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97화 (97/183)

52. 보일러 (2)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아이들을 거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덕 이전에 생존의 문제다.

오랜 친분을 쌓은 저격수 모녀마저 받아들이길 주저하는 내가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받아들이는 건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행적에 대한 반역이겠지.

“정지.”

아이라고 해서 경계를 풀 생각도 없다.

아이를 이용한 약탈자의 방식도 본 적이 있고 이 아이들조차 마냥 과거처럼 순수하게 볼 수 없다.

철컥

총기를 들이대자 아이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서라. 손들고.”

총만 있으면 아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내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의 연령은 초등학생 저학년에서 고학년 사이.

방법만 안다면 방심한 어른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내게 모습을 드러낸 아이들에게 무장은 없었다.

“거기.”

2층으로 향하는 난간을 향해 경고를 담아 말했다.

“숨어 있는 거 다 안다. 10초 준다.”

총구를 겨눔과 동시에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제일 어린 녀석은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눈치지만 덩치가 큰 두 녀석이 눈빛을 교환한다.

탕!

아이들을 향해 경고 사격을 가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쪼그려 앉거나 엎드렸다.

“여덟.”

난간으로 시선을 옮기며 속으로 세던 숫자를 입 밖에 냈다.

“일곱.”

난간 쪽에서 하얀 손수건이 나풀거렸다.

“나올게. 나온다니까.”

어른의 목소리.

그것도 청년보다는 중장년에 가까운 가래 낀 탁함이 묻은 음성이다.

곧 목소리의 주인공이 난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얼굴이 검은 사내가 다리를 절며 난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와라. 손들고.”

그가 천천히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1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다.

그의 뒤엔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오리마냥 작은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이 사내의 자식이 아니라는 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 아이들이지?”

사내가 비릿한 냉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워온 애들이야. 앵벌이지.”

“앵벌이?”

“내가 데리고 나왔어.”

사내가 양팔을 벌렸다.

“내가 그 지옥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

그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그를 장상사라고 불렀다.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강하게 대화를 희망했기에 주택 앞에서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대면했다.

그는 대뜸 내게 제안을 해왔다.

“아이 필요하나?”

“아니.”

“필요하면 골라가. 식량 조금이면 돼.”

“필요 없다니까.”

그가 지나치게 달라붙으려 하기에 부득이하게 권총 총구를 그의 까끌까끌한 수염이 자란 턱끝에 겨눌 수밖에 없었다.

그의 수염 사이에서는 하얗고 작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다.

보자마자 그와 거리를 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용건은 그게 전분가?”

“보일러 필요하지?”

장상사가 히죽 웃었다.

“옆집에 나무 때는 보일러 때려고 하는 거 다 봤어. 그거 들고 갈 거야?”

들고 갈 생각은 있었다.

이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아니. 갖고 갈 생각은 있었지만, 당신들이 있는 지는 몰랐지. 그냥 갈 거야.”

널리고 널린 게 화목 보일러니 다른 데 가서 구하면 그만이다.

뭐 하면 디펜더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우리가 도와줄게. 저 오토바이에 실으면 되는 거지?”

“······.”

“그냥 눈 딱 감고 조금만 줘. 애들 상태 보이지? 이러다간 다 굶어 죽어.”

아이들은 보지 않았다.

의도된 시선 처리다.

쓸데없는 연민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내가 데려다 키울 것도 아닌데.

장상사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식량만 줘. 많이도 필요 없어. 보일러 실어줄게. 전부 우리가 작업할 거야. 애들 보이지? 노는 애들 아니야. 일할 수 있는 애들이야. 얼마나 똘똘한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장상사가 뒤에서 우르르 몰려 퀭한 눈으로 지켜보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뭐해! 얼른 그 보일러 해체할 준비 하라고! 도구 챙기고! 수레 챙겨!”

그는 나에겐 비굴하게 굽신거렸지만 아이들에겐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저기.”

저택 안을 총구로 가리켰다.

“안에 있는 애들은 뭐야?”

나의 지적에 장상사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무슨 이야기 하는 거지?”

“둘 더 있잖아.”

“······당신 감이 좋네?”

철컥

총구를 들이댔다.

여간하면 대화로 풀어나가는 게 내 방식이지만 이 공간, 저 수많은 낯선 아이들과 경박하고 더러운 장상사, 그리고 버려진 단지에 흐르는 알 수 없는 귀기 같은 게 나에게 조바심을 심어줬다.

“누구냐고.”

짜증을 담아 말했다.

장상사가 눈알을 굴렸다.

“그게······.”

“이야기는 끝났다. 집으로 들어가. 애들 데리고.”

“아, 아니! 들어봐. 그러니까. 애들이었어. 애들인데 커버렸지. 머리가 큰 거야. 뭐냐. 그거. 어! 사춘기! 사춘기고 온 거라고. 내 말도 안 들어.”

횡설수설하는 장상사의 모습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장상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장상사가 저 어둠 속에서 날 지켜보는 또 다른 아이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다, 당신이 나오라고 해! 내 말은 안 들어.”

그가 나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건 아마 지켜보는 아이들 앞에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편이겠지.

한숨을 내쉬고 주택의 그늘에서 날 지켜보는 또 다른 아이들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나와라.”

내가 말하자 그늘 속의 아이들이 나타났다.

일남일녀.

십대 중반의 소녀와 소년이다.

특히 소녀 쪽의 키가 컸는데 장상사와 버금갈 정도였다.

“우리 총도 없어요. 그냥 밖에 나오기 싫어서 구경만 한 건대.”

소녀가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딱히 날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한편 소년은 퀭한 눈동자에 은은한 적개심을 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내가 아닌, 장상사쪽이었다.

“아이들 돌려보내.”

장상사에게 말했다.

장상사가 내 말을 듣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이 멋진 아저씨말 들었지? 어서 들어가. 당장! 냉큼!”

작은 아이들은 충실히 명령을 따랐지만 덩치가 큰 아이들, 특히 마지막에 마지못해 나온 청소년들은 짜증을 담아 뭐라고 뇌까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아예 발밑의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찰 정도로 감정을 드러냈다.

장상사가 슬그머니 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에게 가지고 있던 라면사리 하나를 내밀며 넌지시 물었다.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이 기묘한 남자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

“원래는 군인이었지. 전방을 지키던.”

와그작!

장상사가 라면사리를 깨어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전방을 지키던 군인 중 하나라고 한다.

북한군 최후 공세를 경험한 적도 있고 중국이 전쟁이 시작했을 땐 강화도 쪽에서 방위부대에 편성되어 중요 진지를 지키기도 했었다는 모양.

나중엔 전방에 배치되어 몬스터와 뮤테이션을 막았는데 결국 전선이 붕괴하면서 그의 부대가 군벌의 부대가 되었고 그 군벌에 반발하는 중대장을 따라 약탈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적이 아닌 우리 사람을 죽이고 있었지. 순식간이었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지옥도에 있는 거야. 특히 앵벌이라는 건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장상사는 앵벌이라 불리는 미끼용 아이들을 발견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어. 나만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그놈의 나약한 성질 머리가 변덕을 부린 거지.”

장상사가 나를 우러러보았다.

“당신처럼 행동해야 했어.”

“나처럼?”

“아예 아이들 쪽을 쳐다보지도 않더니만. 우리 중대장처럼.”

“······.”

결국은 다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이 사람이 추레하고 행동이 수상쩍고 사람 자체가 못나 보여도 이 사람도 나를 본다.

내 행동을 보고 내 의도를 짐작한다.

실제로 그는 내 마음을 정확히 읽었다.

속을 읽혔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앵벌이 하는 애들을 데리고 간 건가?”

“그렇지.”

“중대장과 전 동료들은?”

“죽었을 거야. 죽었겠지. 막사에 불을 질렀거든.”

장상사의 손과 눈꺼풀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보일러.”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안 그래도 검은 얼굴이 더욱 시커멓게 변해가는 걸 보면 일종의 발작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그 발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심호흡을 한 차례 시원하게 내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보일러, 옮겨도 될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런데 내 모터사이클에 올려질까?”

“수레가 있어. 거기에 연결하면 되지. 별건가.”

“식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조금이라도 돼. 아이들 상태 봤지? 얼마 못 버텨. 막내는 곧 죽을 거 같고.”

그를 100%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와서 의심하는 건 지나칠 정도로 그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 아닐까.

실제로 보일러는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고, 공짜로 옮겨준다면 이쪽에선 더할나위 없는 장사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렇게 해서 장상사와 딜을 했다.

장상사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절었고 수시로 기침을 했고 가끔은 죽은 것처럼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군인답게 작업에 대단히 능했다.

나름 경험 있는 목수인 나조차 어떻게 철거해야 할 지 갈피가 안 잡히는 보일러를 간단하게 떼어내고 해체하고 분해조립까지 하는 묘기를 하며 짐수레에 차곡차곡 실었다.

하지만 가끔 그는 아이들에게 역정을 냈고 굼뜬 아이들에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을 냈다.

한 번은 혁대를 풀어 때리려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그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두려워해서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보았던 그 소년과 소녀는 이 작업을 거들지 않았다.

그들은 건물 뒤편에 냉소를 머금은 채 장상사의 뒤통수를 싸늘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작업이 끝났다.

엉성하지만 튼튼한 수레가 모터사이클 뒤에 단단히 묶였고 그 위에 육중한 화목 보일러가 적재됐다.

“자, 약속대로 보일러 실었수다! 멋진 양반.”

솔직히 놀랐다.

꽤 커다란 일거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났다.

대가는 벽돌식 건조 식량과 라면사리 몇 봉지가 전부였다.

지나칠 정도로 싸고 저렴하게 원하는 걸 얻은 것이다.

“······.”

여전히 이 공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저 지저분하고 사람 자체가 못난 장상사와 퀭한 눈을 가진 해골 같은 아이들 옆엔 1초도 머무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당한 일엔 정당한 대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부족한 거 같으니, 약간의 식량을 더 가지고 오려 하는데.”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저, 정말이야? 더 준다고?!”

“······내일 낮에 다시 들리지.”

“미안한데. 술 좀, 술 있으면 조금만 가져올 수 있어? 조금이면 돼!”

장상사가 손을 떨며 간청하는 걸 곁눈질로 보며 모터사이클에 올랐다.

“내일 봅시다.”

백승현의 모터사이클은 조금 버거워하면서도 이내 굉음을 내며 경쾌하게 질주를 시작했다.

*

“정말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정말 당신이 여기 다시 올 거라고 안 믿었어. 진짜.”

내게 필요 없는 식량 상당수를 그들에게 넘겼다.

물론 소주 한 병도 가지고 왔다.

장상사 하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키고 희생한 군인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한 내 나름의 성의다.

장상사는 이 시대의 인간들이 그렇듯 알콜중독자였다.

소주병을 따고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키는 걸 보면 말이다.

“캬~! 바로 이거야. 이거. 바로 이거라고!”

술을 마시나 마시지 않으나 그의 행동과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그는 불안정했고 주눅이 들었고 뒤에 서 있는 청소년들을 두려워했다.

그의 그늘이 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자 그는 더 진지하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그냥 버리고 가야 했어.”

아이들이다.

“중간에 버릴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아이들을 그토록 싫어하면서?”

“내가 저것들을 버리면 다 죽었을 거야. 지난 겨울도 내가 있어서 둘만 죽었지, 안 그랬으면 전부 다 다 얼어 죽었을 거야. 아암, 그렇고 말고!”

아이들에 대한 그의 감정이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뭐랄까, 불합리함으로 뭉쳐 있었다.

아이들을 동정하면서도 혐오하고, 아이들의 두려움을 받으면서도 또 두려워한다.

곧 위화감의 원인을 파악했다.

목적이란 게 보이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모순적인 삶으로 이끄는지.

해서 물었다.

“뭐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에 장상사는 텅텅 빈 소주병의 병목을 혀로 핥고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지긋지긋한 걸 떠안게 되었지.”

장상사의 눈이 반짝였다.

“아니, 알 거 같아.”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에 안 가려고.”

“지옥?”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좋은 일이라도 하나 해야 지옥에 안 가지 않겠어? 나도, 지옥 없는 거 알아. 하지만 개새끼인 채 죽을 순 없잖아?”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속죄 비슷한, 그런 감정인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아마 그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겠지.

나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시선을 옮겼다.

“아까 그 큰 애들은 어떻게 할 거지?”

그 소년과 소녀.

장상사가 괜히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위험하다.

이대로 두면 장상사가 죽거나 그들이 죽을 것이다.

“죽일 건가?”

비슷한 상황이라면, 나는 그들을 죽일 것이다.

“아니.”

역시 장상사는 나와는 다른 인종이다.

“안 그러면 당신이 위험할 거 같은데.”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지.”

“그것도 속죄의 일부분인가?”

“속죄? 뭐, 그런 거창한 건 생각하지 않아. 아무튼! 내가 걔들을 죽이면 나머지 애들은 전부 죽어. 당신이 봐도 내가 살날 얼마 안 남아 보이는 거 똑똑히 보이지?”

“······.”

“그 배은망덕한 새끼들한테는 그럭저럭 살아남는 법을 알려줬어. 좆같은 놈들이지만, 애들이 나보다는 걔들을 더 따르고 걔들도 나보다는 애들을 더 좋아하니.”

심각한 표정으로 비참한 현실을 이야기하던 장상사가 갑자기 소년처럼 히죽 웃었다.

“K-워키토키 있나?”

“있지.”

“CQ 알지?”

“당연히 알지.”

CQ.

무전기로 교신할 때 무작위 다수에게 호출을 요구하는 신호다.

대부분은 생략하지만 FM대로 한다면 공용주파수로 무작위 수신자를 호출할 땐 CQ로 시작되는 부호를 말해야 한다.

“C8로 알려줬어. 걔들이 무전기 손에 넣으면 C8 C8 거리겠지?”

뭐가 그리 웃긴 지 장상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키득거렸다.

내가 그의 술주정을 듣게 된 건 그의 인생사를 들으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식량과 함께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우민희의 시트지다.

사용법을 알려줬다.

“흰색이나 흰색에 준하는 색깔 나오면 무전기로 연락해. 전부는 못 데려다 줘도 그 아이는 잘 살게 해줄 수 있을 거 같으니.”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거나해진 얼굴로 장상사는 그의 아이들을 거느린 채 떠나가는 나를 배웅했다.

“씨팔!”

그는 우리만이 아는 신호를 보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

그 이후 장상사가 내게 연락을 다시 하는 일은 없었다.

나도 그는 물론이고 화목보일러조차 까맣게 잊었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고, 북쪽에서는 또 한 번의 몬스터 분출로 아비규환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고, 인천에서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도시 전체가 뒤집어지고 있었으니.

장상사를 다시 떠올린 건 이른 한기가 8월 말의 대지를 냉각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게시판에서는 가을처럼 선선한 날씨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서둘러 화목보일러를 꺼냈고 시험 삼아 불을 때보았다.

화르륵-

보일러의 성능은 만족스러웠다.

고장 난 곳도 없고 더 손 볼 곳도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장상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K-워키토키가 갑자기 공용주파수를 수신하기 전까진 말이다.

“씨팔.”

무전기 너머에선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갑자기 욕질인가.

의아해하고 있자니, 계속해서 같은 욕이 무전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씨팔씨팔.”

그제야 나는 장상사를 떠올렸다.

장상사의 아이구나.

그를 유난히 싫어하던.

“거기 누구 없어요? 대답 좀 해주세요.”

이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아마 장상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순간 드는 의문 하나.

그 아이들이 장상사를 죽였을까?

아니면 장상사는 지병으로 죽은 것일까?

“네? 누구 없냐고요? 씨팔씨팔.”

그 이유를 알 방법은 없다.

내가 저 신호에 답신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적어도 저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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