줄이는 거지.”

중국에 있을 때 입증 된 훌륭한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너희들을 공짜로 먹이고 재워줄 생각은 없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저격수 모녀를 받아들이기로 정하면서 그들의 역할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뛰어난 전투 및 관측 자원이다.

24시간 경계는 기본.

엄마가 인터넷 중독자긴 하지만 딸이 그만큼 똘똘하니.

그 모녀에게 내 영역 남쪽 경계를 맡길 것이다.

지금에야 골드가 지키는 땅이지만, 특히 경남 쪽에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오고 있으니.

아직 이사를 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적어도 겨울이 오기 전까진 이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자, 그럼.”

데이비드의 생환과 공동체의 탄생을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가 열었다.

차린 건 대단치 않다.

냉동고에 있던 고기와 텃밭에서 키운 약간의 채소, 그리고 스우가 좋아하는 쥬시- 한 것.

차린 건 별로 없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기쁨이라는 최고의 정찬이 상에 올랐으니 말이다.

“데이비드가 비행기를 타고 오겠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사, 사실 말이 안 되긴 해. 다들 미쳤다고 욕하더라고.”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니 데이비드라는 인간도 레베카 못지않게 머리에 꽃밭을 일군 사람처럼 보였다.

끼리끼리 만난다는 건가.

그 결과물인 스우는 전혀 부모를 닮지 않은 것 같지만.

“스켈톤. 이거 봐.”

스우가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거기엔 내가 미처 찍지 못했던 골드와, 그의 자랑스러운 새끼들의 모습이 단란하게 담겨 있었다.

“······.”

문득 생각해보았다.

혹 내가 결혼이란 걸 한다면 어떤 사람이랑 할까.

내 주변만 보면 끼리끼리 하는 거 같긴 한데, 이 스켈톤과 비슷한 여자가 과연 존재할까?

아마 없지 않을까?

이 박규가 좀 잘났어야지······.

“자, 스켈톤 건배해. 짠!”

레베카의 호들갑으로 샴페인 대신 탄산음료가 담긴 잔을 한국식으로 맞부딪쳤다.

잔을 부딪치고 음료를 들이키면서 구석에 덩그러니 놓은 샴페인 병을 보았다.

이 샴페인.

터뜨릴 수 있을까?

“스켈톤?”

스우가 내 옆에 앉아 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핀다.

“무슨 생각 해?”

“글쎄.”

“안 좋은 생각하지?”

“그렇게 보여?”

“응.”

이제는 이런 아이한테마저 감정을 읽히는 모양이다.

나름의 자조와 더불어 덧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샴페인, 터뜨렸으면 좋겠네.”

*

경남 쪽에서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3일 전부터 페일넷에서 암암리에 떠돌던 이야기였다.

저녁경에 그 실체가 드러났다.

경남 양산 균열 쪽에 대규모 몬스터 분출이 발생했다.

서울 권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다른 지방보다 많은 병력이 있었음에도 유례가 없는 대병력이 들이 닥쳤고 킬존의 절반이 파괴됐다고 한다.

간신히 균열 일대는 사수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익명의 페일넷 유저가 제보한 사진 속엔 이름 모를 산야에 수천 개의 캡슐이 덩그러니 놓인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문득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샴페인 병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진 나쁘지 않다.

덧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없는 것보다 나으니.

그 샴페인 병 위엔 시커먼 시트지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가득 붙어 있다.

원래는 스우와 내 것 두 개만 있었다.

스우의 것은 하나에 머물렀지만 내 것이 계속해서 증식했다.

아이엠지저스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일 것이다.

이 검은색의 연쇄는 좌절 혹은 체념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치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마다 각자의 기적을 염원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은 하나다.

강한민이 균열을 닫고, 그 소식을 듣고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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